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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로 환경을 이기라(4) : 기도와 변화 (눅 9: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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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환경을 이기라(4) : 기도와 변화 (눅 9:28~29)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28-29)

I.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다섯 가지 대 사건을 꼽으라면, 첫째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었고, 둘째는 변화산의 사건, 그리고 그 다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죽음, 그리고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신 사신 부활, 마지막 다섯 번째는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하늘로 오르신 승천입니다. 그 중 이 변화산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신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단순한 선지자나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라 인류구속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이것을 입증했던 일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모세와 능력의 선지자의 대표자로 불리는 엘리야를 만나신 사건과, 거기에서 용모가 희어지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변화산에서 경험하신 사건이 그 후에 펼쳐질,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II. 영적 세계를 맛보는 길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첫 번째로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전에도 신령하고 거룩하신 분이셨습니다. 특별한 영적인 능력과 평범한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감화력이 그분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경험은 지금까지 있었던 경험을 능가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찬란한 모습이 되어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아마도 인류의 구속의 문제를 의논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변화된 용모는 이전에 그 산을 오르기 전 예수님의 그 몸과는 다른 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찬란한 영광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다시 한 번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형식적 신앙생활의 경험으로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도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우리를 교인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령한 세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결코 장난일 수 없고 성경이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라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가 오히려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눈뜨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청산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셔서 신령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셔서 예전에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눈뜨도록 만들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고 영이신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성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우리들이 날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순결하신 분이었는데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더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각인시키시고 성부께서 자기를 보내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평이한 교회생활, 그 이상의 무엇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시간이 되면 교회에 오고 시간이 되면 교회에서 흩어져 돌아가고, 주일 하루 나와서 예배드리고 신속히 교회를 빠져 나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삶 말고 무엇인가 보이지 않지만 어떤 영적인 세계가 있고 그 영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영적 관계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지만 우리들이 정말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훨씬 더 크고 넓으며 무한한 세계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한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세계,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자 하고 또한 그 성품을 닮아갈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감화이고 영적인 감화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지, 이 세상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이 눈뜨게 되면 그로써 그는 세상에 발은 딛고 있지만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랑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러한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셨습니까?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신령한 세계를 보려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산을 오르셨다고 말합니다. 산으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은 무슨 기도제목을 가지고 가셨을까요?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기도 제목이라기보다는 늘 하시던 기도, 주기도문에 용해되어 있는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고 하는 갈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 하나님의 뜻이 죄인들의 참된 회개와 복종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하는 그칠 줄 모르는 탄원, 예수님 당신뿐 아니라 이 세상에 굶주린 많은 자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서로가 서로에게 죄 지은 것을 용서해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소원, 유혹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고 시험에 든 사람들은 악에 빠지지 말게 도와달라는 간절한 기도,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하나님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아버지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기도제목 전부였고 또한 특별한 기도제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을 오르셨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기 위해 산을 오르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서 산을 오르셨고 그곳에서 그 가슴에 사무친 간절한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보시고 기도를 들으셨을 뿐 아니라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눈도 열어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미처 보신 적이 없었던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보고 거기에서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는 역사를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신령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서 매달리지 않는다면 단지 기도제목이 그렇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제목도 얼마나 그럴 듯 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바리새인의 화려한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말문을 잇지 못하고 목이 메어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던 세리의 기도는 그다지 내용도 없는 기도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장식된 바리새인의 기도보다는 오히려 이 세리의 울부짖는 기도에 기울어지셨습니다. 죄의식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용서를 구하는 죄인으로 나아갔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하셨습니다.

보십시오. 그럴듯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이 훌륭한 사람이 보기에 하찮은 기도제목 같아도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의 소원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러우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예수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야 할 제목들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을 비롯해서 회심하지 않은 우리 아이들,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 교회는 나오지만 세상을 더 사랑하는 아내, 내게 맡겨진 주의 일, 내게 맡겨진 영혼들,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많은 기도의 제목들, 그것이 무엇이든지 단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매달려 간절히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해 눈뜨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해야 할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예상치 못했던 기도 제목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게 만드시고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에 따른 어려움을 가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아니시면 그것을 해결해줄 수 없는 상황에 두시고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하시고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한 번 정결케 하신 후에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열정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이미 병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열정 없이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미지근한 물로 기관차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자 할 때 세상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둡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섬기기로 뜻을 세우고 내가 여기에 있고 이렇게 세운 뜻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이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적들이 많습니다. 항상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뜻을 세운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이 주신 감동에 의해서 붙잡힌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입니다.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오해하는 소문이 들려오면 괴롭습니다. 반대자들이 나서면 두렵고 어려움이 생기면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항상 대적들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보여주시는 신령한 세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신령한 세계의 영광스러운 경험은 아주 놀라운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려는 이 길이 눈물의 길,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지만 아버지께서 이 길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바로 기도하시다가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제목이 무엇이든지간에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기도 제목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수단으로 삼으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이처럼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고 이제껏 그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존재하고 있는 은혜의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보았을 뿐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더 원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 더 신령한 은혜의 세계, 그리고 더 견고한 믿음 생활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그러한 신령한 세계를 보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아가서 부르짖고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계기 삼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위대한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III. 변화에의 통로

두 번째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이 변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의 변화일 것이라고 봅니다. 찬란한 영광으로 변화되어 눈부시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에워 쌓여서 찬란한 영광스러운 광채를 띠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과 거룩함 그리고 그 광채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났던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그렇게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되려고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변화산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이 사건 때문에 변화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 처음부터 변화산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름 없는 한 산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산을 구경하거나 혹은 변화되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기 위해서 산을 오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 놀라운 용모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찬란한 영광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대면할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인격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직분은 계속 받았는데 그만큼 인격은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격이 그대로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 제목이 뒤따르지 않으면서 말씀만 듣고 끝나는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언제나 지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둘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깨달을 때의 마음의 각성을 토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말씀을 통해서 조명 받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열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음과 야비함, 여전히 육체를 사랑함,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려는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리의 모든 삶의 태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깨닫고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면서도 자신이 깨뜨려지고 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한 성도가 깨뜨려지고 마음이 무너지는 진실한 회개의 경험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의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서 진리의 칼을 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달 째, 몇 년째 교회의 마당만 밟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까? 여기가 어디입니까?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집이 아닙니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오는 것입니까?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있습니까? 뜻 없이 되풀이되는 교회 출석만을 통해서 내 영혼이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가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고, 둘 중 하나를 명백하게 하십시오. 차든지 덥든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계3:15).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으면 제대로 믿으십시오. 형식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하는 이들은 믿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믿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과시하고, 믿지 않는 사람 속에 있으면 자기는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세상 편인 것처럼 흉내 냅니다. 그렇게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정직하게 회개하고 아버지께 탕자처럼 돌아오는 것이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진실해져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너는 예전에 네가 아니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행하던 거짓들,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 속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는 새사람인 것 같다가 금방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것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변화가 되려 하다가 옛사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내가 나인 것 때문에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전에 나여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예수님까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하셨는데,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까지 보내주셨는데 예전에 못된 기질을 그냥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너무 싫습니다.”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새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기도생활을 지속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계속해서 부패한 성품들이 변화되고 주님의 사람으로 순결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루 동안만 해도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많이 봅니까. 더러운 것들을 그저 보기만 합니까.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스쳐지나갑니까. 눈으로, 말로, 귀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이런 것들은 계속 꽉 차있는데 그것들을 씻겨내는 눈물의 기도가 없습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성화의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하나님께서 내 속에 주신 예수의 생명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와 죄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다니지만 신자 아닌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쁜 신자가 되려고 결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자기 깨어짐의 아픔 속에서 참회의 눈물로 죄와 더러운 것들을 뽑아버리고 주님이 심으신 은혜들은 간직하는 진실한 기도생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타다만 나무토막처럼 불결한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범사에 절제력이 있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 위기가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기쁜 일이 있어도 경솔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다운 신자가 되어봅시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큰 사랑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함에 대해 뉘우치면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울어봅시다. 그래서 더러운 욕심의 때, 세상 사랑의 오물, 주님을 섬긴다고 살아오면서도 마음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찌꺼기들을 씻어냅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IV. 관계의 확증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인 치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은 것을 다 하기 마련입니다. 기도가 좋으면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다 핑계이고 기도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분의 아들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그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은혜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평생 동안 감동이 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형벌은 주님께서 받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니.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유업들을 받게 하시다니, 그런 축복이 내게 가당하기나 한가’라고 하는 감격이 바로 관계의 감격에서 밀려오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만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당연한 것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관계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좋으신 주님, 귀하신 주님, 내 인생의 전부이신 주님, 내 삶의 이유이신 아버지, 주님만이 나의 행복이시며 내 기쁨이시며 나의 대치할 수 없는 가치이신 하나님” 이런 모든 고백들은 관계에 대한 인침이 있는 신앙생활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꼭 고아원 같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의 근본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된 것, 주님의 자녀 된 것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감격 없이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기도생활의 부족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찬송 고백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인 치심이 두 번 나타납니다. 요단강변에서와 변화산에서였습니다. 모두 기도하실 때의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의 감격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커다란 힘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 행복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그 관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이십니까? 주님이 만져지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런 친밀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근심을 보면서 회개하고, 주님의 아픔을 보면서 뉘우치고, 주님의 열망을 보면서 충성할 결심을 하게 되며, 주님의 지혜를 보면서 우리들이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어루만지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치료받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기도생활 없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V. 결론과 적용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기도의 간절한 제목을 가지고 변화산을 오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셨고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 대한 인침을 다시 한 번 확증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진정한 힘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했을 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면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기도할 때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 이 세상에 발을 딛고는 있지만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지금의 내가 아닌 나로 바꾸는 그 기도의 세계, 지금 맛보고 계십니까?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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