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29-44)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제  목  :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본  문  :  요한복음11:29-44

우리 주님 주변에는 항상 12제자들이 따르고 있었고,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기 원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라고 하는 사람은 나사로라는 한 사람뿐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두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친구가 있으므로 참으로 든든하게 살아갑니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는 재물로 사귄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고 합니다.  잠19:4에 보면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재물을 얻어 보려고 친구가 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가 좀 가난하게 되었다고 하여 교류를 끊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잠언18:24에 보면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다는 기별에, 만사를 제쳐두고 친구에게 갔어야 하는데, “이 병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친구 나사로의 집에 들려 신세를 지고 가셨으며, 두 누이들로부터 대접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아주 값진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에게 부어드린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나사로 가정에서 사람이 죽어간다는 기별이 왔는데,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유하다가 베다니로 가시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를 보시고 즉시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에게 가지고 나온 문제를 다 해결해주셨는데, 오늘은 이상하기만 합니다.  신세를 지셨다고 하면 신세를 졌다고 할 수도 있고, 평소에 정말 사랑하시는 사람들이었는데 이틀이나 더 머무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것 같은데, 그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통의 늪에 잠겨서 빠져 나오고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고난을 당하는 분들을 보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 평안하고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앙이 좋으신 성도들도 하나님을 가혹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갈등을 겪는 것을 봅니다. 

필립 얀시라는 분이 쓰신 책들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좀 긴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우리 가정에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질병이 그치지 않고, 실직하고, 자녀들이 힘들어하고, 화마가 찾아오고, 인간관계가 악화되고, 이런 저런 고통, 크고 작은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데이빗 시멘즈라는 상담학자가 쓴 “탓”이라는 책을 제자 훈련하면서 읽었습니다.  데이빗 시멘즈가 자기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가 인도에 선교사로 있을 때였는데, 생후 10개월의 장남이 전격성간상균 이질에 걸려 촌각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전격성이란 말은 ‘벼락처럼 내려친다.’는 말입니다.  데이빗 시멘즈 부부는 다음 날 10개월 된 아들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며칠간이라도 병원에서 치료해본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다음 날 장례를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을 보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데이빗 시멘즈 부부는 찬송을 부르다가 아들을 데려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싫건 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국도 가족도 친구도 다 버리고 선교사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자 16,000Km 떨어진 이곳 인도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믿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습니까?”라고 절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문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모든 시험에 면제되고, 모든 고통을 물러가는 그런 특수한 면역성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고통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평안한 잠자리를 주마, 나를 믿으면 어떠한 불의도, 재난도, 상처도 없는 그런 세상으로 여행하는 무사통과하는 여권을 발급하노라”우리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사도요한은 자연사하였지만,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다 순교하였습니다.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롬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 때는 이미 나사로를 장사지낸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와서 울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울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두 자매가 우는 것을 보시면서 당신도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예수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셨는데, 그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습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아놓았습니다. 

두 자매를 위로하기 위하여 모여든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또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항변합니다. 

우리 주님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셔습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누이 마르다가 말씀드립니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이 하도 강력한 의지로 말씀하시니 이에 순종해서 유대인들이 나사로 무덤에서 돌을 굴려내었습니다.  주님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고통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고통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고통도 능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셨을 때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니,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병이요, 우리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을 때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신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때에 마르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가장 귀한 고백이요, 가장 정확한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받기 위한 준비된 사건이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전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신앙을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르다 형제의 신앙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통은 영혼을 살리고, 신앙의 유익을 가져옵니다.

처음에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신다고 나를 싫어버리신 것이라고 섭섭해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될 때가 많습니다.  이사야55:8-9절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르며, 그의 길은 나의 길과는 다르고, 나보다 높이 계십니다.

이러한 똑같은 사고의 오류를 우리 주님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는 말을 퍼부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27:42-43)  그래도 우리 주님은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만 드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건져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군병 앞에서 지켜주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서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건져주시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죽게 하셨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땅의 것만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영원까지 내다보시고 사역하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12제자들이 길을 가던 중에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의 고통을 보시면서 달리 보셨습니다.  제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요, 저술가인 C.S 루이스는 아내가 골수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을 주제로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9살 때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루이스는 본래 독신주의자였는데, 그의 책을 읽고 기독교로 돌아온 미국의 소설가이며 시인인 조이 그레샴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습니다.  루이스가 58세 때에 결혼하였는데, 부인 조이는 루이스보다 16년 연하였습니다.  부인 조이는 결혼할 때에 벌써 불치의 병인 골수암에 걸린 상태이었으며, 그로부터 4년 후에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기 위해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며,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온전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에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고통이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죽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족한 은혜입니다.

폴 브랜드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의사요, 나병의 전문가입니다. 그는 인도에서 20년간 미국에서 30년간 오로지 나병환자만 위하여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인도에서 이름도 없이 환영받지도 못하면서 나병환자를 위하여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폴 브랜드박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 고통당하는 나환자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폴이 나환자만 전문적으로 돌아보다가 심한 감기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강연을 하고 호텔로 돌아와 며칠 간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조금 회복되어 배를 타고 영국의 숙모님 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배에서 내려 기차를 장시간 타고 숙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그에게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신을 벗고 잠자리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발의 반쪽 정도가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마도 환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볼펜을 가지고 발꿈치를 찔렀습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발꿈치 주변에 뭔가 닿은 느낌도 없었습니다. 무서운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나병의 증상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박사님은 순간, 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나병환자로 전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몸을 움직여 무감각한 발에 힘을 주고 무게의 중심을 옮겨보았습니다. 그는 옷가방을 뒤져 진단용 바늘을 찾았습니다.  그는 발목 바로 밑 살갗을 바늘로 찔러보았습니다. 아무런 느낌도 고통도 없었습니다. 바늘에 찔려 생긴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전율하였습니다.  나병환자를 대하면서 조금은 두려워하였는데, 드디어 올 것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영국에 머물러야 할 것인가?  가족들과 영원히 떨어져야 하는데, 모든 꿈도 소망도 이제 끝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불안과 절망에 싸여 있었습니다.  나병을 진단하기 위하여 바늘을 들고 심호흡을 하면서 발꿈치를 찔렀습니다. 그 순간 폴은 너무나 아파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 통증만큼 유쾌하고 감사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는 장시간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다리로 흐르는 피가 중단되면서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하나님 고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로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이 고통을 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나 중심으로 살던 부정적인 시각과 가치관에서 놓여나와야 합니다.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동여매고 있는 부정적 사고라는 베천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수족을 동여매고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수건에 싸여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나오라고 하여 살아나온 나사로를 향하여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면서 불평하는 것으로 고통의 순간을 넘기지 말고, 먼 길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 더 완전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전용하시고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영성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통하여, 고통에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정된 시각, 우리의 잘못된 경험, 우리의 부정적인 가치관, 당장  코앞의 것만 쳐다보는 편견의 베 천을 풀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역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