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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임을 감당하는 자 (느 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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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감당하는 자 (느 2:11~20)

폼페이 발굴 유적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병사가 부동 자세로 죽어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룰 때 이 병사는 초병의 자세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생을 마감한 것이다. 누구든지 이 사람 앞에 서면 책임을 다한 무명의 군인 정신에 감동을 받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위해 맡겨진 임무와 책임을 다하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느헤미야는 왕의 조서를 받아 유대 나라로 돌아왔다. 총독의 자격으로 돌아온 그는 성벽 재건이라는 책임을 안고 돌아왔다. 느헤미야는 귀국 후 3일간을 아무 행동없이 보냈다. 그리고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일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어떻게 책임을 감당하는가? 

첫째, 시간과 일에 대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다. (느2:12)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올리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성취될 일도 아니다. 건축 자재, 사람의 동원, 보수해야 할 문, 재건에 드는 예산 등 책상 앞에 앉아있는 탁상공론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느헤미야가 귀국 후 3일 동안 조용히 지낸 것도 일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대면해보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3일의 시간을 집중하여 보냈다. 그리고 밤에 일어났다. 현장에 나가보기 위해 모두가 잠자는 시간에 일어났다.

느2:12下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쌔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자기가 감당할 일을 위해 밤 중에 일어나는 사람. 그는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바사 왕이 부여해 준 총독의 지위를 오직 성벽 재건이란 사명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과 일에 집중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해낸다. 적당히 일을 하는 사람은 큰 일을 잘 이루어내지 못한다. 사명이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집중해야 한다.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깨어야 한다. 사명이라고 하면서 집중하지 않기에 감동마저도 없다. 우리는 한 우물 파기를 해야 한다. 칼을 갈아도 하나의 칼만 갈아야 칼에 날이 서고 그 칼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교회에서 책임 맡은 것이 있다면 집중하자. 세상 일에는 실패하지 않고 잘못 되지 않도록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은 큰 죄다. 맡긴 책임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자.
 

둘째, 현장에 맞는 일을 점검하는 사람이다. (느2:13~16)

느헤미야는 느2:13~16을 보면 예루살렘 성벽을 점검하기 위해 골짜기 문으로 나갔다. 분문을 지나, 샘문을 지나 왕의 못에 이르러 보니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시내를 쫓아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 본 후에 돌이켜 골짜기 문으로 돌아왔다. 느헤미야는 직접 짐승이 갈 수 있는 현장,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현장을 확인했다. 무너진 성벽을 따라가며 불에 타버린 문들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어떻게 건축을 시작할지를 준비한 것이다.

우리는 책임이 맡겨졌을 때 현장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 점검하므로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재료와 계산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현장 점검을 도외시 하는 사람은 책임을 잘 감당 못하는 사람들이다. 일전에 영남선교대회를 위해 부산에 내려갈 때 휴게소에 들렀다. 수도권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해 내려가는 선교대회 버스가 얼마나 많은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용변이 급해 화장실을 갔다. 여자 화장실이 모자라서 남자 화장실에도 여자들이 줄을 서서 용무를 보는데 남자 화장실의 좌변기는 2개만 내어놓고 바리게이트를 쳐 놓았다.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일이 기발하고 재치가 있어 보여서 화장실 청소하느라 걸레를 들고 있는 아저씨께 물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밀어닥칠 줄 어떻게 알고 여자 화장실을 확보했습니까?”라고 하니까 화장실에서 근무한 현장 경력이 6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탁 보면 알지 않습니까? 여자 화장실을 확보하지 않으면 여자가 대부분인 사람들을 고생시킨다.”고 하면서 6년 현장 경력을 자랑한다. 난 그때야, ‘바로 이 사람이다.’ 교회에서 일하는 일군들이 저 사람 같았으면, 저 사람처럼 현장 대응을 신속히 하고 현장을 점검하여 준비된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여름 냉수같이 시원한 사람일까라고 생각하였다.

누구나 현장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 좋은 일군은 책임 맡은 이가 되었을 때 남이 하지 않는 준비와 점검을 위해 현장으로 가 보는 사람은 성공하는 인생이 된다. 느헤미야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의 역할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려고 현장 점검을 실행한 것이다. 현장 경험이 나를 지혜롭게, 권위있게 한다.

목회도 해본 사람이 신학교 총장이 되어야 하고 기계도 만져본 사람이 통상 장관이 되어야 한다. 국방부 장관도 군대도 안 가보고 장관이 된다면 현장을 모르는 지도자이기에 실수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권위도 안 서고 존경도 받지 못한다. 현장 점검을 하며 현장 체험을 사랑하라. 거기서부터 책임을 잘 감당하는 길이 열린다.

 
셋째, 협력을 얻어내며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다. (느2:17~18)

느헤미야는 느2:17에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외친다. 그리고 느2:18에서 하나님의 손이 느헤미야를 도우신 일과 왕이 일러준 말씀을 고한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체적인 협력을 얻어내기 위한 증언이었다. 바사 나라에서 고국의 무너진 소식을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며 뜻을 세웠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 재건을 허락받는 응답의 열매가 주어졌다는 간증은 저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느2:18下 “일어나 건축하자.”하고 힘을 내었다고 쓰여 있다.

느헤미야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고국으로 오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린 기도의 갈망과 하나님의 도와주신 손길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진실이 통하게 되었다. 그들은 힘을 내었고 건축하는 역사에 협력하는 일군들로 자원하였다. 저들은 느헤미야를 신뢰하였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지도자는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도력이란 영향력을 주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느헤미야는 이런 면에서 탁월한 리더였다. 리더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Follower, 즉 따르고 추종하며 협력하는 자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강제에 의한 힘이 아니어야 한다.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순종이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런 역할을 너무나도 잘 했던 것이다. 책임을 맡은 자로서 진실한 신앙의 이야기를 전해줄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 협력을 얻어낼 수 있는 사람, 그것은 어려운 것 같으나 진실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순히 신뢰하는 자로 서면 따르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신다. “함께 일할 사람을 주소서.”하며 걱정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신뢰하며 따르라.
 

넷째, 비웃는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느2:19~20)

느헤미야는 느2:19에서 비웃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 비웃음을 일축하고 확신의 사람으로 서 있다. 느2:20을 보라.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고 기록된다.

느헤미야는 건축이 준공되는 확신 속에서 용기와 사기가 충천하여 있다. 우리는 건축을 위해 일어나는 일만 남았다. 나머지 잘 되게 하실 분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사실 사역에 대한 비웃음을 어느 때이든지 나타난다. 이 조롱과 비웃음은 사단의 공격 방법이다.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성벽을 재건하여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사단은 어떠하든지 일을 그르치게 하고 중단하게 만들려고 두려움으로 역사한다. 그러나 책임을 맡은 자가 좋은 성공자가 되려면 비웃는 무리들을 의식해서는 안된다. 부정적인 말, 공격적인 말, 안될 것이라는 패배 의식 이런 것은 거룩한 일 앞에 나타나는 당연한 과정으로 알고 뛰어 넘어가야 한다. 일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분열과 갈등, 공격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느헤이먀는 담대하였다. 반대자를 일축하였다. 그러고 보면 느헤미야는 책임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자질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중역이 되고 교회의 임원이 된다면 좋을 것이다. 이 세상의 회사는 사실 교회와 성경이 제시하는 영적 지도력을 갈망하며 기독교적인 덕목을 지닌 사람을 찾고 있다. 그런데 정작 교회와 크리스챤은 이 지도력을 외면하고 소경처럼 세상적 지도력을 붙잡으려고 방황하고 있다. 정말 느헤미야의 성공적 지도력의 모습을 배우려 하자. 

그런데 이 책임 맡은 자로서의 성공적 모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깊은 숙고, 집중력, 현장 점검, 사람을 세우기, 두려움 없는 요기 이런 성공적 자질 등은 타고난 것일까?

지도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지도력은 감사하게도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만들어질까? 즉 하나님에게 뿌리 박은 신앙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다. 성경을 보자.

1) 느2:12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이라고 하였다. 성벽 건축의 일은 하나님이 감화 감동하여 마음을 움직인 일이다. 감화가 없다면 이런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2) 느2:18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그가 목표로 삼은 성벽 건축의 일을 위해 그는 예루살렘에 왔는데 바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운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재건의 일을 위해 출발도 못했을 것이다.

3) 느2:20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성벽 중건을 위해 도우신 하나님, 그 지나간 시간을 책임지신 하나님이 지금도 형통하도록, 성벽 건축이 완성되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말이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책임과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역할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귀국의 이유도, 총독이 된 이유도, 왕의 허락을 받아낸 이유도, 유대 땅에서 해야 할 사역들 모두가 하나님이 근거가 되었다. 하나님에게 신뢰하고 하나님에게 뿌리 박고 있다.

그러므로 책임을 감당하는 지도력의 사람들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가? 철저하게 하나님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느헤미야의 자질을 단순히 그의 능력으로 보게 한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의 지도력, 그의 지도자의 자질은 하나님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반대파를 처리하는 융단조차도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만이 지도력의 근거이다. 이것이 말씀이 주는 중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도자를 만들어 주는 분이 하나님이기에 하나님만이 지도자 중의 지도자이시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지도자라고 자처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내가 지도자라고 으시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지도자는 한 분이시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세우실 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그 분이시다.

마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의 삶의 근거를 삼위일체 하나님께 두면 나는 시대를 세우는 리더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시대 모든 것이 무너졌다. 대학, 방송사, 스포츠, 학문, 경제계의 기초를 다시 쌓아올리고 가정의 무너진 터를 다시 쌓아올리는 리더가 일어나야 한다. 그 지름길은 하나님에게 삶을 맡겨드리는 신앙이다. 모든 분야에서 거룩한 책임을 감당하는 자가 되려면 오직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지도를 받는 신앙에 전력하며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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