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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 (요일 4: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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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 4:7~13/ 하나님의 사랑

한 10여년전 우리나라가 IMF로 힘들어 하고 있을 때에 한 소설책이 온 국민들의 마음을 울린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가시고기”란 책입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혼한 아버지에게 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서 생사를 헤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프랑스에 살고 있습니다.
혼자 있는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보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렇게 애쓰던 어느날 자기 몸이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병원에 가보니 간암에 걸려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백혈병에 걸린 어린 아들에게, 아빠가 간암에 걸렸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애쓴 끝에 아들은 삽니다. 그래서 홀로 남은 아버지는, 아들을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헤어지기 싫지만 프랑스에 있는 이혼한 부인에게 보냅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 아버지는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없이 쓸쓸히 죽게 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서울의 모 교회에 출석하시는 조창인 집사님입니다.
이 집사님이 어느 날, 친구집에 가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간호하는 친구의 형편을 옆에서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힌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병든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을 소설로 한번 그려보자' 이렇게 해서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아버지가, 급기야는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데까지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어떻게 이 소설을 마무리해야 될 지 도무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날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의 장면이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고, 말없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희생하는 모습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번쩍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영감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처럼, 마무리를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완전히 죽어서 희생하는 것으로 끝맺어라'는 착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을 마무리를 했습니다.
다 쓴 원고를 출판사에 들고 가면서 '한 만 권만 팔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진 어려운 때에, 생각 이상으로 100만 권이상이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된 것입니다. IMF 이후에 실직을 당한 아버지들이, 가족을 위해 마음을 태우고 고생을 하는 사회적 상황과 맞아 떨어져, 많은 아버지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소설이 되었습니다.

사랑중에 가장 깊은 사랑을 우리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귀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이 영원하거나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를 않습니다.

지난 5일, 죽은지 2달 만에 발견된 4살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사는 것이 힘들다고, 그 엄마가 발육이 늦어서 혼자서 제대로 못하는 아들을, 바깥에서 문을 걸어두고 집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사는 동안에 아들은 혼자서 굶어 죽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모사랑보다 더 깊고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같이 은혜받기를 소망합니다.

1.희생입니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는 독자, 또는 독생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독생자, 독자는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아들 하나밖에 없을 경우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독자는, 아들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그런 아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힘든 일로 인해서 잃었다, 그런데 다시 아들 하나 얻었다, 그때는 독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이 전부요, 그 아들 외에는 다시 얻을 수 없는 상황일 때 독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들 예수님 이 땅에 보내시고 난 다음, 또 다른 아들 하나 얻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은 아들 하나,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귀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죽이기 위해서죠.
가만있으면, 우리는 다 지옥가고 마귀의 자식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슴아파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이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눈물을 머금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하늘이 빛을 잃고 어두웠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길,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고통당하여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못 보시는 아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픔을 눈뜨고 볼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자기 아들 죽을 날짜를 알고 있는 부모가, 그 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부모의 사랑 이상입니다.
내 자식, 남을 위해 죽는데 보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된 다음에는 어쩔수 없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자식 키우고 그런 자리로 보내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울의 모 교회의 청년들이 아프카니스탄에 봉사하러 갔는데, 탈레반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녀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래, 이 사건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하라고 한 하나님의 사인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서 죽어서 순교해라”그렇게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시골 마을에 남편이 병들어 죽고, 딸만 데리고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은 어려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십대가 되면서 나쁜친구들을 만나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술도 마시고 외박도 하게 된 것이지요. 엄마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 하자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가출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유흥 도시 향락 도시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딸이 있을 곳이 뻔했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호텔, 나이트 클럽, 또 술집, 도박장 이런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딸을 찾아나서기 전에 자기 사진을 사진관에 가서 여러 장 확대 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이 갔을 만한 그 지역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 박스에도 붙이고, 자기 사진을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그리고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지난 후에, 그의 딸이 어린나이에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춤추고 호텔을 전전하면서 피곤하여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는데, 자기의 눈에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 보았더니, 어머니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었습니다. 뜯고서 앞면 뒷면을 살펴보았더니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집을 나간 딸을 찾으려면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메모를 남겼지만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딸이 부끄러워 할까봐 오히려 내가 부끄럽고 내가 가슴아픈 것이 낫지,

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이고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어느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이 사랑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관심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인줄 압니까?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가만히 둡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관심을 가집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지요. 그래서 뭐하면 좋다, 뭐해라 그렇게 말합니다.
누구에게 말합니까? 자기 자식에게 말합니다.

어제 어떤 일간지에 나온 보도 중에, 대학생들이 가면 갈수록 동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동거란 무엇입니까?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 같이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결혼하기 전에 학생신분으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생기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에는 생활비 아끼기 위해서 동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됩니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뭡니까? 성적인 문제지요.
그런데 한 부모가 인터뷰한 내용이 같이 실렸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대학생들이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는 것을 어떻게 보냐고. 그랬더니 이 부모님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아버님 딸도 동거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더니 내 자식은 안된다, 허락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왜요? 내 자식이니까요.

끊임없는 관심, 간섭, 훈계, 다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심지어 꾸중하는 것도 사랑의 표시입니다. 칭찬만 하면 됩니까? 항상 당근과 채찍이 같이 나와야 되지요.
성경은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들어라고 했습니다. 때리라고 한 것이지요. 무조건 칭찬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관심이지요.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이러저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이스라엘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한 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은 어떻게 보면 심하다 할 정도로 이런 것을 하고 저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방민족들이 뭘 하든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아오면 사랑하시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든, 우상을 숭배하던 무슨 짓을 하던 하나님은 무관심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 뭘 해라, 하지 말라 그런 말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심가지신 그 사랑으로, 오늘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자식들은 부모 간섭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생활을 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귀한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간섭하십니까?
우리가 더 잘되라고, 더 나아지라고 관심가지시고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관심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책임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자녀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책임지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인생을 그분께 맡기면, 하나님은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왜요? 부모니까요. 아버지이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시고 책임져 주셨습니다.
#신명기 32:10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탕자의 비유 보십시오. 정확한 표현은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탕자가 바깥에 가서 뭘 했다, 어떻게 지냈다보다, 그 아들이 떠난 다음에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느냐 이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누가 먼저 봤습니까? 아버지가 먼저 봤습니다. “상거가 먼데”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빈털터리 된 아들을 먼저 알아 봤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누가 했는데요? 아들이 했지요. 그런데 끌어안아 주시는 분은 누굽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깨끗하게 감싸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배고픈 자 먹이시고, 목마른지 마시게 하고, 헐벗은 자 입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에 새 전도사님이 담임자로 부임하였습니다.
첫주에 무슨 말씀을 증거할까 하다가, 오병이어 기적을 부임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첫 목회지에서 하는 첫 설교이니 얼마나 긴장되고 조심스럽겠습니까?
교인들도 새 전도사님의 첫 설교라서, 긴장을 하고 정신 차리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너무 긴장해서,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오천 개로, 다 섯명을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제일 앞에 앉았던 권사님이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교인들이 와 하고 웃고, 전도사님의 첫 설교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왜 웃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지난 주일에 한 실수가 너무도 부끄럽고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대답해서 망신을 준 권사님도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오병이어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나도 할 수 있겠다 하고 대답한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권사님? 이번 주에도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전도사님! 아 지난주에 먹고 남은 것 있잖아요?” 교인들이 그 대답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가롯유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셧는데도 전혀 티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마지막 성찬식 할 때, 예수님은 12제자에게 끝까지 잔과 떡을 돌리셨습니다.
저 같으면, “너 임마 너 빠져”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
뿐만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를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그 사랑을 믿으며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롬 8: 37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헨리 나우웬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인 동시에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이분이 1996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 수용 기관에서 봉사했습니다.
그가 끝까지 맡아서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뇌성마비 환자였습니다.
이 아담은, 지금 자기를 돌봐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도, 그 이름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 왜 나에게 이런 정성을 기울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 아담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엄청나신 주님께서 오늘 나를 돌보시고 지켜주시는데, 우리는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분좋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살펴 주시는데 무엇이 겁납니까?

맹인이요 고아였지만, 지금은 백악관에서 세계를 위해 일하는 강영우 박사 아시지요.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했습니까?
항상 그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내게 주신다. 더 좋은 문을 열어주신다”
나는 비록 고아요 맹인이지만, 나를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는 분이시다. 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디가드 아십니까? 경호원아십니까? 가이드 아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신 그 분이, 오늘 나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천군 천사를 먼저 보내서,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미리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신, 그 분이 오늘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단지 믿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분이 다 해주십니다. 자녀는 부모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이지요.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믿음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11~12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서로 사랑한다는 말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관계가 좋은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어떻습니까? 인간관계가 좋으면 여러분은 서로 사랑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몰려오고, 여러분과 이야기 할때 웃음이 넘치고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인간관계가 좋은 것이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없어서는 안될 사람, 꼭 있어야 될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성령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수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누가 주십니까?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단점이 보이고, 실수가 보이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성령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약한 것은, 밥을 못 먹어서 배고파 그런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못해서 몸이 약해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큰 믿음을 사모하십시오,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날마다 감격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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