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빌 4:10~13)

  • 잡초 잡초
  • 662
  • 0

첨부 1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빌 4:10~13)

어머니께 드리는 안부 인사

저희 어머니는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기에 안부 전화를 할 때 "건강은 어떠세요?"라는 인사보다 "올해 농사는 어떠세요?"라는 말을 더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한 번씩 어머니 집을 가게 되면 짐을 풀기도 전에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시는 몇몇 곳의 밭을 한번 둘러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합니다. "올해는 사과가 많이 달렸네요. 크기도 색깔도 무척 좋아요. 농사일 하시느라 고생 하셨어요." 별것 아니지만 아들의 관심에 어머니의 얼굴 표정은 흐뭇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과수원의 사과는 수확하고 있어요? 가격은 어때요?" 어머니께서 얼른 저의 말을 받아 대답하셨습니다. "과일 수량도 적게 나오네. 가격도 작년의 절반밖에 되지 않네." 어머니의 한숨과 근심이 아들의 전화 수화기에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농사에 대한 근심으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근심을 하면서도 늘 하는 뒷말이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이것저것 생각하면 어떻게 농사를 지어. 잘 되는 해가 있으면 못되는 해도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보통으로 흘러 들을지라도 저는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여자의 몸으로 과수원 농사를 이어받아 해보았지만 수년 동안 벌레 먹은 과일을 생산하시면서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런 시간도 흘러가니 농사에 대한 기술도 생겨 지금은 나름대로 좋은 농작물을 수확하시는 분이 저의 어머니입니다. 어떤 해는 흉년으로 농사를 망쳐버렸습니다. 어떤 해는 풍년으로 좋은 소득을 올리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어머니는 흉년이든 풍년이든 그해 농사에 늘 만족하시며 살아가시는 분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애정 결핍을 채우려는 사람의 네 가지 유형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 사랑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결핍된 사랑은 아무리 채워 나가도 온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애정 결핍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눕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쟁취형'입니다. 다른 말로 '밀착형'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호감 가는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합니다. 두 번째 유형은 '도피형'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거리 유지형'이라 말합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을 당하므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늘 도망 다닙니다. 상당히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기도 합니다. 세 번째 유형은 '혼돈형'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언제 붙어야 할지 떨어져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즉 붙어야 할 때는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때 붙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안정형'입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붙어야 할 때를 알고, 떨어져야 할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자족형' 신앙의 형성 과정

방금 말씀을 드린 애정 결핍을 채우려는 사람의 네 가지 유형과는 맥락을 같이 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삶에서 또 다른 유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삶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말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바울이 '자족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 역시 바울에게 자족하는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계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8~9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사탄의 가시를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청했을 뿐 아니라 그가 스스로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신앙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바울의 자족하는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 알므로"(12절) 자족하는 신앙을 배워 나갔습니다. 그가 '비천에 처할 줄 안다' 는 것은 복음 사역을 하는 가운데 주림, 목마름, 추위, 헐벗음, 육체의 고난과 정신적 박해와 같은 갖가지 비천에 처하면서도 그 가운데 적응해 나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증거를 고린도후서 11장 23~27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의 비천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비천함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비천함을 몸으로 경험하므로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자족하는 신앙은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그리고 신앙의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직접 내려가는 경험을 통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므로"(12) 자족하는 신앙을 배워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에 처했을 때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또 기도 생활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풍부에 처하면 열심히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좋을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많이 가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을 14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풍부에 처할 줄 알았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세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사역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복음 사역을 위해서 계속해서 물질적으로 돕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서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들려집니다. 그러니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급한 마음으로 바울을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 라는 사람 편으로 바울에게 전달됩니다. 이 헌금을 받고 기뻐하는 장면이 빌립보서 4장 18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지금 바울이 크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빌립보  성도들이 물질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 만큼 풍부하게 되어 기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들의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자신들의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풍부할 때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므로 자족하는 신앙을 배워 나갔던 것입니다.

자족하는 신앙의 유익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저마다 더 가지려고 온갖 힘을 쏟아 붓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힘을 쏟습니다. 부를 가지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축척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도무지 만족하며 사는 법이라고는 모두 상실해버린 세상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분수도 모르며 마음껏 낭비하는 세대가 오늘의 세대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보며 '이양하'씨가 쓴『나무』라는 글의 일부분을 소개를 해드립니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이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厚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생략.

여러분에게 읽어드린 이양하씨의 글을 한자성어로 표현하면 어떤 말이 되겠습니까? 저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이야기 한다고 봅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를 편안히 여기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분수는 이만큼이니 이만큼만 하고 사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말을 인정하고 만족하겠습니까? 설령 이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리 만족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족하는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 역시 성경을 통해서 자족하는 신앙에 대해서 배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흘러온 이야기 속에서 바울은 '비천함'과 '풍부함' 에 처할 줄 알므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말합니다. 즉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울을 통하여 배운 자족하는 신앙은 어떤 유익을 가져다줍니까?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6~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울은 우리의 삶에서 자족하는 신앙을 가지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경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은 사회의 약자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인데, 우리의 마음에 자족하는 신앙이 없이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경건에 아무런 이익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바울과 같은 자족의 삶을 배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건에 유익이 있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소외된 사회의 약자들을 향하여 관심 가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바울은 그의 자족하는 신앙이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아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비천함에 처해 있을 때 그 비천한 자신의 여건과 환경만 바라보았더라면 낙심하여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의 가장 풍요로운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교만하여 그 풍요 때문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비천에 처해 있을 때도, 풍요함에 처해 있을 때도 모든 상황을 극복하게 하시고 조절하게 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자족하는 것을 배웠지만 그 뒤에서 감독하시고 이끌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함을 배우는 것이 가능했음을 고백합니다. 성경은 바울이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13절은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의 환경을 가장 풍요로운 환경으로도 만드십니다. 반면 가장 비천한 환경으로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앉아 계시는 성도님 각 개인의 환경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가장 풍요를 누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너무 비천함을 누리는 성도님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한 환경 가운데서 그 환경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게 여러분의 눈을 고정 시키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자족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