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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시험 (창 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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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시험 (창 22:1-24)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습니다(1). 히브리어 ‘나사’(hs;n:)는 잘못에 빠지도록 유혹하다(tempt)는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의 질을 고난을 통해서 시련하다(test)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야고보서 1:13절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유혹해서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시련(test)하시려고 시도(try)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련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약 1:12). 하나님께서 단련하신 후에 정금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욥 23:10). 하지만 재련 과정의 혹독한 고통과 아픔을 인내해야만 정금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앞에 주어진 시험(test)은 참으로 시험(tempt)에 빠질 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란 동물을 잡아서 칼로 나눈 후에 불로 완전히 태우는 제사를 뜻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잡아 죽여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나중에 아브라함을 말리신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12). 그러한 방식의 제사는 전혀 하나님의 성품과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을 하신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출제자의 의도를 로마서 12: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신약 시대의 성도는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을 잡아 죽여서 불에 태우는 방식을 연상하지는 않습니다. 온 생애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로 생각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온전히 헌신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시대에서는 신약의 성도처럼 생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롬 12:1절의 ‘산제사’를 보고도 곧바로 번제를 연상했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식 상태를 아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테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약속의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깨닫고 장성해야 할 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짐을 꾸린 후에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출발했습니다(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지체 없이 순종하려는 경외심이 잘 드러나 보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는 약 100km 정도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이삭과 동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4). 그 삼일은 온 몸이 불타는 것 같은 외롭고도 처절한 갈등과 고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7-8).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답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하려는 경외심과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서 단을 쌓았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고,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9-10).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부르며 막았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11-12)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외하는 마음만큼은 온전히 받아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마음속에만 감추어져 있지 않고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겉으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도록 행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소돔을 심판하려 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생명 존중의 성품 등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했겠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번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진 못하고, 그 시대 풍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이삭을 잡아서 불태워 드리는 그 방식 자체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경우가 이 시대에도 종종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겠다는 자세는 대단히 훌륭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고난과 아픔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자세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기업을 이을 자로 약속한 자이므로 죽어도 살 것이다’라고 믿었던 그 믿음 자체 역시 성경이 칭찬하고 있습니다(히 11:19).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한’ 그 해석 자체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일 때 생깁니다. 미성숙한 신앙인 중에서 종종 기도 중에 무슨 음성을 들었다든지 무엇을 보았든지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맹신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충성심은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 자체는 ‘그만하면 되었다. 네 마음 알겠다’하고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막아주심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자기 해석과 자기 방식을 계속 고집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기도 수치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이러한 미숙함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스스로 시험에 빠집니다. 충성심으로 일을 벌였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당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는 마음이 앞서서 하나님께서 결코 원치 않으시는 제사를 드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좀 더 성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각종 방송과 언론매체가 기독교인이 질타를 당합니다. 저는 이것이 좀 더 성숙하게 생각하도록 적절히 막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 생각됩니다. 동시에 우리의 충성심을 아시기에 막아주시는 사랑의 손길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일방적인 비난이나 일방적인 두둔을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성경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정금같이 연단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좀 더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참된 제사라는 것이 이방인들처럼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그러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헌신’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중요한 덕성입니다. 드림 자체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드림이 훨씬 중요합니다. 충성의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이 바른 깨달음 위에서 행해지는 일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하나님께서는 미처 제사가 시행되기도 전에 이미 다 받을 것을 받으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제사는 제사 그 자체 이전에 제사 드리는 사람의 태도임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서 두 번째 가르쳐 주신 바는 ‘자식관’입니다. 모든 부모에게 있어서 자기 자식은 유달리 총명해 보이고 유달리 예뻐 보입니다. 이삭도 아브라함에게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실 만큼  이삭은 아브라함의 미래이며 꿈이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지나치다보면 하나님 뜻을 고려치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고려치 못한 채 부모의 소망을 생각하기 쉽고, 하나님의 뜻은 고려치 못한 채 부모의 뜻대로 살아주기를 바라기 쉽습니다. 자식에 대한 이 모든 인간적인 기대들은 다 불살라져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자신의 자식을 온전히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자식에게 두고 있는 ‘나의’ 소망과 꿈과 기대를 모두 드림으로써,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과 뜻이 성취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혈육의 관계보다 언약을 중심으로 한 관계를 우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흔히 하나님께 충분히 드리지 못한 헌신에 대한 아쉬움에 자녀를 잘 키워서 배나 더 헌신케 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성심은 가상하나 옳지는 않은 생각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다르고, 자녀에게 두신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충성과 헌신을 자식으로 대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은 대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마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희생시킬 뻔 했습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죽어도 살리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무지막지하게 강요한 셈입니다. 자식을 부모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시대의 방식이었고, 아브라함의 자식관 역시 그 시대 풍속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은 겪은 아브라함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생각이 짧았는지를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제야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한 수양”을 발견하였고 “그 수양을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13). 그리고 그 땅 이름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의미의 “여호와 이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행하여” “독자”를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시기로 확정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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