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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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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또한 감사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믿음의 선조들이 생각납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가을이 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수확이 있을 때에만 감사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둔 것이 별로 없는 흉년에도 그들은 어김없이 감사드렸습니다. 어떻게 거둔 것이 없는데 감사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거둔 것이 없을지라도 또 다른 것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감사하는 모습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성경이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우리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병환자 열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멀리 서서 다만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시 말해서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고침을 받기 전이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다가 도중에 깨끗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 열 명이 모두 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섭섭하셨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과연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성경에 뚜렷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했습니다.

  병이 정말로 나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의원에게 가서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병이 나았다고 하지만 다시 재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기다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며칠 더 기다려 보고 예수님께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는 예수님께 가서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예수님께 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을 받는 것이 더 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해 주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들이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딱 한 가지 일밖에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일이 아니라 한 마디 말이었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상처를 만져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을 주신 것도, 돈을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안수 기도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해 주신 것이 없는데 뭘 감사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에게 먼저 달려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나병환자의 흉한 모습이 아니라 건강해진 모습을 가족들에게 얼마나 보여 주고 싶었겠습니까?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을 것 같으면 분명히 앞에서 추측해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변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명과 더불어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여간 그들은 감사할 줄 몰랐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이 감사했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감사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값비싼 예물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특별히 예의를 갖출 것도 없습니다. 먼저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복잡하게 많이 하면 감사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도 생각을 복잡하게 했으면 감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먼저 그의 과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비록 지금은 병이 나았지만 그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좋은 시절을 다 나병환자로 지냈습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도 잃었을 것입니다. 공부도 못했을 것이고 일자리도 잃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병이 나았다고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감사합니까?

  또 미래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병은 나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삽니까? 누가 그와 결혼하겠습니까? 혹시 결혼할지라도 그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는 물론 나병환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에게 직장이 있습니까? 어떻게 일할 수 있습니까? 비록 병은 나았지만 그는 또 다시 거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정말 암담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감사합니까?

  그러나 그는 불행한 과거를 생각하며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탄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 한 가지를 생각하며 그는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 다만 그는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감사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감사는 우선 순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순위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 생활은 무엇보다 우선 순위를 잘 정해야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엘리 제사장이 실패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2장 29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찌게 하느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은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배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 순위를 잘못 정했기 때문에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은 망했던 것입니다.

  고침을 받고 감사하러 온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 17:17~18)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고치게 되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최우선적으로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옛날 다윗은 다윗성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기고 나서 가장 먼저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역대상 16장 7절, 8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감사했습니다. 병을 고침 받은 그 아홉이 실패한 것은 먼저 감사하지 않았고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감사해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즉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 덕분에 오늘 우리는 참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에디슨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했다.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잡음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얻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불행이 닥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병든 것도 문제가 아니고 가난한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이 오히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지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항상 감사드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복으로 만족하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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