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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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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눅 15:3-7)

  거인 골리앗을 평가하면서 다윗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골리앗의 기술, 나이, 사회적인 지위, 지능지수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창이 얼마나 무거운지, 방패가 얼마나 큰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의 힘 따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척 주의를 기울입니다. 다윗의 말을 생각해 봅시다.
  ①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삼상17:26).
  ②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삼상17:36).
  ③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삼상17:45).
  ④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삼상17:46).
  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모두 아홉 번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골리앗에 대한 상념보다 9대 2로 압도적입니다. 여러분의 비율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저지른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네 배쯤 더 생각합니까? 불평거리보다 감사해야 할 은총 목록이 네 배 정도 더 깁니까? 두려움 덩어리보다 소망 보따리가 네 배 이상 더 큽니까?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아뢰는 이야기보다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고백이 네 배쯤 길게 이어집니까? 아니라면, 다윗의 본을 받읍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삶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홍해가 갈라지지도 않고, 불 병거가 내려오지도 않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 돌아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적은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험한 길을 걷던 이들이 주님이 세워 놓은 진리의 광고탑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며 놀라곤 합니다.

  거인 골리앗에게 초점을 맞추면→실족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거인이 자빠진다
  눈을 들어 무시무시한 거인을 똑똑히 쳐다봅시다. 다윗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 골리앗이 버티고 있습니다. 소리 지르고 위협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피곤하고 두렵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골리앗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골리앗보다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행복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아멘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골리앗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하여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깨달읍시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양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주된 재산이요 생계 수단이며 종교의식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특히 양은 희생 제사와 그 제물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동물인데 해마다 막대한 수의 양들이 쓰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양의 특색은 ①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요10:2-5) ②순하고 복종한다(사53:7) ③사자와 이리, 뱀, 시랑과 곰 같은 원수 앞에서 떤다(렘11:9) ④웅덩이에 빠지기 쉽다(마12:11) ⑤목자가 무관심하면 고통을 당한다(겔34:5-8)

  본문에서 초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백 마리의 양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입니다.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부분 남북을 잇는 중앙고원 지대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지는 해발 평균이 500m나 되기 때문에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쉽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서너 명이 한 조가 되어 양떼를 보호했습니다. 이들은 저녁이 되어 양떼를 우리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어 보았는데 만일 단 한 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아다녔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는 복음의 진리를 스스로 거부한 자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고의, 악의로 양떼를 떠나 사악한 길로 떠난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지하며 미련하여 양떼들과 함께 올바른 목자를 따라가지 못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잃어버린 양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스티븐 룽구라는 아프리카 흑인 선교사님이 쓴 『예수를 업고 가는 아프리카 당나귀』(홍성사 역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백인들이 사는 집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린 음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백인 선교사 부인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최고로 출세한 셈입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해보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살던 움막에 비하면 전부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왜 청소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갔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쫓겨났습니다. 청소는커녕 더러운 발로 밟아서 바닥만 더럽혔던 것입니다. 기준의 차이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 빈민촌에 사는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는 먼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부인의 기준으로 볼 때는 먼지투성인데 아이가 청소를 하나도 안 하고 간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은 내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카메라를 하나님께 고정시킬 때, 하나님에 의해서 청결하게 되고 청결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자는 매 순간순간 하나님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복됩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잠잘 때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늘 으레 뛰겠거니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침에 깼을 때 자기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밤마다 자기 심장을 뛰게 해 주신 것을 깨닫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곤히 자고 있는 그 때도 주님이 그 심장을 뛰게 해 주시고 계셨음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삶이 달라집니다. 그 하나님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잃으면’이라는 말씀이 누구를 의미합니까?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은 말씀과 구원과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혹시 세상 어디론가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가족이나 이웃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일백 마리 양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지런해야 하고 백 마리의 양을 한 마리씩 알아야 합니다. 어느 양을 잃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남의 양떼 가운데 섞여 있어도 찾아내어야 합니다.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깨닫게 됩니다.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잃어버린 한 마리 바로 그 양을 깨닫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찾읍시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몇 번, 대충 찾다가 포기하지 않습니다. 목숨과 생명을 걸고 찾는 것입니다. 그래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잃은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사람의 개종자(convert)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열심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들의 종파를 열렬히 신봉할 지지자를 얻기 위함입니다. 회원을 늘려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예수께서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숫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생명의 절대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지만(사53:6)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는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1600년대에 화가 카라즈호바가 그린 <성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제목의 성화(聖畵)가 있습니다. 마태는 본래 세리였습니다. 유대 세관에 세리들이 주욱 앉아 있는데, 예수님이 가셔서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 바로 곁에는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즈호바가 그린 베드로의  몰골이 아주 형편없습니다. 베드로의 옷매무새를 보면 그 가난한 달동네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수 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몰골도 초라한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는데, 그 세관에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 중 누구도 예수님을 거들떠도 안 봅니다. 자기 일만 합니다. 그런데 마태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오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하나님께서 마태 한 사람만 찾아가서 귓속말로 “너 따라올래?” 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따라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4절 말씀에서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 것이 아니라 삼촌을 좇아갔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귀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은 신체의 일부인 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한 개인만 불러 놓고 “내가 너를 복의 근원 시켜 줄 테니 따라와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도 분명히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만이 그 말씀을 듣는 복된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복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나의 삶으로 듣는 하나님의 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바뀌고, 우리로 인해서 세상이 바뀝니다.

  누군가를 듣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짜를 가지고 진짜처럼 사기 치는 세상인데 왜 진짜 복음과 예수를 가지고 가짜처럼 도피하고 기죽어 삽니까?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전합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있는 그 곳으로 가야 합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서 고기가 있는 강이나 바다로 가야하듯 우리는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만나고 전해야 합니다. 입을 열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찾도록 찾아’ 귀한 생명을 꼭 구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기뻐합시다
  본문 5-7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즐거워’의 헬라어 ‘카이로’는 만족으로 인한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노래라도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흥분이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은 죄인 하나가 참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와 같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미미한 존재인 인생들을 하나님이 이렇듯 깊은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받은 성도의 존귀와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스바냐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로 나아간 양이라고 하더라도 ‘찾은 양’은 목자에게 크나큰 기쁨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깃발과도 같이 온 동네에 내보이고 싶은 자랑거리입니다. 복음 전도자의 열심과 수고로 얻게 된 성도들이 그 사역자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됩니다. 목자는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하였습니다. 향연을 베풂으로 개인의 기쁨은 공동체적인 기쁨이 되고 걱정했던 이웃들의 노고에 보답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됩니다. 총동원 전도주일 ‘나눔의 날’을 위하여 생각, 기도, 전도, 모든 봉사가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이나 사람이 볼 때 지극히 작게 보아도 하나님은 크게 보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더욱 전도해야 합니다. ‘한 생명’을 전도하느냐 못 하느냐는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두가 생명과 구원의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 떼를 돌보고 보호하며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 자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의기소침하고 생기 없게 하루를 보내는 자신을 발견할 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배후에 사탄이 교활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침체와 건조함의 구유’에 사로 잡혀 있는 신앙인들을 공격하는 사탄의 전략에 대해 말합니다. 사탄은 작은 악마 윔우드와 나눈 대화에서 그의 전술을 묘사합니다.

  “구유에 있는 인간들은 감각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지. … 그 사람의 내부 세계가 재미없고 춥고 비어 있을 때, 우리 공격이 성공할 기회는 많아진단 말이야.”

  악랄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로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는 것은, 사탄의 어두운 병기고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계교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와 사탄, 그리고 모든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 갈보리에서 죄악을 이기신 주님을 찬양할 때, 그것은 사탄에게 주님이 피 흘려 승리하신 사실을 상기시키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일은 효과적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기 위해 도전하고 또 도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견고한 방패 막 안에 서 있는 한 우리 기쁨을 앗아가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반드시 사탄은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깨닫고 찾고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전도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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