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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도 정치 아니하고 (행 2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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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도 정치 아니하고 (행 22:22~30)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중요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경영자도 필요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노동자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맛 감별사라고 합니다. 당도는 얼마로 하고 유지방은 얼마나 들어가야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아이스크림이 될까를 항상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이스크림을 10여개 이상을 먹어봐야 한답니다.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도 매일같이 그 배합 비율이 맞았는지 먼저 그 사람이 맛을 보고 오케이 해야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니 맛만 봐도 이게 어느 회사의 어느 제품이고 거기에 유지방 몇 프로 당도는 몇 프로라고 다 맞출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면서 살만한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서 날마다 아이스크림 맛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나가 다 맛있다고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배합을 따라 맛을 보고 이것이 좋겠다고 해서 만들어낸 제품들이 지금까지 100여개가 되는데 그 중 히트를 친 것이 약 5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50개는 그 맛의 대가가 이런 맛이라면 크게 잘 팔리겠다고 해서 만들어낸 제품이긴 해도 소비자들이 이건 아니다 하고 사먹지를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하지 않게 된 제품들이라는 것입니다.

내 입장 다르고 네 입장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같은 것을 가지고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다 달리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좋다고 할 수 있기가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요 또한 모두가 다 좋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도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주 기독교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살아온 배경이라든가 그 사람의 생각에 따라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평가는 다 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끌려나와 몰매를 맞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출동한 로마 천부장과 군대에 의해서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그 군대는 바울은 큼 범법자인줄로만 알고 체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끌려가던 바울이 이들에게 말 좀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느냐고 하여 허락을 받아 자기를 폭행하던 유대인들에게 자기 입장을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유대인들과 천부장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먼저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자기를 폭행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자기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됐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든 중에 자기를 부르셨던 주님이 다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가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하셨다고 까지 말했을 때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다가 목소리를 높여 “이런 놈은 없애 버려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소리 질러 댑니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공중에 먼지를 날립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부하들에게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이 자기들의 믿는 바와는 다르다고 하는 데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바울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한참 바울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은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의 다른 점에 대해서 자기들의 입장을 또한 바울에게 전달해서 그 다른 것이 왜 그런지를 알아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바울이 잘못되었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울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런 놈은 없애버려야 한다”고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울이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바울이 틀렸다고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어야 하고 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또 들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끝까지 바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그리고 나서 다시 판단하자고 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믿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바울이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은 아예 바울의 입을 막아버리고 그저 저런 놈은 죽여 버려야 한다고 마구잡이로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난리를 치는 유대인들이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물론 유대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자기들이 옳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들만 옳고 바울은 틀렸다 따라서 그런 말을 전하는 바울은 죽여 버려야 한다는 이들의 외침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합시다. 그럴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저 사람의 말이 옳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있다고 해도 그건 특별한 경우로 내가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거나 그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때는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을 때는 내 생각과 다른 말을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몸에 좋다는 음식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아주 거부반응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아주 호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있다고 한다면 한쪽에서는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걸 먹을 수가 있느냐 할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그것도 못 먹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은 것입니까? 물론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하지만 둘 다 옳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결국은 당신 말도 옳다고 하면서 인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던가요?

대화의 가장 우선하는 법칙이 있다면 끝까지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도 긍정해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을 자기만 옳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정말로 자기 생각이 조금도 틀림없다고 하는 강한 확신의 경우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틀린 것을 알지만 상대방에게 지기 싫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다 보니 오히려 자기주장에 스스로 빠져들어서 나중에는 그것이 틀린 것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내가 보고 알고 있는 것만이 바른 것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쪽만 말할 경우는 사실상 틀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그 모두가 옳을 수도 있고 그 모두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자세히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기 까지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나 믿음에 관해서는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관해서도 나는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지만 상대방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씀을 근거로 해서 확인하여 말씀에 있는 경우라면 말씀대로 인정하면 되고 말씀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아직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오직 모든 일을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하도록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은 분별해야 하지만 거기에서 더하여 상대방이 틀렸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입장은 다르지만 상대방도 옳을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상대방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말도 존중해주는 그런 태도를 항상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차분히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과거의 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만 해도 과거에는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섰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로 예수님을 앞서서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래 예전에 그러더니 아직도 그렇구먼” 한다면 거기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과거의 상대방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칫 지난날의 모습이 보인다고 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감싸주고 이끌어주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서로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하나 되고 화합함으로 서로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천부장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없애버리라고 소리를 쳐대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자 당황한 천부장은 부하들에게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그렇게 소리 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바울을 때리면서 조사해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바울을 묶고 때리려 하자, 바울이 옆에 서 있던 로마 백부장에게 말합니다. “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도 않은 로마 시민을 때리는 것이 로마법에 맞는 일입니까?” 그 말을 들은 백부장은 깜짝 놀라서 천부장에게 가서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입니다”라고 알립니다.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부장은 정말 큰일입니다. 로마 시민은 어떤 경우에라도 당시 로마법에서는 재판 없이 체포할 수도 함부로 때릴 수도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재판 없이 함부로 처벌했다가는 그 처벌한 사람은 당장 파직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 백부장이 전하는 말을 듣고 천부장은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 천부장이 바울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당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이 참말이오?” 바울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얻었소.” 바울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가 돈을 벌게 된 사람들이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어서 지금 천부장이 바로 그렇게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하니 천부장은 자칫 목숨이 날아갈 판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얻은 로마 시민권이고 어떻게 해서 천부장까지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 천부장은 이튿날, 유대인들이 무슨 일 때문에 바울을 고소하는지 알아보고자 해서 대제사장들과 유대 공의회를 소집하게 하고는 바울을 묶은 사슬을 풀어 주고 그를 데리고 나가 공의회 앞에 세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물론 날 때부터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그가 깨달아 자기 입술로 예수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기까지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모가 키울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은 그를 키우는 부모를 보아서도 그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먼저 인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아이의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합당한 자리에까지 나아와 있는지 확인을 하고 아직 그런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아이가 바른 믿음에 서도록 우리가 이끌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철부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런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있겠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까지 우리가 올라가 서 있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주님은 네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다른 성도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눈에 비치는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판단할 때가 대부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겉모습만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오기까지는 이 두 사람은 거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보기에 합당한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보니까 오히려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쳐 버린 그런 때에 그들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도록 내어달라고 빌라도를 찾아가 요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보니 과연 누가 진짜입니까? 지금까지는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진짜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때에 오히려 드러난 모습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내가 보아온 모습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만 상대방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저 사람은 아니다 싶으면 아무리 그 사람이 잘 해도 “언제까지 그렇게 잘 하나 보자” 하고 지켜보다가 또 다시 어떤 실수를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비쳐진다 싶으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이 그렇지 뭐 그 사람이 문제야” 하고 결론을 내리지를 않았던 가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는 죄 있다 하지 말라고 했고 심지어는 살인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우선 도피성으로 피한 다음 그곳의 장로들의 판결에 따라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것인지 실수로 살인을 한 것인지를 확정하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처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실 때 십자가에 함께 달렸던 강도 중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고백하는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한들 우리가 품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으며 과거에 반복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그 사람은 언제 또 그럴지 모른다고 하면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던가요? 기억할 것은 우리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고 해도 주님이 은혜로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기나 치고 자기 살길만 찾았던 야곱이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전혀 도움은 되지 않고 폐만 끼치는 그런 사람들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 사람을 붙잡게 되면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전혀 죄를 짓지도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조금씩 변화가 되고 이윽고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바울이 아니겠습니까? 성질 급한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라고 변명까지 지어줬었던 요한 사도가 나중에 귀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처럼 단 시간에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역시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년간 기도생활을 통해서 변화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가 이렇게 귀한 일꾼으로 바뀌기 까지 곁에서 저를 도왔던 아나니아와 바나바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무지 쓸모가 없고 짐만 되었던 마가가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요 베드로의 수제자로서 그리고 최초의 복음서 기록자로서 새롭게 태어난 것도 바나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아나니아와 바나바처럼 이런 소망을 가지고 전혀 쓸모없는 사람,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 도무지 사람 될 것 같지 않은 사람, 차라리 없는 것이 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돕고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죄인을 끝까지 참으셨다고 했고 십자가 위에서도 자기를 못 박고 비웃어 대는 그 사람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런 도움의 사람 그런 용서의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다시는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을 만들고 외면해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지금까지 참고 지켜보시며 끝까지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마음 속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를 세워주고 붙들어주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 3절 이하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서는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냅니다.”라고 대 서사시를 마무리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내는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믿어 주는 그것이 곧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몹쓸 죄인을 감싸 안아주는 그것이 곧 주님을 감싸 안는 것입니다. 앞으로 변화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감싸 안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 감싸 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찬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의인만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런 사랑의 사람으로서, 사람을 새롭게 빚어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로서, 바나바처럼 아나니아처럼 그렇게 몹쓸 사람도 감싸 안아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나가는 사랑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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