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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해피데이, 준비되셨습니까?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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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데이, 준비되셨습니까? (막 2:1-12)

여러분은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가기 직전에, 프랑스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것이 그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그때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오늘이 있기까지 온통 빚지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이 빚을 갚는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얼마나 실감나는 고백입니까?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가 호흡하며 이 자리에 앉아 있기까지, 우리의 부모, 우리의 스승,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이름없는 수많은 이웃들의 헌신과 땀흘림이 없었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나를 위해 내어 주신 그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 은혜를 감사하며 “나는 빚진 자라”라고 고백했고,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빚을 갚기 위해서 네 명의 사람이 한 생명을 위하여 펼치고 있는 사랑의 드라마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도울 수 있을까요?

1.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병을 앓고 누워 있던 네 명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께로 데려오기만 하면 “예수님이 그를 도우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생명, 그의 구원, 그의 소망이 되어 주실 것이다”라고 믿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웃들을 도우면서 산다고 하지만 도와봤자 얼마나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때때로 우리의 한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모자람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실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이웃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한 생각의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와야 할 그 사람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간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의 사랑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를 도울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라면 “그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가 있다. 주님은 그의 구원, 그의 생명, 그의 소망, 그의 진정한 능력이 될 것이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네 사람은 자기들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돕기 위해 이렇게 믿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2.그리고 중요한 것은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네 사람이 그들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라면 내 친구를 도와 줄 수가 있다. 내 친구는 다시 새로운 미래를 가질 수가 있다. 다시 일어날 수가 있다”라고 믿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게 되면, 거절하는 우리들의 가장 보편적인 핑계나 구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돕고 싶어도 나는 도울 것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핑계입니다.
우리에게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에 우리에게 돕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 도울 길을 반드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풍병을 앓고 있는 네 명의 친구는 사랑하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고자 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이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갈 길이 차단되어 나갈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기했습니까?
그들은 돕기를 원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그 네 친구는 주님 앞으로 직접 갈 수가 없었기에, 서로 의논하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이 계신 그 앞으로 달아 내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창의적인 행동이요, 창조적인 행동입니까?

물론 열대지방에 속하는 그 나라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지붕처럼 그렇게 견고한 지붕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것은 모험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때 방안에 있었던 예수님을 위시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마땅히 무례하다고 비난받아야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 친구를 살려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이 한 사람의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이 무모한 행동을 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고, 행함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사랑하는 이웃을 도울 수가 있을까요?.
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물론 이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병자가 기대하던 말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기대한 말은 아마 “네 병이 나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선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서 육신의 병고침 보다도, 더 중요한 그의 근본적 필요를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바로 죄사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죄사함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라고 믿으십니까?
우리 인간의 불행, 인간의 허무, 인간의 방황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딜레마,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성공하고도 마지막은 실패입니다. 파산입니다. 파멸입니다. 절망입니다. 심판입니다.
따라서 죄 문제 해결처럼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근본문제를 먼저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아니, 저 사람이 누군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흥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기관들의 흥분은 타당한 것이요, 이유 있는 흥분입니다.
물론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가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지 못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 대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에 보배로운 피를 떨구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의 피 흘림으로 나와 여러분이 용서받은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근본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들을 도울 때, 이웃들에게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이 근본적인 일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영적 도움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적 도움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일어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주님께서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12절에 보면 일어났습니까? 못 일어났습니까?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상을 가지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거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필요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사역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죄사함받고 구원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적 필요(건강, 물질, 명예, 부요, 형통, 문제해결, 등) 또한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교회가 새생명축제 “해피데이 1028”을 다음 주에 갖습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통해 미소짓는 참으로 행복한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나를 통해 새생명이 탄생하는 참으로 행복한 날입니다.
이 귀한 사역에 자원하여 기쁨으로 여러분 모두가 저와 함께 동역할 때, 우리 교회는 이 땅의 역사에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앞장서서 이 일에 헌신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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