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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은 그 다음이었다 (삼상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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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 다음이었다 (삼상 2:1~10)

이번 남북정상회담 때, 서로 주고받은 선물들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너무 과하면 부담이 되고, 그렇다고 격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줍니다. 그래서 적절한 선물을 고르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한나가 아들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한나는 고민을 합니다. 고심 끝에 그녀는 자신이 받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어어집니다. 그녀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삼삼2:1) 그리고 이렇게 끝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2:10) 한나가 이 기도를 언제 드렸을까요?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아니면 직후에 이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5절) 말씀이 걸립니다. 여기에서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분명히 한나를 가리킵니다. 그런 그가 사무엘 외에 여섯을 더 낳았다고 했으니, 이 기도는 어린 사무엘을 드린 직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드렸을까요?

한나의 기도는 어떤 한 순간, 한 시점에 드린 기도라기보다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그가 아이를 잉태하고, 잉태한 아이를 낳아 젖을 먹이고, 젖 뗀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후에 세월이 흘러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 셋을 낳고, 딸 둘을 낳는 그의 생애 전 과정에서 드린 기도를 엑기스만 모아 성경저자가 소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기도의 대부분은 그가 아이를 낳은 직후에 드린 기도임에 틀림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후 11절에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나의 기도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긴 한나의 기도에서 자기가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평범한 아들이 아닙니다.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생명과 같은 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물로 받은 아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삼상2: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야 정상이 아닐까요?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아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아들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아들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그런데 아들 대신에 여호와, 주님이란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분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주신 아들 사무엘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분이 나의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한나에게 있어서 아들은 그 다음이었다. 아들이 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은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나에게 있어서 아들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 누구 다음이었다는 말인가요? 여호와 하나님 다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요, 즐거움이었습니다. 한나는 이 하나님을 아들을 낳지 못해서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만난 한나의 마음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그 귀한 아이를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 이었습니다.

한나는 지금 선물자체보다 선물을 주신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고 선물을 보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선물만 좋아한다면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이 주신 선물보다 그분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아들은 그 다음'인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사랑하는 아들이 달렸습니다. 그 아들이 외치며 절규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침묵하시면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그 다음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우리 또한 '아들은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여기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나의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가 그렇게도 원하던 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분이 언제나 아들보다 먼저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또 믿고 경배하게 된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은 지금 무엇입니까? 부귀영화, 건강, 장수, 자녀입니까?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자랑을 넘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던 한나는 아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들은 언제나 그 다음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누리고 있으며, 무엇을 가지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언제나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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