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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어떤 곳인가?(15) :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어머니 교회 (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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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떤 곳인가?(15) :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어머니 교회 (행 15:1-21)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출산하자 마자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것도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머니 뱃속으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호소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가 출생하자마자 꼭 안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요나도 그랬고 사울도 그랬고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고향 중심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적인데,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사고의 변화를 두려워하며 거부합니다. 특히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 영역을 너머 서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에게로 다가가서 저들을 용납하거나 저들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며 그것을 터부시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은 물론 구약은 본래부터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고향 중심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적인 사고를 거부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을 품고(창12:3)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사49:,행1:8) 세계 보편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55:8)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민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받아드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세계 보편주의적 생각과 계획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면서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1-3).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히브리 전통과 바리새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던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지시에 반항했습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행10:13,14).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사울이 소 아시아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여전히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행15:1).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5).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현상은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와 미국의 보수주의 교회 안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어머니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하나님께서 바꾸어놓으셨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지향했던 모토 중의 하나는 “semper reformata” 즉 “항상 개혁”이었는데 우리도 “항상 개혁”을 시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에 로마서 12장 2절에서 “오직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분부했습니다. 현재진행 명령형입니다. 과거에 한번 변화를 받은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항상 계속해서 변화를 경험하여야 한다고 분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5장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을 본문으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어머니 교회”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런 제목으로 설교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일 안디옥 교회에 대한 설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성도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여러분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면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부터 선교 역사의 새로운 장이 전개됩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새롭게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5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 드리면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다 함께 모여서 베드로의 간증과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다 듣고 나서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괴롭히면서 저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머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고의 화가 일어났습니까?

첫째, 베드로의 간증으로부터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7-11).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간증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처음에는 가이사랴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행10:19,20). 베드로는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이방의 땅 가이사랴에 가게 되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성령께서 강림하시므로 베드로는 고넬료와 거기 모였던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오래 전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셨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고 믿음으로 저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그래서 저희나 우리를 분간하지 않으셨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방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믿음과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도들과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이 베드로의 간증과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고의 변화가 자기들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먼저 사도 베드로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요나단 에드워즈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알버트 슈바이쳐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나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던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깨트리기 위해서 먼저 사도 베드로의 사고와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따라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고와 행동을 깨트리신 것을 고백하며 간증했습니다.

둘째,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으로부터 사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행15:12). 바나바와 바울은 수리아의 안디옥과 소 아시아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간증했을 것입니다. 사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수리아의 안디옥에 갔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저들에게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했는데 큰 무리가 주께 더했습니다. 바나바는 그 사실을 보고하며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일년간 두 사람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교회가 부흥 발전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 사실을 보고하며 간증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 계속해서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지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분명하고 강하게 명령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저희를 통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친히 증거하셨다고 간증을 했을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신 일도 있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맞아 거의 죽는 경험까지 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기들을 이방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래서 이방 인들을 믿음으로 구원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도들과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이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과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저들의 닫혀진 마음과 생각을 열고 계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야고보의 제안과 선언으로 사고의 변화가 완성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15:13-21). 박윤선 목사님은 여기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였던 야고보가 베드로의 간증을 듣고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피력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라고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야고보의 말을 옳게 여기고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 편에 안디옥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달하기로 가결했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행15:22).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행15:23-29).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결정이었습니다. 질서정연한 민주적인 결정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하나님 중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라고 지적했습니다.

네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가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과 이방인 교회들을 방문하고 저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격려했습니다.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행15:30-35). 이것이 사고의 변화를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예루살렘 교회가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의 사고의 변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복음이 이방의 땅 마게도냐와 유럽을 향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향해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이것이 우리 주님의 소원과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미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복음을 “땅끝까지” “땅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교회나 미국교회가 공산권 선교나 모슬렘권 선교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산권과 모슬렘권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 교회 안에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사고가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사고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그리고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 많은 사고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반일 반북에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일 반북 반흑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저는 모슬렘을 무시하고 차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반 모슬렘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남미와 동남 아시아 산지에서 살고 있는 산족들에 대한 사고의 변화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긍휼과 사랑의 대상으로 점점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보다 진보적이고 보다 포용적인 자세로의 사고의 변화를 경험하여야 한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악의 세력을 그대로 용납하자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에 대한 긍휼과 포용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대적할 수 있겠느냐?”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방으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우리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느냐?” 한국 교회 안에는 이미 사도 베드로나 바나바와 바울의 고백과 간증과 같은 고백과 간증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들이 그와 같은 고백과 간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를 경험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어떤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북한과 공산권과 모슬렘권과 힌두권을 향한 세계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어머니 교회에서 일어난 사고의 변화가 한국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그리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합의에 따른 새로운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간증을 새롭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 이후의 역사를 한국교회가 다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과 한국교회 위에 새롭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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