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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립의 믿음 (행 8: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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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믿음 (행 8:4-13)

  ‘D-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처음 사용이 되었던 것은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때입니다. 당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지자 아이젠하워 장군은 육해공군 합동으로 프랑스 북부 해안에 대규모 상륙작전의 계획을 세웁니다. 마침내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독일군은 후퇴했고, 많은 피난민들은 독일의 남동쪽에 위치한 드레스덴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독일의 피렌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은 17세기 이후에 문화, 예술이 크게 발달한 곳이어서 유적지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드레스덴에 무차별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때부터 군사용어로서 '공격 개시 예정일' 또는 '중대사가 벌어지는 날'의 의미로 드레스덴(Dresden)의 D를 본 따 '디데이(D-Day)'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이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말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 예수축제의 디데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한 많은 영혼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이번 축제를 통해 모두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일을 앞두고, 우리는 금년 표어와 같이 성령으로 하나 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놀라운 능력이 있기에, 믿음으로 감당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은 스데반에 이어 사도행전에서 참 귀한 인물로 나타나는 빌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과연 빌립은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첫째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은 이 땅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과 교회로부터 어떻게 복음이 확산되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이 일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 발단이 되었고, 성령의 강림으로 출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준엄한 명령과 뜻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대로 마가에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권능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는 처음 120명을 시작으로 셀 수 없는 무리로 번졌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뜻은 하나씩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유대를 지나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초대예루살렘교회는 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좀처럼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고, 그 일 이후에 교회에 핍박이 오자 성도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흩어진 사람 가운데 바로 본문에 빌립이 결심을 하고 사마리아로 갑니다. 그렇게 해서 사마리아로 가라는 주님의 뜻이 빌립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같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신도의 귀한 모델로서 믿음과 봉사와 삶에 있어서 본이 되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그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소개합니다. 빌립은 바로 이 일에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찾아 그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에게서 발견되는 귀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이미 성경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우리 신앙은 승리하고, 성공할 것입니다.
로마서12장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마18:14, 딤전2:4)

  우리가 이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복음을 전해지고, 나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찾아가는 믿음입니다. 빌립의 참 귀한 믿음은 그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가 사마리아로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마음만 갖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행동하고 움직이고 찾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헌신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믿음입니다. 빌립이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흩어지면서 사마리아로 찾아간 것입니다.

  당시 빌립이 사마리아로 찾아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마리아는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공간적으로, 심적으로는 가장 먼 곳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크게 3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남쪽이 예루살렘지방, 북쪽이 갈릴리지방, 그리고 중간이 사마리아지방입니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땅인데 이런 지방은 단순한 지리적 구분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남쪽은 주로 부유하고 기득권자가 사는 곳이었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북쪽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면서 빈정거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런데 더 사이가 나쁜 지방이 바로 사마리아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쪽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우회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을까요?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내면적인 이유는 종교, 이념, 사상, 문화의 차이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리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빌립이 사마리아로 찾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그곳에, 그 사람들에게 빌립은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주님이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십자가를 통해 연결 다리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려오신 사랑,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도 이제 찾아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찾아가야 할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을 위해 내가 오늘 찾아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곳으로,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야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성령에 이끌리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통해 성경은 빌립의 삶은 한마디로 성령에 이끌린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8장 26절에 보면 빌립은 주의 사자, 즉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갑니다. 거기에서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39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역시 빌립이 성령에 이끌려 그곳을 떠난 것을 알려줍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절에서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듣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말합니다. 빌립을 통해 나타난 표적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사람에게서 보는 현상입니다. 빌립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린 사람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마리아에 내려갔고, 성령에 이끌려 복음을 전하고, 성령에 이끌려 능력을 행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주의 뜻을 이루고, 성령에 이끌려 찾아가고, 성령에 이끌려 주의 사랑을 전합니다. 빌립의 모든 삶에 성령이 중심이고, 성령이 원인이요 동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빌립의 삶이요, 믿음의 모습입니다.

  빌립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도행전의 모든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성령을 빼고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고, 성령 외에 달리 말할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성령과 함께 어떤 능력과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강조합니다. 모든 사건, 모든 일의 배후에 언제나 성령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지난주에 보았던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스데반도 성령충만한 자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모든 역사는 오직 성령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도도, 회개도, 부흥도, 예배와 섬김과 전도와 선교가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되고, 성령으로만이 큰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만일 말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만일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에 이끌려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리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열정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다가 뼈저린 실패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각으로 말하면 늘 실수합니다. 자기능력이나 경험으로 일하면 쉽게 지치고 낙심합니다.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형식에 불과하고, 단지 습관이거나 끌려가듯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불만으로 가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리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의 큰 차이를 믿음생활하면서 경험해야 합니다.

  맹천수 집사님이란 분이 쓴 ‘맹집사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쓴 내용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맹집사님은 조그만 시골교회를 다니는 분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임집사님이란 분이 중풍으로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임집사님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자 맹집사님은 매주일 주보를 갖다 주고 교회소식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맹집사님은 만약 휠체어만 있으면 평생 임집사님을 밀고 다니겠다고 다짐합니다. 맹집사님의 이런 마음을 알고 교회가 휠체어를 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맹집사님은 임집사님을 모시고 예배당에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맹집사님을 칭찬하고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흥분과 칭찬의 순간은 잠시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시골길의 비포장도로에서 그를 밀고 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저녁 비가 폭포수처럼 내렸습니다. 그날도 휠체어를 밀고 교회에 옵니다. 그날따라 임집사님이 왜 그렇게 무겁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임집사님을 살인합니다. ‘좀 빨리 죽어 버리지, 왜 죽지도 않고 사람을 이렇게 사람 고생시키나...’ 이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맹집사님은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모든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내 힘으로 해서는 안되는 구나,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이젠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일을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억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교회일, 신앙의 일, 영적인 일은 더더욱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늘 모든 일에 자발적인 헌신과 봉사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성령에 이끌리도록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결코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마지못해 하면 상처만 남고, 불평만 가득할 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오직 성령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주님의 힘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빌립의 믿음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이고, 찾아가는 믿음이며,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주간도 믿음의 길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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