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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꾸로 사는 지혜 (렘 29:10-14, 고전 12:20-26, 요 1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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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사는 지혜 (렘 29:10-14, 고전 12:20-26, 요 15:9-14)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나 몸을 구성하는 지체는 여럿이다. 몸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또 몸에 붙어있는 모든 인간을 지체로 보면 모든 인간은 여럿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몸이 제대로 아름다운 몸이 되기 위해서 다양한 지체들이 하나하나 다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기능 발휘를 못할 경우에는 기능 발휘 못하는 지체 하나 하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베풀어서 제 기능을 행사하도록 해야 지체들도 행복하고 몸이 행복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늘 듣는 얘기지만 은혜로운 말씀이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에 고린도전서 보면 만약에 지체 하나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똑같이 고통을 받습니다.

반대로 지체 하나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어느 한 부분이 고통당하면 모두가 고통스럽고 한 부분이 기쁘면 모두가 기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의 생리이고 몸을 구성하는 모든 지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이 발보고 발은 밑에 있으므로 필요가 없다, 쓸모없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부분이 다 자기 나름대로 아름다움과 영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편찮으신 분들 참 많고요 어려움을 당한 분 많은데 사실 우리가 목숨이 끊어질 때 모든 지체가 다 망가져 죽는 거 아닙니다. 어느 하나만 망가지면 모든 지체가 똑같이 망가집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는 말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좋으면 모두가 다 좋아야 되고 한쪽이 나쁘면 모두가 다 아파야 합니다. 우리 현실 아닙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면 몸에 속한 모든 지체 중에 어느 한 작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실족을 했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이론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혹시 몸을 가지신 여러분이나 저나 제가 몸에 모든 부분을 공평무사하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제 사랑하는 지체가 있고 제가 발로 짓밟는 지체가 있습니다. 제가 잘 기억은 못하겠는데 맹장 같은 것 쓸모없다고 하더니 최근 연구 결과 맹장도 중요한 기능도 한다는 보도를 읽어봤습니다.

모든 지체 중에 더 중요 하냐, 덜 중요하냐의 얘기가 아니라 각자 맡은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을 각자 맡은 대로 제대로 행사해야 몸이 건강합니다.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시면 모든 지체는 똑같이 취급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학력도 똑같아야 되고 학교도 똑같아야 되고 복지도 똑같아야 되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라에게 주어진 각자의 다양한 전혀 모습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데, 다양한 모습대로 창조를 받았는데 제 창조된 모습대로 제 모습을 최고로 기능 발휘할 수 있으면 그것이 영광이지 남들과 똑같아 지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균화라는 말 많이 합니다만 획일적 평균화가 다양한 지체가 아닙니다. 지성을 받았으면, 감성을 받았으면, 눈에 은사를 받았으면, 발에 은사를 받았으면, 받은 대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아름답고 받은 대로 그것이 모여야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지고 몸이 아름답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진실로 몸이 건강하고 싶으시면 괴로워하는 지체에게 관심을 더 쏟으십시오. 아픈 부분에 관심을 쏟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성한 몸이 중요한 것 같지만 사실 몸의 총 관심은 아프고 눌리고 짓밟힌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그런 지체에 모든 관심이 쏟아집니다.

그 지체가 제대로 돼야 전체 몸이 건강합니다. 사람은 그래서 거꾸로 살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것, 힘없는 것, 가장 힘없는 것, 가장 밟힐 수 있는 것을 밟아버리면 온몸이 다 망가집니다. 이 진실을 우리는 때로는 잊어버리고 살고 멋대로 속박하고 짓밟다가 몸 전체가 망가지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힘든 자녀하나가 실족하면 가정 전체가 실족합니다. 우리 모든 관심은 그것이 집중합니다. 나라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습니다.

근데 서로 지탱하는 힘이 뭐냐고 그러면 그냥 다양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지체 상호간에 서로 몸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이라 이름 하는 끈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끈이 그대로 붙어있으면 지체 간에 고통당하는 모두가 다 함께 고통 받고 영광 받으면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의 연대가 있습니다. 이것이 끊겨지면 지체의 형상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이런 말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하마.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나님 전체를 다 주셨듯이 나도 그대들 위해서 내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랑하마. 저는 그래서 예수가 좋습니다.

좋은 말씀해서 좋은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저를,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저와 같이 비천한 사람을 불러 일으켜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냐면 목숨을 바쳐서까지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을 베푸는 사람.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과의 상호 관계를 예수님은 친구관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친구 많으시지요.

서로 만나면 친구고 사랑을 나눠도 친구고 서로 일 같이해도 친구인데 예수님이 말한 친구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희생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을 친구라고 하십시오.

이제부터 예수님 부르실 때 우리 구세주 이렇게 너무 큰 이야기로 부르지 마시구요 마음속으로 당신은 내 친구. 예수님 말씀이 저는 예수님이 말한 친구. 오늘 친구 한번 만나보십시다. 예수님은 그냥 친구랍니다.

친구인데 아주 좋은 친구, 아주 훌륭한 친구, 진실 된 친구입니다. 제가 친구 얘기 나오면서 지난주에 있었던 얘기 잠깐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저녁에 우즈베키스탄 떠났다가 어제 밤에 왔습니다.

떠난 목적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작은 아동병원 하나를 리모델링해 주었습니다. 제가 대표를 있는 복지재단과 의료재단하고 함께 사회공동복지 모금에 합해서 한 6억 원 정도의 아동병원을 지어줬는데 리모델링이라지만 새로 지어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료 기기도 주었고. 근데 우리교회 신인령 집사님이 대표로 있는 삼성 고른 기회 장학재단에서 의과대학생들하고 보건 관계하는 학생들 30여명 국회 복지위원장 하시는 의원하고 네 기관이 합쳐서 다녀왔습니다.

근데 우선 갔는데 거기는 복지여성 담당하는 부총리가 책임을 했기 때문에 복지부장관, 차관, 지사도 다 나와서 환영했는데 우선 의료기기를 주고 건물을 새로 지어줬는데 제가 놀란 것은 그쪽 의사들이 나와서 의료기기를 만져보더라고요.

신기해가지고. 참 고마움을 느꼈고요, 부족하지만 더 도와줘야겠다, 느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사선생님 열 분이 같이 가서 봉사를 했는데 아동병원이니까 아동들 치료도 하고 또 특별히 성형외과 의사들이 가셔가지고 언청이 수술을 한 40명 고쳤는데 언청이가 왜 이렇게 많냐고 물어봤더니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산모가 잘못하면 언청이가 많이 나오는데 언청이 수술도 많이 했습니다. 한 꼽추인 언청이가 있었는데 18살 됐는데 아침부터 와서 수술해 달라고 울고 있어요. 저희들이 기계를 다 주었는데 저는 의사가 아니라서 자세한 것을 모릅니다.

단 한 가지는 꼽추의 경우 마취를 하면 심장 쪽이 좀 약해서 잘못 마취하면 병이 생길수가 있기 때문에 종합병원에서 마취를 해야 합니다. 여러 내과의과 다 찾아보니까 이 꼽추를 수술할 수가 없어서 그 꼽추아이는 서울로 데려다가 여기서 치료하기로 하고 부총리가 책임져서 보내기로 약속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 보고를 듣고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작은 나라 우리가 어쨌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먹을 것도 많고, 마실 것도 많고, 병원 시설도 좋고, 남쪽보다 네 배가 큰 이 나라에 가서 병원도 지어주고 의료기기도 주고 같이 수술도 하고 하면서 그분들이 고마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전 세계 수많은 지체 중에 우즈베키스탄 같은 나라가 아프고 병들어 있는데 우리를 시켜서 가서 고쳐주라고 도움을 주라신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돈이 한 6억쯤 들었다고 하지만 거기서는 거대한 돈 일거고 우리도 작은 돈은 아닙니다.

그리고 장학금을 주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고 한데 그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지체로서 즐기는 걸 찾아야 이 세계가 우리가 서로 살아가는데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그 나라가 어떻다기보다도 우리를 통해서 이런 일 하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합니다.

외국을 갈 때마다 좋은걸 봤다 이게 아니라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주실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또 한 토막은 저희들이 타슈켄트에서 한 다섯 시간 차로 갔더니 사마르칸트라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를 가봤습니다.

많이 가보셨을 겁니다. 금년이 2750주년 이라고 합니다. 박물관 잠깐 들렸더니 고구려 때 벽화 비슷한 것도 있고요 우리가 말하는 실크로드의 한 중심지입니다. 근데 도로가 별로 안 좋기 때문에 최고 속력도 못 내고 쉬면서 갔다 왔는데 길거리에 다니는 자동차를 보니까 열대 중에 아홉 대는 우리 대우차입니다.

작은 차종인데 그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차를 몰고 중간에 오다 좀 쉬어야겠는데 두 번다 경험했습니다만 쉴 곳이 없습니다.

그 훌륭한 실크로드를 지났는데 그래서 잠시 쉬었다가 물 같은 거 사먹고 화장실 좀 가야 되겠는데 휴게소에도 화장실은 없고요 동네 어딘가에 있다 해서 갔는데 들어는 갔는데 발을 어디다 디뎌야 할지 몰라서 상당히 고심을 하다 적당히 하고 나왔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대게 그렇습니다.

먹고 마시고 들여오고 차이는 좀 덜 있고요 내보내는데 어떻게 잘하느냐. 상수도 차이보다 하수도 차이가 선진국 후진국을 결정하듯이 내보내는 것도 잘해야 되는데 그게 너무 없어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생각이 그 나라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지만 과실 좋고 먹을 것 많고 태양도 많이 비추고 땅도 넓고 그렇긴 한데 이 내보내는 걸 잘 못하는 우리 옛날 옛적 시절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도울까 참 그랬습니다.

그 얘기는 이쯤 생략하고 다만 이런 여러 가지 보면서 저는 실크로드에 있는 한나라 그 나라가 갖고 있는 무한대의 문화와 문명역사를 자랑하면서 이걸 잘 지켜가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삶도 충족이 돼야 되는데 충족을 할 수 없는 현실의 여건. 참 어렵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문명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고 사마르칸트도 훌륭하지만 이걸 지켜내고 보고 왔다가게 할 수 있는 인프라는 너무 없어서 우리가 서로 협력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와 달리 우리는 지금 아이를 안 낳는다고 난리인데 이 나라는 평균출산율이 4명이라고 합니다. 16세 이하의 청소년이 전체인구의 40%입니다. 저희들이 사마르칸트에 가서 산과병원에 들렸는데 거기도 도와줘야 될 것 같습니다.

인큐베이터도 그냥 전시용 같고요 애들이 묵는 방도 잘 돼있지도 않고 애들을 낳고나서 탯줄 대충 처리하고 바로 엄마가 침대에 앉아서 자기애기를 끌어안고 침대에서 치료하고 쉬고 있습니다.

병들 텐데. 침상도 깨끗하지 않고 병원 방 자체가 위생적이지 않은데 그 아이를 데리고 난 순간부터 끌어안고 젖먹이고 하니 영아 사망률이 높을 수밖에요. 지금에 와서 우리는 이 나라를 보면서 자기들은 연간소득이 일인당 국민 소득이 800불 정도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는 먹고 마시는 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만 문명의 이기가 없는데요. 그런데 제가 평양을 가면서, 북쪽 가면서 느낀 것은 먹고 마실 것 없는 사람들이 우리는 평균 소득이 일인당 900불입니다. 누가 진짜인지 모르겠으나 북쪽 통계는 가짜다.

먹고 마실 것도 없는데 어떻게 소득이 높으냐. 저희들 보고 너희는 20,000불이 넘는다니까 우리보다 30배 부자라나 하는데 한국을 왔다가 의사들이 꽤 하는 말이 한국은 30배 부자가 아니라 100배 이상 부자 같더라.

여성부총리가 마지막에 하는 말입니다. 자기는 우리의 모든 고마움을 묶어서 한마디로 표현하겠는데 당신들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요. 오늘 예수님도 친구라는 말 했는데요 이 친구라는 말이 저는 그때 그렇게 고맙고 진실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겠소. 당신들 진실 된 친구입니다.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왔습니다만 진실로 친구이고 싶으면 앞으로도 친구와 친구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목숨까지 바쳐서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제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관계가 돼야 우리는 계속 친구일 수 있습니다.

그 나라나 우리나라 서로 친구이기를 원합니다. 우즈베키스탄도 잘돼야 세상이 평화롭지 우리만 계속해서 잘된다고 평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 몸에 부분에서 잘 나가는 몸도 있고 암에 걸린 부분도 있고 병든 부분도 있고 저의 모든 관심은 건강한 쪽에 있는 게 아니라 아프고 쓰리고 괴로운 것이 있어서 그곳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치료하고 나아야 제 몸 전체가 행복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거쳤지만 우리 땅에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고마운데 이 고마운 걸 어떻게 표출하면 좋습니까?

목숨을 바쳐가면서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오늘 저희들한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싶다. 사랑한다. 너희들은 뭐냐. 너희들은 내가 사랑했듯이 서로 사랑해라.

그 사랑을 나한테 도로 달라는 게 아니라 나한테 받은 사랑이 감사하면 감사한 사랑은 지극히 작은 형제자매에게 베푸는 걸로 나에 대한 사랑을 보답해다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도로 받겠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 하나님이 받고 싶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받으시는 방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은 지체, 우는 지체, 배고픈 지체, 병든 지체에게 우리가 받은 사랑의 진실 된 일부라도 묶어서 베풀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영광은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받고 싶으나 가장 작은 지체를 돕는 걸로 하나님은 영광 받고 싶으십니다. 감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드린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지만 진실 된 감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또 다른 저의 친구가 돼야 하는 지체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오늘 예레미아서를 보면요 예레미아 선지자가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사랑하는 백성여러분, 하나님의 선민 된 여러분.

바빌론에서 70년이라는 식민지 기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약속대로 그대들 해방시키겠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는데 약속의 내용은 재앙이나 저주가 아니라 번영. 행복. 나를 찾으시오 나를 진실 된 마음으로 찾으면 내가 만나주겠고. 이렇게 선포하여라. 그래서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다 채우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설교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고도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진노와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이스라엘을 심판했습니다. 축복도 많이 주셨습니다. 선민이니까요. 왜 심판했느냐. 심판 할 때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감사는 이스라엘만 선민이기에 베푸는 줄 알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은 받은 만큼 이웃을 위해서 봉사해라. 이웃에게 축복을 나눠주라고 했지 하나님께 도로 바치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고뇌와 좌절 속에 심판의 구덩이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에게 배우라는 겁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우리 사람들에게 이정도 축복을 주셨으면 항상 감사할 줄 알아라.

감사란 받은 만큼 이웃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친구라고 믿고 감사를 돌려주어라.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거꾸로 이웃을 향해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생활의 지혜랍니다.

삶의 지혜랍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고난을 오늘 족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내일의 번영은, 내일의 축복은, 내일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늘 함께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라.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과 영광을 나누어라. 나는 그런 곳에 항상 함께 있겠다. 하나님은 함께 계시되 한 지체가 고통당할 때 함께 있는 지체들 가운데 항상 있겠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모든 지체가 기뻐하는 모습 현장 속에 있겠다.

하나님은 오늘도 함께 계시겠답니다.

우리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의 계명을 그분의 사랑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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