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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으로 쓴 편지 (창세기 8:20-22, 고후 3:2-6,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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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쓴 편지 (창세기 8:20-22, 고후 3:2-6, 마 9:1-8)

오늘 창세기 말씀에 노아의 홍수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자기 곁을 떠났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벌을 주기로 결단 하십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인간적으로 고뇌하시는가. 아니 신적인 고뇌도 있나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면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말하십니다. 기분도 나빠하시고 좌절도 하시고 그리고 후회도 하십니다.

그 결과가 인간이 너무 죄를 많이 지었지 때문에 너무 한탄스러워서 인간들을 쓸어 버려야 하겠다. 그래서 홍수가 생겼다고 써있습니다. 사람이 잘못해서 인간이 홍수에 쓸려나가는 것은 이해하지만 왜 자연과 동물까지 함께 벌을 받아야 합니까?

사람 잘못 때문에 왜 천지만물이 함께 벌을 받아야 합니까? 지난주 북한의 수해 때문에 저희들이 헌금도 했습니다. 먹을 걸 주기로 하고 헌금도 했고 1차, 2차 준비 합니다. 쓰나미 해일 때도 저희들이 헌금해서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갖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게 천재지변입니까, 인재입니까. 그런데 오늘 창세기 봤더니 노아 때 일어났던 홍수는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신 홍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노와 좌절과 고통 때문에 홍수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가슴이 더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려주기로 하고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서 모든 피조물 쌍쌍만 모아다가 새롭게 만들었다고 돼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은 홍수가 지난 다음 노아가 제단을 쌓고 다시 제사 드리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가슴을 찢어놓는 일이 없겠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다시 잘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합니다. 이제는 다시 물난리를 통해서는 인간사회를 쓸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표징 하나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무지개라는 표징입니다. 무지개 얘기를 자세히 할 수는 없지만 무지개를 보면서 오늘 창세기 말씀을 다시 한 번 저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무지개는 언제 뜨느냐 하면 강렬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 덮었을 때 그리고 폭풍우가 막 밀려 왔을 때. 그걸 배경으로 하고 햇볕이 쨍쨍 쬐면 햇볕 쬐는 그 반대편에 무지개라는 게 섭니다. 무지개는 두면을 상징 합니다.

하나는 자연과 인간의 삶속에 역사 속에 진한 먹구름이 드리워 있습니다. 폭풍으로 곧 변합니다. 인간 사회와 역사의 어두운 면 심판 받아야 할 면이 배경으로 깔려있고 동시에 앞에서는 찬란한 강렬한 햇빛이 이 어두운 세계를 몰아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세계의 가운데에 줄이 있는 것이 무지개 입니다.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에게는 항상 폭풍우를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다. 먹구름을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강력히 밝은 희망찬 햇빛을 가슴에 끌어안고 삽니다.

이것이 무지개입니다. 하나님께선 무지개를 만들어 놓고 오늘 제사를 얼마나 받았는지 기록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받고 나서 하나님이 결심을 합니다.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성경 말씀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인간들이 너무나 하나님의 가슴을 찢어놓아서 상처를 너무 주어서 하나님마저도 기분이 나빠서 너무 허탈해서 이제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했습니다.

해봤더니 하나님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피조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의 방식인데 인간이 없고 나면 하나님 홀로가 됩니다. 이 점이 성경말씀이 전해주려 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과 관련이 없이 사람의 능력이나 영향과 상관없이 존재하시지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과 함께 살고 싶어 하십니다. 함께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은 제가 믿고 의지하고 투정부리고 또는 벌도 받고 칭찬도 받는 그런 하나님은 아닐 겁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저를 책망하신 하나님을 믿고 칭찬하신 하나님도 믿고 저를 버리는 하나님도 믿고 다시 끌어들이는 하나님도 믿는 것이지 전지전능하셔서 저와 상관없는 저 높은 세계 저 깊은 세계 홀로 계신 하나님은 저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쓸어버리셨지만 쓸어버린 다음에 너무나 함께 살아야 할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해서 자기 존재에 바탕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함께 사는 인간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

여러분 살아가시면서 자식들 때문에 마음 졸이신 적 많지 않으십니까? 친구들이 배신했을 때 어떻게 됐습니까? 괜히 친구 삼았다. 없었더라면 좋았을걸. 당장 바닷물에 처넣고 싶지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식들이 부모의 속을 썩일 때 차라리 부자관계 끊자. 모자관계 끊자. 그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시지요.

하나님이나 저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어버렸더니 그 다음부터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홀로 사는 부모의 심정은 더 괴로운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사회, 부족과의 관계,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간의 사이가 마찬가지 일겁니다.

아무리 미워도 관계가 단절되면 단절로 인한 공허함. 관계의 상실. 이것은 크나큰 고통이고 그것이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하는 말속에 하나님도 자기가 만든 모든 인류의 죄 때문에 멸망시키고 싶지만 시키고 나면 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은 외롭습니다.

하나님은 외로운 것 참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로움 혼자 있음은 자기의 존재 방식도 아니고 생활방식도 아니고 삶의 방식도 아니므로 비록 잘라버리고 싶은 사람이지만 다시 용서하여 새 삶을 살게 하고 나와 맺었던 관계는 부자관계, 모녀관계, 사랑의 관계는 다시 회복하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들어가는 역사는 무슨 역사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들의 하나님이고 당신들은 내 백성들이고 이걸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자연현상을 통해서든 가정의 일을 통해서든 저의 개인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서건 하나님은 함께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지개를 주셨을 때 무지개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먹구름과 같은 인간의 뒷면과 밝은 태양과 같은 인간의 내일의 희망이 무지개를 통해서 교차합니다.

무지개를 보시면 과거의 어둠과 미래의 밝음이 항상 교차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보고 살기 보다는 앞에 밝은 태양을 보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며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무지개 대신 내가 다른 상징을 주마. 비참한 인간의 죄로 물든 세계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밝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 뭔가 무지개와 같은 상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해석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 무지개가 뭡니까? 노아 때 무지개는 그 일곱 가지 색깔로 오색창연한 색을 내지만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무지개는 그 속에 빛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 피가 흘렀습니다. 그 속에서 몸은 찢겼습니다.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묶여서 죽으심으로 21세기 무지개는 무지개가 아니고 오늘 다시 십자가라 이름 하는 전혀 다른 타입의 무지개가 됐습니다. 십자가를 가운데 두시면서 십자가는 왜 십자가냐 하면 검은색 구름과 청천벽력이 있는 폭우와 이 모든 것이 항상 우리 인간역사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항상 밝은 미래 태양이 비추고 있다. 둘 사이의 세계를 가르는 분기점이 십자가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라는 무지개 오면 여러분의 죄도 사함 받습니다. 그러나 사함 받은 다음에는 반듯이 밝은 약속된 내일의 미래가 여러분에게 열립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 과거의 어둠이 보입니다만 십자가 앞에서 보면 하나님이 약속한 밝은 하나님 나라가 열립니다. 무지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십자가라는 새로운 무지개를 보고 오늘 우리가 밝은 내일의 구원을 희망하는 우리들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놓고 보면 오늘 예수께서 마태복음에 있는 대로 중풍병자 하나를 고친 이야기를 예수님은 설명을 하십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와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죄 사함 받아라.

그랬더니 유대백성들이 난리를 칩니다. 무슨 자격으로 죄를 사하였노라고 선언하느냐. 네가 누구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몸이 많이 아프면 오늘처럼 중풍 병에 걸리면 중풍 병의 원인은 죄 때문이고 죄라는 원인이 제거되면 중풍 병은 자연히 낫고.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근본 원인인 죄를 사해줌으로 인해서 병은 당연히 낫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말이 죄 사함 받으라 하는 말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죄 사함 받아라. 집에 가라. 내가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 주마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중풍 병에 걸린 사람에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사회로부터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소위 의인들이 모이는 밥상에 같이 앉지 못했습니다.

식구들이 모여서 담소 할 때도 밖에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요일 날 집에 모여서 토요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고 가족들이 모여서 억지로라도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중풍병자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부엌에 있거나 말구유간에 있거나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안식일에도 중풍병자는 밖에 있어야지 안에 들어와서 안식일 즐길 수 없습니다. 중풍병자의 고민이 뭔지 아십니까? 병을 앓고 있다는 환자의 아픔만이 아닙니다. 병 때문에 나는 완전히 관계 단절을 당했다. 중풍병자의 아픔은 이중의 아픔입니다. 위로하는 사람도 없고 병문안 오는 사람도 없고 하는 말이 너는 죄인이다.

죄진 것도 억울한데 찾아오는 이도 하나 없고 혼자 살아야 하는 이유.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 내가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하노라 그 말은 사람들이 너를 질책하고 관계를 끊어도 나는 너와 함께 구세주와 인간의 관계를 맺으마. 그 뜻입니다.

우리 보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 하는 말은 하나님이 저를 끌어안아서 다시 아들로 딸로 만드시는 그 뜻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일어나라 병도 나아라. 그리고 침상을 들고 가라. 죄 사함도 받았느니라. 그러고 나서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집으로 가라. 너를 소외 시킬 사람 아무도 없다.

가서 함께 관계를 맺고 다시 살아라.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보면서 여러분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나 이웃과의 관계나 가족과의 관계 끊어버리고 싶으시면 끊어 보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다시 이읍시다. 이을 때는 새로운 마음으로 이읍시다. 저는 1970년대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그때 제가 신문지상에 읽었던 이야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미국에 어느 군인에게 양자로 갔던 젊은이가 이 땅에 와서 양주군 어느 지역에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는 장면이었습니다.

1.4후퇴 때라고 기억이 납니다. 그때 만삭이 된 어머니가 친척집에 가다가 그만 길가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옷을 다 벗어서 아기한테 말아서 뉘어놓고 자기는 벌거벗은 채로 서성거렸습니다. 그때 군인은 울음소리가 들려 내려가서 봤더니 아기 혼자 울고 있더라. 1.4 후퇴 때 실화입니다.

이 병사 생각이 자기를 일부러 이곳에 떨어지게 했나보다.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가서 입양시키고 살게 되었는데 이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미군 아버지가 사실대로 이야기 합니다. 태어난 이야기. 이 아이가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와 양주군 어디라고 하는데 그 어머니 묻혔다는 어머니 산소를 나중에는 찾습니다.

이 아이가 20대 청년이지요. 어머니한테 하는 얘기입니다. 어머니 그때는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그 한마디 속에 어머님 저는 이렇게 살아왔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겠습니다. 어머님 그때 참 추웠지요. 어머님이 사랑으로 저를 덮어주었지요.

그 사랑을 제가 실천 하겠습니다. 뭐 이렇게 결단했다는 얘기가 신문에 나온 얘기였습니다. 글쎄 죽음으로 모든 것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사랑으로 덮인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저는 제가 믿는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비록 다 단절시키고 싶지만 우리 인간들을 십자가라 이름 하는 사랑의 옷을 입혀서 너희는 살아라. 내가 대신 죽으마 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 당신이 덮어줬던 십자가라 이름 하는 보자기는 사랑의 보자기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그 보자기를 오늘 제가 실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 회복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한테 관계 회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보고 이렇게 우리에게 선포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무지개를 보거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결단을 읽어라.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좌절하시고 끊어버리고 우리를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회복시켜서 우리를 끌어안아 주신다.

무지개 속에 담긴 하나님의 결단. 십자가를 보거든 그 속에 흘린 피만 보지 말고 찢긴 몸만 보지 말고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엄청나고 눈물나는 사랑을 좀 보아라.

보이지 않거든 읽어라. 왜? 무지개 속에 십자가 속에 쓰인 글자는 그대들이 만든 글자가 아니고 그대들이 창조한 문자가 아니고 보이지는 않지만 제가 느끼고 감지 할 수 있는 사랑의 문자 하나님의 영이라 이름 하는 문자로 썼느니라.

인간의 모든 역사 속에서 문자만 읽고 문자만 가르치는 건 사람을 죽입니다. 바울의 단도직입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문자 속에 담긴 아니 문자를 둘러싼 문자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체인 문자 속에 어린 얼, 혼, 그걸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의 얼이 말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삽니다. 병 고침을 받는 사람에게 병 고침이라 이름 하는 형상만 보지 말고 병 고침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읽을 수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관계를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 병든 자를 고치심을 안다면, 마음에 아픈 자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속에 끌어안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이지 않는 문자로, 하나님의 혼으로 하나님의 영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킨다는 걸 알면 그대들은 행복합니다.

이것이 신앙 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의 관계가 복잡합니다. 정상회담이 2차로 됐습니다.

독일 경우를 봤더니 6차 정상회담을 치르고 나서 통일이 됐습니다. 제가 6차까지 될지 8차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상회담이 됐다고 모든 것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남과 북의 관계는 쓸어버리고 싶지만 다시 변화시켜서 회개시켜서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같은 백성임을 깨닫게 하는 먼 장래의 우리의 밝은 꿈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분노도 폭발해야 됩니다. 결국 가서는 그러나 모든 것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 서로 관계를 회복해서 이 땅에 진실로 평화가 와야 합니다.

한 번의 회담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환호 하는 것도 안 되고요, 진실로 분단이라는 병 고침을 받으면, 분단이라는 침상을 걷어차고 나가서 새로운 민족, 새로운 공동체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역사의 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질곡과 기쁨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을 이제부터는 지혜롭게 좀 읽읍시다.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한반도의 무지개 그것은 또 다시 십자가라 이름 하는 무지개 일겁니다. 이 무지개를 보고 하나님은 반듯이 우리에게 이 민족의 부활을 주십니다. 하나님 이미 영으로 써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고생 좀 합시다. 그리고 분노도 있는 데로 폭발하십시다. 마지막 중심은 우리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가슴에 맞는 나라를 만듭니다. 이 사실이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가정도 그렇고 우리 사회도 그렇다는 걸 믿습니다.

무지개 빛을 놓고 이제는 장렬하게 비치는 태양을 향해서 어두운 먹구름과 폭풍을 끌어안고 태양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믿음의 눈으로 읽으시길 바랍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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