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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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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갈 6 : 6 - 10
제 목 :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신앙

외국 사람들이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빨리빨리” 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빨리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말을 몰라도, “빨리빨리”라고 하는 말은, 잘 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 같은 나라는, 느긋하기로  유명한 나라 아닙니까?  맥도날드와 같은 페스트푸드 점이, 제일 안 되기로 소문난 나라가 프랑스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 기본이 두세 시간이예요.
그래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당이라도, 우리 한국 사람이 들어오면, 자리를 내어 준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자리가 있어서 내어 준 것이 아니고, 분명 예약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어야 식사 시간이 한 시간 밖에 안 되니까, 안심하고 예약 석을 내어 준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설교 서두에 이런 말을 합니까? 
이러한 국민적 특성이, 우리의 신앙적 기질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함에 있어 빨리 하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어쩌면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빨리하면 그만큼 시간이 절약되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잖습니까? 
그러나 빨리 일을 해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빨리하면, 당장에는 편하고, 그 남은 시간으로 또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잘못되어지면, 결국에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그 일을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 절약이 아니라, 뭡니까?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런 “빨리빨리”  “대충대충”의 기질이, 우리 국민들에게, 또 우리  신앙인들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적 풍토가, 국민성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군부 독재, 공화국 정권에서 지냈습니까?  군인들의 특징이 뭐예요?  안되면, 되게 하라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안 되는 일인데, 명령이면 어떻게 해서든지 되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 군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전투적인 상황에서는 가능한 일이예요.  급박한 순간에, 이런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전투적인 상황이 아닌, 일반 경제적 상황에서는, 적용이  안 되는, 아니 결코 적용 되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듭니까?  마법이 아닌 이상, 안 되는 일은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 정신으로 밀어 붙입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빨리빨리” 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무엇이든지 상부의 지시대로 빨리빨리 하다 보니까, 기초도 제대로 되지 않는 건물이 지어지게 되고, 도로도 일년에 한 번씩 보수 공사를 해야만 되고, 모든 것이 안목이 없는 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괜히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 줄 아십니까?  괜히 IMF가 닥쳐오게 된 줄 아십니까?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서, 기초를 잘 세우고, 안목을 좀더 멀리 내다보면서  장기 계획을 세우며 추진해 나갔더라면, 우리나라는 벌써 경제 대국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도 지금쯤은, 많이 바꿨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되지 못한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정치인들의 책임입니까?  경제인들의 책임입니까?  아니지요.  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지 못하고, 우선 자신이 편하니까 그냥 침묵하고 따라갔던 결과라는 것입니다. 
세금 정상적으로 꼬박꼬박 내면서 사업하면, 망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직하면, 손해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실제로, 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이러한 관행을 따라, 그들과 같이 불법을 행하며, 이득을 취하며,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정직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잠 10 : 29절에 보세요.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질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까?
불법을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또한 정직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알지만, 그에 대한 보응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직한 자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주시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복을  취하여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빨리빨리”의 근성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눈앞에 있는 당장의 이득을 향해, 믿음과 신앙을,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이처럼 타락하고, 불법으로 혼탁한 세상이 되어진 것, 누구의 책임입니까? 
모두가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창 1 : 28절에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향한 창조명령인 것입니다.  세상의 주체가,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이 잘못되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하나님의 사람들, 곧 이 땅의 그리 스도인들의 잘못인 것이지, 결코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분명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불의와 불법이 횡횡하는 이 혼탁한 세상을 정화시키고, 변화시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과연 누가 주도해 나가야 되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또 우리 성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먼저 앞장서서 주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들이 이러한 변화의 사역에 동참하고 따라 올 것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러한 습관에 젖어서, 기본과 상식이 없는 생활을 계속해서 해 나간다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서, 기본이 충실한  가운데, 준비된 모습으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시금 눈물로 기도하며, 우리 성도들을 향해 유혹하는 세상의 관행을 과감히 거부할 수 있는, 바른 신앙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어느 세월에 이렇게 어려워진 세상을 바꾸겠느냐?  여러분,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이 혼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심으면, 제대로 자랍니다.  바르게 심으면, 바르게 자라납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이기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적 원리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 7절 하반절의 말씀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 지, 그대로 거두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야 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상식이 통할 수 있게, 삶의 전반에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하십니까?  왜 대답이 없어요?  갑자기 부담이 되십니까?  여러분, 그 부담은 거룩한 부담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질문하지요?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노력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를 말함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숨은 봉사자, 곧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은 밝아지게 되고, 세상은 살맛나게 되는, 복된 세상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우리의 영육간의 모든 부분에 해당이 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이러한 신앙을 전파하며,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이 필요하겠습니까?  분명 우리가 세상을 위해 먼저, 심어야 할 것이 있는데, 무엇을 우리가 먼저  심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바르게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신앙을, 늘 살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의 출발점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내가 잘못 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 뒤에 모든 일들이, 나로 인해  잘못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늘 자신의 신앙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한번 신앙은, 영원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신앙이 좋았다고 해서, 그 신앙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내가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노력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나를 향해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신앙적 노력을 그쳐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신앙은, 내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체되고,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자신의 신앙의 정도를 확인하질 못하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신앙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좋은 신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그렇겠습니까? 

그러면 왜 그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이 수군거립니까?  왜 신앙이 좋지 않다고,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의 신앙이 형편없다고까지, 평가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좋은 신앙이라고, 괜찮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주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 자신의 착각이라는 거지요.  물론 예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신앙이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를 못한데, 옛날의 기억에서, 옛날의 그 추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계속해서 그 환상 가운데 젖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3절에 보세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이런 신앙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 아닙니다.  결과야 그렇게 나타나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속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신앙이 좋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 남들에게 좋은 척 자랑하겠습니까?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자신이 먼저, 스스로가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을 향해, 또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신앙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를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까? 
오히려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회개했던 세리의 기도를 인정  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바리세인, 처음부터 그가 주님으로부터 책망 듣는, 그러한 신앙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순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의롭고 정직하게 신앙생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을 살피지 못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신앙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불의한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세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변질된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자랑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심어야 하는 것입니까?  왜 이런 노력을 날마다 기우려야 하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바르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날마다 바르게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자신의 신앙이 바르게 되어졌을 때, 세상 사람들이 그 신앙을 본받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표현하시며,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회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부패해 갔고, 타락해 갔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부패해져 가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을, 영적 사회적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세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르게 심고 있습니까?  예전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바르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러분의 신앙은, 바르게 심겨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로 인하여, 세상은 분명 바르게 되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숫자만큼의 영향력이 세상이 미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은, 숫자 대비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나 한 사람의 신앙이 바르게 되면, 사회 속에서는 열 사람에게, 백 사람에게, 천 사람에게,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바라기 이지선 자매는, 무려 7백만명 이상에게 신앙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이제까지 약 7백 8십만 명의 방문자가, 접속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이지선 자매를 영적 대통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십시일반이라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평범한 작은 신앙의 모습이지만,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가운데, 이러한 바른 신앙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세상에 바른 신앙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상을 완전히 정화  시켜 나가고, 변화시켜 나가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 전에, 무엇을 또한 심어야 하겠습니까?  기도를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정화되고,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신앙적 노력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것이 기도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믿습니까? 
한자 가운데에 “不汗黨(불한당)”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땀 흘리지 않는 사람들” 이란 뜻입니다.  땀 흘리지 않고, 무엇인가를 거저 얻으려고 하는 사람을, 불한당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경험하셨듯이, 세상에는 땀 흘리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땀을 흘려 심어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의를 거두고, 희락을 거두고, 화평을 거두고, 행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을 세상에 심어야 하겠습니까?
기도로 땀을 흘려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정화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명령만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먼저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 사람들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만으로 그쳐버린다면, 분명 그들은 다시금 자신의 과거의  습관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시간에, 좋은 스케줄 다 놔두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기도합니까? 왜 우리가 자신을 위해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는데,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이웃을 위해, 교회를 위해, 또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진정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력으로 미쳐지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범죄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하나님 앞에 범하지  않기 위해서, 이 시간에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그 기도가, 나의 삶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능력인 것입니다.  내 능력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설교도 그렇지요?  기도하고 준비한 설교, 기도하지 않고 준비한 설교의 능력, power가 틀리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말씀인 데도,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는 그 능력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줄 압니다.  똑같은 신앙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기도하는 성도들의 삶은, 그만큼 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지만, 기도하는 성도들의 말에 더 권세가 있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더 영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불의한 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로 심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의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불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그들을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연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그들이  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무력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두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무능력한 자가, 능력 있는 자로 변화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심령이 죽은 자를 놓고 기도하십시오.  분명 생명이 돌아오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 하나님 앞에 가장 가치 있는 이 기도를 심는 믿음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기 전에, 무엇을 또한 심어야 하겠습니까?  사랑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기독교를 일컬어 “사랑의 종교”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한 타이틀에 걸맞는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를 못합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제대로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표현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거저 주신, 값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가치 있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쓰고 남은 것, 자신이 필요 없는, 남는 것을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어떤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고 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 중에, 귀한 것을 대가 없이, 내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어떻습니까?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인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자기만 아는지, 이기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전한 복음이 제대로 힘을 받겠습니까?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있는 복음을, 우리의 냉랭함으로 오히려 반감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을, 지금도 안타깝게 제 마음 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같은 성도들 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유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그 교회에 같이 출석하는 성도님이 파출부로 있었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 같은 성도의 집에서 파출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의 집이라 좀 꺼려했지만, 서로 아는 사람끼리 있으면 더 편하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그 집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나중에 눈물을 지으며, 자신의 사정을 저에게 말을 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못살지만, 이렇게 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습니다. 
보통 파출부를 쓰면, 어느 정도 정해진 금액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교회의 아는 사람을 써서인지, 그 보다 못한 금액을 사례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몸이 좀 불편해 다른 곳에서는 잘 안 써주는데, 자신을 동정해서 쓴 것이기에, 그 돈을 다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그런 부족한 사례가 서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일자리를 준 것이 그래도 고맙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에게 도움을 준다고 그 집의 음식이나, 물건을 가끔씩 주는데, 그것이 도저히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줄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을 줘도, 쉬기 직전의 음식을 줍니다.  미역을 받았는데, 온데 곰팡이가  피어 있습니다.  물건을 줍니다.  집에 가지고 와도, 도무지 쓸데가 없어 돈을 들여 처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랑도 동정도 아닙니다.  이것은 업신여김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어찌 성도가, 그것도 같은 교회 성도들끼리, 이런 모습을 사랑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9절과 10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예수의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장에 어떤 결과를 바라기보다는, 이슬비에 옷이 젖듯이, 묵묵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나갈 때에, 우리는 분명 생명의 열매로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농사꾼들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열심히 뿌리면  열심히 뿌린 곳에서, 많이 거둘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인 바른 삶을, 세상에 좋은 씨앗으로 뿌리고, 그 위에 물이 잘 스며  들어야 하듯이, 우리의 기도로 물을 주고,  또 그리스도의 거저 주는 사랑,  그러나 겸손한 가운데 상대방을 존귀히 여기며, 그들과 함께 귀한 것을 나누는 사랑의 거름을 뿌릴 때, 시간 지나면, 우리는 아름드리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이러한 영적 농사꾼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들을, 세상에서 풍성히 거둘 수 있는, 귀한 주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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