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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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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막 7:24-30)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부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열 두 제자와 함께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갑자기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 이방 땅인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그곳의 한 집에 들어가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은 어느새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루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는데, 그 여자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는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호소를 들으시고는 냉정하게도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는, 그 여자의 청을 거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먼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을 보아서 그 여자의 청을 들어줄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이 여자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거절의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희망의 메시지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즉각적으로 대답하기를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 여자의 대응은 적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으며,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귀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만민의 구주로 오셨음을 말해 줍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메시야께서 유대인들만을 위해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을 받는 순서상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앞선다는 것은 타당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만한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오셨고, 공생애 내내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셨고, 열 두 제자가 다 유대인이었으며, 초대교회의 구성원들 역시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권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전달 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순서상의 문제일 뿐,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거나 이방인과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이방인들보다 먼저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된 것만 해도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과 달리 특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에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고 하였으며, “4)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 9:)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구원은 인간적인 조건에 의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또는 율법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량하게 살았기 때문에, 또는 지혜롭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3장 21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을 위해 오셨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 여자가 불쌍할지라도 하나님의 원칙을 사사로이 변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것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만, 순서가 다를 뿐입니다.

그 순서란, 먼저가 유대인이요 그 다음이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바로 이것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에 앞서 감람산으로 제자들을 모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주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를 표명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고 하셨습니다.

그러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같이 분부하셨습니다. “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 우리는 이 말씀을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족속, 온 천하 만민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탁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그들을 심부름꾼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귀한 특권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특권을 가졌다고 해서 거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믿음으로 구원 받는 원칙은 불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7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

귀신 들린 딸을 고침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여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마태는 그 여자를 가나안 여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당하고 추방되었던 가나안 족속의 후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 자신이 만민의 구주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종 된 자들을 풀어주시려고 오셨음을 말해 줍니다.

스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여자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쳤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본색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을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에 보면, 신통력을 가진 도깨비를 이용해서 벼락부자가 된다거나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성취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마귀의 본색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도적이라고 하시고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어머니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한 장본인이 바로 마귀입니다. 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인간들을 꾀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마귀는 거짓말로써 꾑니다. 하와에게 다가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마귀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그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의 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정체에 대하여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인류의 철천지원수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마귀를 없애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로보니게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메시야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게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눅 4:18).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3장 8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회당 뒤편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불러 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몸을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때, 회당장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화를 내면서 회중에게 말하기를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회당장은 주민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위치에 있었지만 귀신 들려 온 몸이 꼬부라진 가련한 여자에 대하여 조금치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여자를 고쳐주시자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역정을 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병들게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귀신 들려 벙어린 된 자, 소경된 자, 귀머거리 된 자, 몸이 꼬부라진 여자, 군대 귀신 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남자, 귀신 들려 간질하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 속에 들어있던 귀신을 쫓아내시자 모든 사악한 증상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 역시 그들이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4장에 이르기를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는 불신 가족과 이웃을 전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한번은 한 남자가 귀신 들려 벙어리 되고 귀먹은 아이를 데리고 주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진땀을 흘리며 고전분투하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향하여 꾸짖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하시자, 곧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그 순간,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니,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더니 온전해져서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의 역사를 멸하기 위해 늘 기도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생활은 한가로운 소풍과 같은 것이 아니고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귀의 세력을 상대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세 번째로, 본문은 믿음으로 간구하는 자가 주님의 긍휼을 받게 됨을 말해 줍니다.

주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자의 형편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흉악한 귀신에 들린 어린 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의 자손이라 칭하는 나사렛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여자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유대인들과 이웃하면서 살아온 팔레스틴 주변의 이방인들 사이에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각 색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셨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께서 지금 그 여자가 살고 있는 곳에 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드디어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계신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자녀라 하시고,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겼는데, 예수님조차 그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니, 너무나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큰 기대를 안고 찾아온 그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벽을 마주 대한 것처럼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을 법도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그렇게 말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했을 것입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그랬다면 그렇게 섭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믿고 기대했던 다윗의 자손이 여느 유대인들과 똑같은 배타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수로보니게 여자는 우리가 걱정한 것처럼 주님의 냉정한 태도에 당황하거나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는 주님의 말씀에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우러러 보면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그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여, 먼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은혜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연하고 말고요. 저는 주님의 자녀들의 몫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인 제가 어찌 그걸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자녀들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나마 주시면 만족하겠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면 내 딸이 온전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대답 속에서 예수님께 대한 한없는 신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신뢰로 인해 이 여자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신 말씀을 듣고서도 노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같이 말씀하신 것은 순전히 그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사용하신 “개들”은 들판을 배회하는 사나운 들개가 아니라 주인의 사랑을 받는 애완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났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선뜻 응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이 여자처럼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의 대답을 듣고 감동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냉정하게 대하던 태도를 온화하게 바꾸시고 다정한 음성으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믿음의 말을 하였으니 너의 소원대로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대답에 감동하셔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고,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 원하신 것은 그 여자의 믿음이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이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마을에 가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음과 결합시키는 사람은 은혜를 받지만 그 말씀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어 응답을 받지만, 믿음이 없이 하는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가 되어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수로보니게 여자는 우리에게 믿음의 소중함을 깊이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고쳐주셨던 주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한 권세와 능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 마다 수로보니게 여자와 같은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감으로 은혜롭고 위대한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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