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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임하시면 (행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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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행 1:3~9)

♣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3~9)


얼마 전에 오랜만에 대형 슈퍼마켓에 간 적이 있습니다. 물건을 많이 살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가니 살게 별로 없어서 몇 가지 들고 나오면서 줄을 섰는데 하필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기다리고 있는 긴 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적게 서있는 쪽으로 옮길까 생각하다 옮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그 줄에서 계산하고 나왔습니다. 제가 옮기지 않은 데는 며칠 전에 읽었던 ‘슬로우 시티(slow city)’ 라는 신문기사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대강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1999년, 이탈리아의 그레데인 키안티 라는 한 작은 마을이 획기적인 공동체 개조 즉 마을개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을 안에 있는 자판기를 다 없앴고, 냉동식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페스트 푸드점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백화점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할인마트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은 토속음식을 해서 먹게 되었고 버스도 잘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생활하는 등 느리게 사는 것을 실천하는 슬로우 시티를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슬로우시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주민들 반발이 엄청났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주민들은 마을이 어떻게 발전할 것이며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려고 하는가 등 이유가 많았습니다. 어떤 일이든 일을 하다보면 제대로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슬로우시티를 시작하고 해가 거듭되면서 주민들은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슬로우 시티가 이렇게 좋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여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타일과 같은 좋은 것으로 깔려고 했던 마을 한복판 광장을 그 지역 주민들 손으로 직접 구운 것, 그것도 그 마을에서 나는 흙으로 만든 벽돌로 깔았습니다. 관광객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텔이 필요한데 그 때 그들은 새 건물을 짓지 않고 대신 오래된 성과 같은 건물들을 개조했더니 훨씬 더 운치있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관광객이 늘어났고 수입이 늘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주민들 수입이 늘어났는데 슬로우 시티는 관광수입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주민들 삶의 질도 높아졌습니다. 상점들은 이전에는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닫으면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손님들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니 오후 세시가 넘어서 하나씩 문을 열기 시작하고 일주일에 이틀은 반드시 쉽니다. 슈퍼마켓이 없어졌으므로 마을 중앙 광장에 농민들이 야채와 과일을 직접 가지고 와서 파는 시장이 섰고 일상 업무의 대부분을 걸어서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료품도 대형 마트에서 잔뜩 사다가 냉동실에 쌓아두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동네 조그마한 가게에서 사다먹었습니다. 그러므로 훨씬 더 신선한 식료품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주민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또 천천히 하다 보니 일자리가 많아졌고 그 일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마을에 실업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산업화 바람으로 도시로 갔었는데 그 젊은이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자리도 많고 삶의 질도 높아졌으므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운동이 전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한 두 개 도시가 슬로우 시티를 하겠다고 지원하여 지금 심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만 열 나라의 백 개 가까운 도시가 슬로우 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했습니다. 슬로우 시티를 시작할 때 그 도시의 그레데인 카운테 시장이 한 말이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빨리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다’ 라고 말했습니다. 참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빨리 빨리’ 때문에, 서두르는 것 때문에 우리 삶이 얼마나 황폐해졌습니까? 개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저 빨리 빨리 하려고 하는데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운전을 해보면 그저 빨리 가려고 하는데 조금 빨리 도착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로 그저 빨리 집을 넓혀가려고만 하는데 너무 빨리 서두르다 보니 지금 가지고 있는 집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로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좋아졌지만 삶의 가치나 질은 오히려 더 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 ‘빨리 빨리’가 교회 신앙을 얼마나 훼손시켰는지 모릅니다.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가 비난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혀 다르지 않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사는 것, 느긋하게 사는 것, 이것은 사실 기독교의 기본철학입니다. 기독교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우리는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즐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해주시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해 주시는 것만 즐기면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삶의 철학이고 원칙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일을 다 마치고 하늘에 올라가실 때 하신 말씀도 나서지 말고 기다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므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는데 그 기간이 40일입니다. 그 40일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길을 같이 가기도 하셨고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을 때 그 곳에 함께 하기도 하셨습니다. 40일이 지나고 난 후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는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부라고 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분위기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후 사기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로 인해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예수님은 유대민족이 수천 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야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따라다녔지만 잘 믿지 못했는데 그제야 확실히 믿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나는 이제 당신의 나라 즉 하늘나라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더 신이 났겠습니까? 지금까지 제자들은 당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온전히 믿지 못하고 긴가민가 하였습니다. 요즘도 오래오래 예수를 믿고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당시는 이런 말씀에 대한 기록도 없었기 때문에 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 역시 정말 그럴까 믿지 못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께서 나이가 많은 자신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그것처럼 이들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집전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본래 흙이었으므로 몇 십년간 봉사하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시는 것이고 이제 온전히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부활하여 우리 주님과 천국에서 편안하게 지낼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데 유족들은 이 말씀으로 위로 받으려고 애를 쓰지만 제대로 다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정말로 믿기만 하면 슬픔이 곧바로 기쁨으로 바뀔 수 있고 감사와 찬송 그리고 영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부러 빨리 가겠다고 하는 것은 죄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가는 것은 영광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곳에 편안히 쉴 곳이 어디 있습니까? 돈이 있다고 평안이 있고 건강이 있다고 다 평안합니까? 이 문제가 없으면 저 문제가 있고 저 문제가 없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가게 될 때 이 믿음만 제대로 가지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다 믿지 못했지만 부활하시고 난 후 주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가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시자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갔다가 오시겠다고 하신 이 말씀을 듣고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3년 동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몇 가지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마21:33~34)라는 말씀이 생각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이 농부들이 세를 내기 싫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친 후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악한 농부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21:41)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자기들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하시던 일들을 그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의 말씀으로는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는데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잘못하여 돈을 잃으면 주인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묻어두었습니다. 그 때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긴 종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더 큰 것을 줄 것이라고 말했고, 한 달란트를 맡긴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일이 바로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오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들을 것인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말씀을 들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신 주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첫째 하시는 말씀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이 아무리 귀하고 중요하고 아무리 값어치 있는 일일지라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 같다고 생각될지라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른 점입니다. 예수 믿는 것, 교회는 세상과 다르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세상처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시로 지어진 예배당에 계시는데 자기는 좋은 집에 있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윗의 생각이 맞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전쟁으로 다윗의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납득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맞기는 하겠지만 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도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전쟁하러 가기 전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제사를 집례해야 할 하나님의 종이 오지 않자 자기가 집례하여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야단치셨습니까? 우리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면 아무리 옳아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하고 기다려야합니다. 넉넉하게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자녀문제, 경제문제, 애를 쓰고 노력은 하지만 기다려야합니다.

두 번째,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일까요? 여기에 절대로 우리 판단이나 상황으로 행하면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지시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아실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는 1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기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에는 어두워 잘 보이지 않을까봐 불기둥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낮에는 더우므로 구름기둥을 가려주시면서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라고 말씀하시면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아주 통쾌한 승리를 하였습니다. 혼자서 수백 명을 상대하여 이겼으니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전권을 주실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인을 보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싸인을 보고 오라고 이야기했는데 산에 올라간 하인은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속해서 하인을 보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실컷 기도하여 하인을 보냈는데 아무런 싸인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여러분, 엘리야가 무능한 종 같지만 이런 사람이 유능한 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내가 잘나서 내가 기도하면 응답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보가 되고 무능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만 유능하면 됩니다. 그렇게 능력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던 엘리야가 이제 아무런 능력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능력없는 사람 그 모습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하인을 보냈지만 계속 그러했으니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못난 사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자꾸 유능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권세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만 권세는 하나님만 가지면 됩니다. 그 권세, 그 능력을 받으면 됩니다. 그것을 자꾸 내 것으로 받을 필요 없습니다. 끊임없이 받아서 그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면 됩니다. 일곱 번째 올라가니 손가락만한 구름을 보고 나서야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그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다면 그때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때도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8절).. 중인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다 움직여 주십니다. 움직이지 말고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므로 나서지 말고 성령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지극히 명심해야할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해야 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합니다. 조금 기다리지 못하여 낭패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무리 급해도 느긋하게 천천히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조금 더 건강해지려고 급하게 가려다 쓰러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돈도 조금 더 많이 벌려고 한다고 많이 벌립니까? 하나님께 나가면 되는데 자기가 자꾸 무엇을 하려고 하니 인생이 피곤해지게 되고 지치게 됩니다. 결국 예수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어지고 지치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해야 하는데 요즘은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과의 거리가 줄어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서두르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이 뜨겁다고, 일이 급하다고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항상 성령님께서 앞서달라고 기도로 요청하여야합니다.

사도 야고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그때 이미 예루살렘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상당했습니다. 헤롯은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갔습니다. 그때 그들은 나서지 않고 교회에 모여 같이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능력의 종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뮬러 목사님입니다. 그 어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주님보다 앞서지 말라, 결코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 결코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 결코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늘 듣던 말씀이지만 5만 번이나 응답을 받았던 그 귀한 하나님의 종이 자기 모든 삶의 하나의 열매로서, 알알이 맺힌 보석같은 것으로서 하신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에 나서지 말고 모든 일에 성령님을 모시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앞서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전적으로 따라가겠습니다.’ 순간순간 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요청하면 성령님께서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늘 요청하기만 하면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의 손을 잡고 성령님의 뒤에 바짝 따라갈 때 정말로 여러분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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