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비웃음을 놀람으로 바꾸는 주님, 성도 (막 5:35-43)

  • 잡초 잡초
  • 315
  • 0

첨부 1


비웃음을 놀람으로 바꾸는 주님, 성도(막 5:35-43)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기억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늘 과거 속에서의 사람과 상황으로 기억을 하고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봄이 여름 되고 여름이 가을되고 또 그리고 겨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상황이라는 것은 늘 바뀌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평가할 때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내용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 평가가 현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와 그리고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하고 바로보고 인정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훨씬 더 바른 평가와 실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바른 이해를 통해 우리는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꽃밭을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의 삶도 언제든지 같은 내용과 모습이 아니고 우리에 대한 평가도 언제나 같을 수 없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타인이나 세상의 평가도 바뀔 것이고 또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다 진보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돼야만 합니다.
비록 믿음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거나 우리를 폄하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주님의 능력을 입고 또 이제까지 비축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달리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관념적으로만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생활에서 능력으로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어 예수님이 자신들과는 다른 은혜와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때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별로 뛰어난 것이 없다가도 어느 순간 주님의 은혜를 입고 또 그가 준비했던 힘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고 은혜의 백성으로 우뚝 서는 은총의 역사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회당의 장이라는 야이로의 부탁을 받고 야이로의 집으로 갑니다. 다름이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야이로는 회당의 장으로서 상당한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그 딸이 낫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열두 살 된 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아직 30대 초반의 예수님에 대해서 그 연배 또한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모든 외적인 요건들을 다 처치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야이로를 볼 때 그의 마음에는 다급함과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다급함이 절대적 신뢰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열두 해를 혈우병으로 말미암아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지면 나는 나을 수 있어’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을 헤치고 이 환자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그 결과 그 옷깃을 만진 그 여인이 낫게 되고 이와 같은 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체되어 늦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서 지체됐는지, 혹은 그 아이가 조금 더 숨을 참지 못해서 먼저 이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든지, 그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이미 그 딸이 죽었다는 겁니다. 정말 야이로는 힘이 풀릴법합니다. 예수님도 부지런히 달려갔는데 이미 그 딸이 죽었다고 하니까 힘이 다 풀릴 법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낙심하는 야이로에게 뭐라고 얘기했냐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뭘 믿으라는 겁니까?
딸을 살려달라고 왔던 야이로. 그런데 이미 딸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뭘 믿으라는 겁니까? 마음에 야속함밖에 없을 겁니다. 주님이 조금 일찍 가셨으면 주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제를 해결하셨을 텐데 열 두해나 혈우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 한 번 만져서 나았는데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머리에 안수라도 하고 기도해 주시면 다 낫지 않았겠는가 하고 그 마음에 안타까움만 더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겁니다.

이제 그 집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요. 안타까움 가운데 어린애가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장면을 보고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이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예수님이 어떻게 되신 거 아냐? 병 좀 고쳤다고, 귀신 좀 쫒아냈다고, 어떤 기적 좀 이루었다고 죽은 사람을 잔다고 얘기하는가?” 하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그 소녀 앞에 가더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이 비웃던 사람들의 비웃음이 싹 가시고 갑자기 이들이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뒤로 자빠질 만큼 놀란 겁니다. 아니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이제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경솔했던 비웃음에 대해서 정말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깜짝 놀라게 되는 이와 같은 평가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라” 하고 경계하시고 “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이런 큰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주 평범하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 라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능력과 기준이 틀리니 해석도 틀리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 죽은 사람을 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다르니 기준도 다르고, 기준이 다르니 해석도 다릅니다. 이렇게 능력과 기준과 해석이 다르니 그 다음에 뭐가 나타나게 됩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라고 얘기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웃지 않았을 겁니다. 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기준이 다릅니다. 해석이 다릅니다. 능력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봐도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준과 능력과 해석이 다르니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예수님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리는 뭘 보게 되느냐하면 이와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평가를 바꾸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비웃다가 금방 깜짝 놀라서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면모는 사람들의 평가까지도 바꾸시는 겁니다.
평가의 변화.

그리고 세 번째는 뭡니까?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서 보는 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다가 깜짝 놀라다가....... 큰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별것 아닙니다.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밥 가져다 주어라. 라고 얘기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깜짝 놀라서 넘어질 만한 사건이 예수님께는 단순히 스쳐가는 하루의 일과, 여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크신 면모를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것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능력과 기준의 차이로 인하여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수준도 주님의 말씀과 뜻, 그리고 계획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앎과 이해와 능력의 차이가 있어 같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렇게 설명해 드리면 어떨까요?
두 사람이 옥상에 가서 멀리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은 육안으로 바라봅니다. 앞에 아파트가 있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나무가 있고, 그 뒤에 또 아파트가 있고...... 거기까지 보입니다. 멀리 또 먼 산이 보이거나 이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망원경을 가지고 저기 뭐가 있고, 뭐가 있고, 그 뒤에 뭐가 있고......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있긴 뭐가 있어?
그런데 이 사람은 망원경으로 보면서 자꾸 얘기합니다.
있긴 뭐가 있어? 이 사람은 볼 수가 없어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꾸 뭐가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저기 사람도 있고 저기 뭐가 있고 또 뭐가 있잖아.
여러분, 두 사람을 어떻게 교통시킬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겁니다. 같은 장면을 봐도 딴 것을 보고 있습니다. 뭐죠? 망원경이라고 하는 능력을 통해서 또 다른 것을 보는 겁니다.
육안으로 보는 사람은 망원경을 가진 사람이 보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해할 수 없단 말입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대화가 소통될까요?
이 망원경을 가진 사람이 가보자 해서 저기까지 가보는 겁니다. 이거 있지 않냐. 또 이거 있지 않냐 하면 깜짝 놀라면서 정말 당신 말이 맞네. 당신이 본 게 맞아.
이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의 근원이 뭔가? 망원경이구나! 나도 한 번 보여 줘봐. 보고 나서는 ‘아 맞구나!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능력이 다르면 기준도 다르고, 기준이 다르니까 해석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능력과 기준과 해석이 다르니까 피차간에 서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우리 주님을 보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에 대한 오해와 몰상식으로 인해서 주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래도 마음 열리고 상식의 논리라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못 보는 것도 다른 사람은 볼 수 있어. 내가 못 보는 것도 주님은 볼 수 있고 내가 못하는 것도 주님은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데 많은 경우 상식의 논리조차 부인하는 겁니다.

여러분, 똑같은 사람이 어떤 사물과 상황을 봤다고 합시다. 똑같이 느끼겠습니까?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못 봐도 다른 사람은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현상을 반복해도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데 이 사람은 반복된 현상 속에서 원리를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도 하물며 다른데 어찌하여 우리 사람과 주님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못한다고 주님이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 사람 죽었으면 끝이야 하고 생각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죽어도 끝이 아니고 새로운 역사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같은 인간과 주님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와 같은 인간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깨우쳐주기 위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구원을 주기 위하여 선한 가르침과 깨달음이 있을 수 있도록 실제의 능력을 보이시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이시고 능력을 행사하신 것은 그것을 통해서 휘두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타까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것을 통해서라도 주님을 이해할 수 있는 길로 접근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모른다고, 오해한다고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이해의 기회를 제공해 주시고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36절>을 보면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 딸을 고쳐주십사하고 온 회당장 야이로와 그 집에 도착하기 전에 그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낙담하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예수님과 우리 인간사이의 능력과 능력에서 오는 기준과 기준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라는 말입니다.
쌀 29kg 한 푸대가 있습니다. 제가 이 쌀 20kg 한 푸대에 대해서 선명하게 생각이 나고 영 떠나지를 않는데 뭐냐 하면 올해도 그렇고 작년에도 캄보디아에 가서 선교단이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올해 한 2000푸대 정도 나누어 주었고 작년에는 600푸대 나누어주었는데 또 겨울에 가서 1000푸대 정도 나누어주고 이번 여름에 가서 2000푸대 정도 나누어 드렸습니다. 나누어주라고 하면 어떻게 전달될지 몰라서 우리 교우들이 직접 나누어드리고 왔는데 참 안타까운 장면이 있었습니다. 쌀을 받으러 오시는데 거기서도 어려운 분들이 오셨는데 남자분들도 오셨지만 여자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이 그 여자분들이 그 땡볕에 그 쌀을 받으시려고 기다리시는데 맨 흙바닥에 그냥 앉아계세요. 제가 보기에는 여자분들은 흙바닥에 그냥 앉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 흙바닥에 그냥 앉아있는데, 너무나 체구도 조그맣고 너무나 마르셨어요. ‘저분들이 저것을 가지고 갈 수 있나? 이고 갈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 분들이 그 쌀을 받아서 들기도 어려운 20kg이나 되는 것을 머리에 탁 이더니 가지고 가시더라고요. 그런데 너무너무 마음이 안됐어요. 신발을 신은 분도 있었는데 신발을 신지 않은 분들도 있어요. 맨발로. 그런데 더 마음이 짠한 게

어떤 분은 한 쪽은 신발을 신었고 한 쪽은 안 신었어요. 여러분 좀 웃기죠? 그런데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우스운 상황이 아닙니다. 신발이 한 쪽은 신었는데 한 쪽은 신발을 안신은 것입니다. 그러니 맨발이 편해서 맨발로 다니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한 쪽이라도 있으면 한쪽이라도 신는 것 보니까 분명히 불편해서 그냥 맨발로 다니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우리가 정말 해야 될 일이 무언가? 하는 것들이 저절로 답이 나오는 것 같아요. 쌀 20kg푸대 보면 늘 그 생각이 나는데 쌀 20kg푸대가 있습니다. 7살 된 아이에게 “이것 좀 저기에 올려.” 그러면 그 애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말도 안돼요.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올려요. 못해요.”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능력이 그것 밖에 안 되니까요.
20살 된 청년에게 “이것 좀 저기에 옮기세요”. 그러면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예, 알았습니다.” 하고 번쩍 들어서 옮길 것입니다.
능력이 다릅니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의 기준도 다릅니다. 거기에 해석하는 것도 다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람이 합니까? 예, 하겠습니다. 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능력과 기준과 해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고 어떤 능력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기준을 정하고 어떻게 해석하는 게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과 주님이 능력이 다르니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고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주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이 우리에게 이해하지 못할 말씀으로 요청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내 수준과 기준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셨다면,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스스로 이루실 것이다. 는 것을 믿고 우리의 기준과 수준에서가 아니라 순종의 수준과 기준에서 기쁨으로 그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해돼야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어차피 이해할 수 없으니까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어느 순간 ‘아, 그렇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는 길에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과 기준이 안 되는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오히려 그 일을 하게 할 능력도 주시고 그 일을 이루게 할 모든 여건을 허락해 주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할 수 있다고 하시면 내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 일을 하시게 할 것이다.하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믿음은 현실과 다른 것을 말씀하신다고 할지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주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고 우리 앞의 길을 가고 또 가는 것입니다.
정말 눈물 나는 상황이 있습니다. 걸어봐야 정말 소망이 없는 상황이 내 눈앞에 나올 것 밖에 없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실 것이다라고 믿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날 문득 우리들에게 임할 수 있음을 봅니다.

오늘 <39절>을 보니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기준이 다릅니다. 왜죠? 능력이 다르니까 기준도 다릅니다.
사람은 죽은 사람을 못 살립니다. 죽은 겁니다. 끝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준도 다릅니다. 죽은 것 아니야, 자는 거야. 기준이 다릅니다. 해석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할 때 인간들이 비웃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못한 것을 주님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비웃은 겁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내 상황과 이해를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과 뜻과 의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상황을 이해하며 내 마음을 결정하고 삶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기준의 차이, 기준의 차이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 아닙니까?
여러분, 두 사람이 다 손에 빵을 한 덩어리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빵 한 덩어리의 의미가 두 사람에게 영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빵 한 덩어리가 자기의 전부입니다. 자기 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빵 한 덩어리가 자기의 전부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손에 빵을 한 덩어리 가지고 있는데 집에 또 빵이 많이 있습니다. 빵을 만들어 먹을 밀가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빵이 같은 의미겠습니까?
이 사람은 이게 전부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거 없어도 괜찮아. 집에 또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비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비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좀 차이가 나도 멀리서 바라보면 비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게 자기의 전부입니다. ‘나 이것 잃어버리면 안 돼.’ 주님께 헌신할 수도 없고 어려운 사람 도울 수도 없고 베풀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고 다 줘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것 잃어버리면 난 끝이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것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보화창고가 있어. 내가 이것을 쓰면 또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야.’
똑같은 것을 가져도 헌신할 수도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배려할 수도 있고 베풀 수도 있고 똑같은 것을 가졌는데 어떤 사람은 풍족히 살아요.
똑같은 것을 가졌는데 이 사람은 이것을 잃어버리면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붙들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악착같이 살아야지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과연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외에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것을 예비하고 계신 것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자신이 있는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답고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관대하다 그리고 다른 이를 이해하고 베풀고 나눈다하는 것도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살다보면 늘 베풀고 나누고 늘 다른 사람에게 주고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 그것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을 끝내고 보면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가졌고 어떤 사람은 더 적게 가졌고 그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이 앞으로 나를 계속해서 공급해주실 것이라고 마음까지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같은 것 가지고 있어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이라는 이해 못할 내용을 가르치는 것 같으나 시간 지나면 결국 그것이 맞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을 한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1절> 보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주님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해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영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셨지만 그 딸 앞에 이르러서는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심으로 그 딸을 살리셨습니다.
신앙은 마음의 믿음이 체험으로 인하여 확인되고 확신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국 우리 마음의 믿음을 생활 속에 실제로 이루시고 그 믿음이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늘 보여주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지만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배고픈 사람은 민망히 여겨 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은 너무 가슴 아파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안타까워서 그 귀신을 쫒아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에 관심이 있되 그 영혼이 깃들어 있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도 우리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때때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있는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자연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과 원리가 뭡니까?
생성과 소멸입니다. 모든 원칙과 원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아우르는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생성과 소멸입니다.
모든 것은 나서 모든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고 또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데 또 어느 순간 우리는 없어질 겁니다. 그리고 없어져야죠. 그러므로 또 새로이 우리는 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이 세상에 존속하고 싶어서 존속하지만 어느 날 문득 또 내 마음에 원하는 존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날 문득 다른 곳으로 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멸되어지는 자연처럼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없어지되 그곳에서 또 다른 생성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셔서 감사하고 이루어주시지 않아도 감사하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길에 접어들게 되면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우리는 어느 덧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이 세상에서 어떠하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풍파나 현상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나라로 이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에 대하여 명하심으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그럼 두 번 째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실제 모습과 능력 앞에 변화되는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마세요. 그 평가는 또 바뀝니다. 평가 바뀌어요. 또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평가는 정확하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을 마치 땅에 떨어뜨린 것처럼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평가는 바뀌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평가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 사람들은 자기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내 입술로 주님의 능력을 찬송한다 이것을 도저히 예측을 못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함을 듣고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라고 말할 때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렸을 때 그들은 비웃음에서 놀람으로 바뀌었단 말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일시적인 평가가 전부가 아니고 언제고 주님의 능력으로 평가가 바뀐다는 사실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능력과 실제로 바른 평가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실제를 알기 전에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주님을 폄하하고 억지로 재단하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이 바뀌어 주님이 말씀의 실제이고 자신들의 생각이 제한된 인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40절>을 보니 저희가 비웃더라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는 겁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는 겁니다. 하물며 내 기준가지고 주님을 평가해요. 주님 왜 안 들어주십니까? 주님 왜 내 마음의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까? 하고 이렇게 평가합니다.
주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시는 건데 우리는 들어주시는 사실자체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이나 주님이 나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해도 주님은 전혀 아니실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나와 생각과 판단과 기준이 기호가 그리고 능력조차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무시하면 큰 낭패를 봅니다.
우리가 사람들도 내 기준에 따라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버리면 큰 낭패를 봅니다.

요즘 제가 교회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할 때 우리 부목사님들께 가끔가다 도움을 청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꼭 이렇게 얘기합니다.
“미안해, 내가 이런 것을 잘 못해서...... 좀 도와줘.” 이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제가 못하는 것을 그 분들이 하는 게 많더라고요.
어떤 때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건 내가 좀 나은 것 같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봐.”
우리 삶에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그분이 하고 그분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하며 서로 돕고 사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절대로 옳아 하는 순간, 우리는 저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면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을 볼 때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은 사람 앞에서도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 되겠지요.
인간관계도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우리들에게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하물며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와 주님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갈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주님과 관련해 내 생각이 옳다라고 생각해 주님이 내 생각을 맞춰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0절에서 비웃었는데 42절에서 금방 사람들이 놀랐다고 얘기했습니다. 평가는 곧 바뀝니다.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비웃음과 말에 우리는 결코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분야의 적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했거나 주장한 내용을 우리 삶에 실제로 보여주면 됩니다. 이렇다 저렇다 자꾸 말하지 말고 그냥 실제로 보여주면 됩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주님의 시간까지 참고 인내하며 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있어서 스스로 우리의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요행수가 아니라 너무 바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해야 될 일을 하고 우리의 능력범주 밖의 일은 주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 어려움 당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드렸지요?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첫째,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그리고 더 기도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더 기도하라.”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힘을 더 쏟았습니다. 정말 시간을 더 쏟았습니다. 그리고 방법을 개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 왜 예루살렘에 빨리 안갑니까? 빨리 갑시다. 예루살렘에 가면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될 줄을 알았어요. 자기도 한 자리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빨리 예루살렘에 안가는 겁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를 기다리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마지막 가장 강한 무기는 인내심인 것 같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
언제나 조급함이 우리로 말미암아 결국 어떤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을 우리는 늘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기를 기다리신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대접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배려하고 포용하다가 주님의 역사를 맞이해야 합니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은 손해보고 가슴 아픈 것 같으나 결국 승리하여 그 모든 아픔과 상처를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아픔과 상처만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마음에 지경을 넓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이요, 역사였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바꾸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비웃었던 사람들의 말과 평가와 행동을 바꾸셨습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와 실제를 실제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듣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능력의 역사를 보고 그들의 마음을 바꿨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삶의 실제를 통해서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드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좀 이상하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주시면 되고 하나님만 알면 되는 건데 여기서는 이렇게 얘기한단 말입니다.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며 사람 앞에도 시차가 있지만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에게까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우리 전심전력하여 진보를 나타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몰라요. 주님을 볼 수 없으니까 그들은 우리를 보고 주님이 어떤 분인가 유추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의 실제를 통해서 삶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힘겨운 것이 아니고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 째 인간에게 놀라운 일을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여기고 진행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난리가 났겠지요? 그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데 난리가 안 나겠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면 알리지 말라 하고 경계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놀라는데 먹을 것을 갖다주라
사람들은 놀라서 가슴 두근거리고 정말 깜짝 놀라고 뒤로 자빠질 지경인데 예수님은 평범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라
사람들은 그런 것 정신도 못 차릴 지경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는다면 그야말로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을 그저 담담히 진행하고 이루고 또 다른 일로 넘어가는 겁니다.
주님은 큰 난리가 나야 할 일을 그저 담담히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장 큰 일은 십자가를 지고 인간의 죄를 사하셔서 인간 전체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병이나 고치고 귀신이나 쫒고 몇 사람 살려주시고 하는 분으로 기억되면 그것으로 한경 짓게 되며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그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바닥에 펴고 겉옷을 펴서 바닥에 펴고 예수님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도 나뭇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하소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의 꿈을 이루어주시지 못할 것 같아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폭도로 변하여 외쳤던 것입니다.

뭐죠? 그릇된 기대가 그들을 그렇게 꼬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따라서 그들에게 그런 주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먹을 것을 주어라 하는 것은 소녀가 살아난 것은 잠시 환상이 아니라 생활 속의 실제 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격하여 나자빠질 지경이었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지경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며 우리 일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전 세계에 다니면서 간증하며 돌아다녀야 되겠습니까?
그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하고 내가 그물 드리운 어장에 가서 그물 던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화려하게 조명 받고 환호 받는 것이 인생에서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한때의 추억거리는 되겠지요.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그러한 무대 위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이 아니고 평가조차 해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마음 다지고 살아가야 할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무슨 큰일을 하면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이 우리를 다 알고 박수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러한 시간은 잠깐입니다. 시간 지나고 장소 옮겨지면 우리는 언제나 혼자 있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은 홀로 있는 시간을 어떻게 담담히 보낼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혼자 있어도 마음 허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푸근히 산하를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승리요 성공인 것입니다.
담담히 삶의 길을 가는 것, 어제 저녁에 열광적인 환호를 받아도 오늘 아침 준비하고 또 삶의 어장에 나아가 그물 내리는 이런 담담한 믿음의 사람 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게 우리를 과대히 알리려하지 맙시다.
인생의 비극은 내 실제보다 나를 더 알리고 포장하고 평가받으려고 할 때부터 생깁니다. 정당한 알림은 필요할지 모릅니다. 자신을 가리우고 나타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이 감싸인 모든 가리움을 헤치고 더 비췬다면 그 때 우리는 더 실망하지 않는 삶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일은 전부가 아니라 주님의 사역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며 정말 주님이 크시다. 그렇게 놀라는 일인데도 그냥 밥 갖다 줘라. 주님은 평상시의 일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이런 의연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갖추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을 보고 너무너무 기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인데요 이게 어떤 말씀이냐면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감격해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선지자가 말한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가보자.”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뭐라고 하냐면 “무슨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큰 일이 날 수 있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빌립이 어떻게 얘기했냐면 한 마디로 제압해버립니다.
“와 보라”
그 말에 압도당해서 나다나엘이 아무말도 못하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나오는 것을 보시고 “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에서 있는 것을 보았노라”
무화과나무아래에서 나다나엘이 기도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깜짝 놀랍니다.
“주님 어떻게 나를 아셨나이까. 당신은 나를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셨나이까.” 하고 깜짝 놀랍니다. “당신은 정말 주님이십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네가 이것을 보아서 믿느냐,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아래에서 보았다고 해서 네가 나를 믿느냐”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저는 그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것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우리는 더 큰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일을 볼 겁니다. 내가 목표했던 것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게 될 겁니다.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이루면 그 다음에 더 큰 역사를 보게 될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바라는 은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새로운 은혜를, 또 다른 더 큰 은혜를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기대가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할 것 보다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겠지. 그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더 큰 은혜를 주시겠지. 그것을 체험하고 나면 더 큰 은혜를 주시겠지. 우리 성도들도 놀라운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고도 담담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더 큰 역사를 보여주실 것이니까.
저는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큰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이 보면 놀라 자빠질 지경의 일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그냥 ”밥 갖다 줘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바라보고 신뢰하고 기대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항상 우리의 계획과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고 오해받고 평가받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이 내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믿음의 사람의 대표성을 가지고 평가당하는 것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의도와는 달리 비웃음 당하고 억울하게 평가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마음 상하고 실망하고 그것으로 억울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수준의 사람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잠깐의 시간 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있음을 믿고 기대하며 우리가 준비하고 살아온 삶의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발휘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사람의 비웃음을 놀람으로 바꾸는 예상을 뛰어넘는 은혜의 일을 우리 손과 발을 통해서 이루실 겁니다.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오늘도 우리의 길을 가고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내 마음의 계획과 다를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기회라고 여기며 은혜의 역사를 꿋꿋이 이뤄나가는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