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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이 주시는 언어 (행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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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이 주시는 언어 (행 2:4~14)

내가 자라난 교회의 학생들과 어린이들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예언까지 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아이들의 방언 기도를 보며 “제들 미쳤나봐, 품위 있게 예수를 믿어야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 기도가 왜 필요해!” 하고 방언에 대해 마음 문을 닫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분이 할렐루야 기도를 반복해서 따라하라고 해서 따라하다가 방언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기쁘고 날아가듯 한 것이 분명했지만 뜻도 알지 못하는 기도가 중요한 기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성령의 열매란 품성의 열매이기에 은사보다 인격의 열매가 중요하다고 하여 은사를 외면하였다.

나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준비하며 2006년에 ‘부흥을 갈망하라.’는 책을 썼다. 목회를 하면서 부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그러면서 방언을 외면한 것도 회개하였다. 이는 성령의 선물인데 내 생각으로만 하위 은사라고 판단한 것을 회개하였다. 그리고 방언을 선포하고 방언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청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붙잡고 기도해 주고 싶다. “주여, 저 청년에게 방언을 허락해 주세요. 자기의 뜻대로 나눠주실 은사를 허락해 주세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저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 방언의 은사를 부어 주세요.”라고 기도해 주고 싶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방언은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던 경건한 유대인에게 자기의 언어로 들려지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 행2:9을 보면 저들은 바대인, 메대인, 엘림인,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과 리비아, 로마인, 그레데인, 아라비아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국의 언어로 들려지는 방언이란 이 언어는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하늘의 언어였다.(행2:4) 이 신령한 언어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하늘의 언어에 대한 각 국의 사람들의 반응은 무지했다.

1. 방언을 들었을 때 소동하였다. (행2:6)

2. 방언을 들었을 때 놀라며 기이히 여겼다. (행2:7)

3. 방언을 들었을 때 의혹하였다. (행2;12)
행2:12 “이 어찐 일이냐” 그들의 삶 속엔 의혹의 질문이 더하여졌다.

4. 방언을 들었을 때 조롱하였다. (행2:13)
행2:13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방언을 모르는 저들은 영의 일에 무지하므로 술취함의 모습에 성령 충만한 저들을 비교할 수 밖에 없었다. 영적 체험이 없는 자에게 방언은 충분히 오해 받을 수 있다. 소동과 기이함, 의혹과 조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방언을 받았어도 나처럼 어리석은 교만과 편견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120문도의 모임 속에 임한 성령님이 주신 방언이 교회의 시작이요, 교회의 승리의 나팔임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방언이 소중하고 방언을 업신여긴 죄를 회개하게 된다.

왜, 처음 교회의 시작인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은사 중 방언을 주셨는가? 방언이 뛰어난 은사라서인가? 아니다. 모두 다 소중한 은사 중의 하나이지만 방언을 주신 이유는 이렇다.
 

첫째, 성령을 받은 표적으로 분명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행1:4~5)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눅24: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1:4~5 “저희에게 불복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이 약속을 기다리며 성령이 임하기를 사모하는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은사라기보다는 나타난 은사다. 가령 고전12:8에서 말씀하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당장 드러나지 않는다. 은사를 받았으나 드러나지 않으면 처음 성령을 사모하는 자들에겐 사인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방언으로 주셨다. 방언이란 은사는 그 혀가 꼬부라지는 순간 성령이 임한 선물로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속하신 성령이 내게 임했는지의 여부를 나도 알고 너도 알게 된다.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부어 주심은 누구든지 알도록 임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들려지는 언어, 하늘의 언어가 나타나는 것이 최고로 좋은 방법이다.
 

둘째, 새 시대를 알리는 것으로 분명한 종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행2:11)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회이다. 그 말씀에 근거하여 모인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시대를 열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면에서는 방언이 최선의 방법이다. 방언이야말로 복음의 시대, 영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 성령의 시대 즉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종소리인 것이다.

창세기 11장을 보라. 열국 백성이 나누어졌어도 인류의 언어는 본래 하나였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11:2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창11:3 “서로 말하되” 창11:4 “또 말하되” 여기서 서로 말이 통하던 때였기에 오직 말이 하나인 구약의 사람들은 하늘 꼭대기에 탑을 쌓아 올리고 인간의 이름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창11:6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다 하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다. 혼잡케 된 언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헛된 삶을 금지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 교회를 세우시고 떠나신 예수님, 새 시대를 열 성령님이 오셔야 할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성령의 나타나심에 있어 나타난 은사가 방언이었다. 복음의 나라가 확장되려면 새 언어가 와야 한다. 언어가 막혀서는 안된다. 그래서 각 국의 사람들이 자기의 언어로 알아듣게 되는, 행2: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기록된 신비한 언어 소통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것이 방언이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신 방언이란 복음의 시대를 알리는 분명한 종소리로써 서로 알아 듣게 되는 일을 통해 새롭고 놀라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성령을 가로막고 내 생각으로 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방언이 중요하다. 방언은 바로 의사 소통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사인이다. 교회에 이 하늘의 언어가 넘쳐야 한다. 방언을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고 거룩한 교회의 일을 분열시킨다면 그 방언의 은사는 문제다. 하늘의 언어는 아버지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는 생활, 새 생활을 알리는 종소리로 방언을 수용하라.

 
셋째, 나 한 사람이 하늘의 언어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능력의 채널이다. (행2:14~42)

예전에 베드로는 겁쟁이였다. 오늘도 방언에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이 조롱으로 나타나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할 때 베드로는 옛날 같았으면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 서서 외치기 시작한다.

행2:14~42은 베드로의 성령에 대한 설교요, 그 성령 충만한 설교 앞에 3,000명이 세례를 받아 제자가 되는 이야기이다. 베드로의 이 능력의 역사가 어디서 왔는가? 바로 성령 충만에서 왔다. 그리고 하늘의 언어인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주어진 능력이다.

방언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비밀 언어이다. 영으로 드리는 기도의 언어이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 기도는 비밀 기도이다. 영으로 드리는 비밀 기도이기에 영적 어두움의 권세, 마귀가 꼼짝 못한다. 마귀가 그 비밀을 알면 대책을 간구하겠는데 영의 기도, 방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서 하나님만이 들으신다.

우리 교회가 고색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올 때 옛날에는 가로등도 없고 길도 좋지 않았다. 그때 고색동에서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참 위험하고 무서운 길이었다. 지금은 체육 공원, 시민들의 복지 회관으로 있는 곳에 교회를 다니던 권사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교회 오는 길에 도둑이 나타났다. 논두렁으로 끌고 가서 해하려 하는데 그 권사님이 너무 당황해서 기도하였는데 방언으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졌는데, 그 도둑이 “아, 이 여자 미쳤구나!”하고 도망갔다. 그러나 이 일이 결코 웃을 일은 아니다. 이는 도둑 속에서 일하던 마귀가 방언의 능력에 놀라서 달아난 것이다. 마귀가 우리 주변을 맴돌며 나의 기도를 듣는다. 그러나 방언의 기도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격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떠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방언 기도자의 기도를 듣고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 하였다. 여기서 자기의 덕이란 ‘오이코도메오’ 즉 “집을 세운다.”라는 말이다. 자신을 세우게 되는 은사다. 그러므로 방언은 나를 강건하게 만들어준다. 세워지게 된다. 누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나타난다. 치유, 축사, 자유, 능력이 방언으로부터 확대된다. 사실 방언은 교회 안에서 할 때 통역을 세우는 것이 좋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공적으로 모이는 집회 때에는 잠잠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의 덕보다 나의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면 된다.

고전14:28의 말씀처럼 방언은 철저히 나의 영의 기도요,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이다. 지식, 형식, 권위를 파격적으로 깨뜨리는 것 같은 방언이 진정으로 나를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방언으로 말하려 하라.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라. 바울도 고전14:5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물론 예언하기를 원하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방언을 주목하였다.

나는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방언을 하지만 방언에 대해 나처럼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되고 안타깝다.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를 주저하고 또 방언을 외면하는 성도들을 본다. 방언이 성령의 은사의 대표는 아니다. 그러나 보편적 은사를 수용하고 방언하는 것을 두려워말라. 오히려 사모하라.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능력을 덧입기를 원한다.

“주님, 저는 방언을 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고 성령이 임하시는 여러분들의 간증을 듣기를 원한다. 나는 뜨거운 가슴으로 여러분을 붙잡고 기도하고 싶다. 교회를 위해, 나의 영혼을 위해 주시는 능력의 언어, 그 언어를 어린이로부터 다 부어달라고 갈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성령의 은사, 방언을 대신하는 또 다른 은사를 발견하게 해달라고 하라. 다 교회를 세우는 마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면 어떤 은사든지 다 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앞에 나를 순종하자. 다윗은 삼하23:2에서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하였는데 내 혀가 하늘의 언어,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언어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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