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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돌멩이가 필요합니다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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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돌멩이가 필요합니다 (요 8:1~11)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구 근교의 시골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북에 처와 자녀들을 두고 1.4 후퇴시 국군을 따라 내려 왔다가 휴전이 되는 바람에 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대구에서 정착하여 시골의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나이가 50대가 되자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교인들이 결혼을 하라고 독촉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냥 씩 웃어넘기곤 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머지않아 통일이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북에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으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독신을 고집하기에 교회에서  가정부 처녀 하나를 구해 주어 식생활에 도움을 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가정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미가 급한 동네 사람과 교인들은 가정부가 나간 것이 목사가 이상한 짓을 해서 그렇다고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부가 행방을 감춘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동네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등에는 어린아이 하나를 업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목사 사택으로 직행하더니 마침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던 목사에게 어린애를 밀어 놓으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이건 당신 아들이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는 그 아이를 그 목사님에게 떠맡긴 후 또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교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목사가 가정부와 불륜 관계로 아이까지 낳게 됐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전후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목사를 성토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했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쫓겨났고 이 소식은 노회와 총회에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목사직이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목사직까지 잃게 된 그 목사는 그날부터 교회 사택도 비워주고 대구 변두리에 작은 집 한간을 얻어 시장에 나가서 지갯일을 했습니다.
시원치 않은 지게꾼 벌이로 그 어린아이를 길렀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로부터 3년이 흘러간 어느 날 그 동리에 문제의 그 가정부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건장한 남자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교인중 한사람이 그 목사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그들을 안내했습니다.
목사가 살고있는 초라한 셋방을 찾아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두 남녀는 때마침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재롱을 구경하던 목사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그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은 우리 둘이 좋아지내다가 임신까지 했으나 아이를 기를 능력이 없어 목사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어 이렇게 와서 사죄합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교인이 교회에 연락하자 목사의 집 앞에는 목사를 욕하고 심판하던 동리 사람들과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우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너무 경솔했었습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목사님을 욕하고 더러운 위선자라고 규탄했습니다. 왜 3년 전 그때 아니라고 변명 한 마디를 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까?”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3년 전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아니라고 변명했던들 여러분이 믿어 주셨겠습니까? 이제 이대로 눈을 감아도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셨습니다.”
“나는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리라 믿고 있었기에 묵묵히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목사는 다시 복직되고 여생을 성직자로서 살다가 지난 80년초 소천 하셨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남들의 허물과 단점, 덕이 되지 못하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런 사건의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도 않고 단정을 지어 무조건 비판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세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돌멩이로 쳐 죽이려는 살기등등한 사람들을 보세요. 그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이 여인을 잡아온 사람은 누굽니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 여인을 잡아서 율법대로 처벌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끌고 왔을까요?

그리고 간음은 혼자 합니까? 그 여자와 간음하던 그 남자는 왜 안 잡아 왔을까요? 레위기 20:10에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했습니다.
또 신명기 22:22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했습니다. 둘 다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인만 예수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율법에는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제거하게 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죽이라” 하면 잔인한 사람이 됨과 동시에 죄인을 구하러 오신 목적이 실패하는 것이 됩니다. 또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의 돌멩이는 간음한 여인에게 던질 돌멩이가 아니고 예수님께 던지려는 돌멩이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짐승처럼 잔인한 무리들입니다. 교묘하고 위선적인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이 모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은 너무도 쉽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한번 던진 돌이지만 그 돌에 맞은 새는 그 한방에 목숨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입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를 맞는 사람은 그 한방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돌멩이가 어느 날에는 우리를 향한 날라 올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나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 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 3가지만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1. 흥분하거나 성급하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부분의 비난과 정죄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깁니다. 그리고 오해를 하는데서 생깁니다. 또 치명적인 범죄 사건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나 분노에서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의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매우 흥분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중심리 속에서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긴박한 상태였습니다. 일촉즉발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 한마디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잘못 말을 하면 흥분한 그들의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사건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온 목적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황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때 주님이 취하신 자세는 침착과 여유였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주님은 그 사건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땅에 뭐를 쓰는가 바라보며 흥분을 가라앉힙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그 여인에서 당신에게로 옮기게 하십니다.
그러다 그들이 대답을 재촉하자 한참 뜸을 들이시더니 일어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십니다.
뭐를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성경 말씀을 기록하셨을 것이라 추측은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글씨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누그려 트립니다. 만약 그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다면 상태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몇 사람은 오기로 돌을 던지게 될 것이고 한 두 사람이 던지다 보면 다 던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 여인은 죽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땅을 바라보고 글을 쓰신 것입니다. 결국 한사람 두 사람 돌멩이를 땅에 던지고는 사라집니다.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분위기에 많이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는 분위기에 극한 흥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한 폭력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이 순간적인 흥분과 격한 감정으로 일어납니다. 비난과 정죄도 그렇습니다. 충분한 이해를 하지 않고 들리는 소리, 눈에 보이는 증거만으로 즉각적인 판단을 하여 퍼붓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이해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 있으면 속단하지 마셔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너무 흥분된 마음으로 판단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침착하고 여유 있게 상황을 판단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돌멩이를 던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돌멩이가 잘못된 판단이나 오해로 한 것이라면 돌이키기 힘든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자세를 본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감정에 매이지 말고 흥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실수하지 않게 됩니다.


2. 주님은 그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궤계를 아셨습니다. 예수를 넘어트리려는 그들의 간계를 아시기에 주님은 그들의 시험에 넘어가시지를 않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혜로 그들이 쳐놓은 올무에 걸려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7절 하반절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따라서 합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 이 여자는 죄인이다. 그런데 너희도 죄인이지 않냐? 그러니 죄 없는 사람만 돌로 치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악한 무리를 향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 한마디로 문제는 해결 됩니다. 그 말씀이 뭡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저는 이것을 ‘말씀의 돌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 돌멩이로 바리새인들의 손에 든 돌멩이를 해결했습니다. 말씀 한방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주님, 참으로 멋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말씀의 돌멩이 하나로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셨고 그 여인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살리셨습니다.

땅바닥 돌멩이로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땅바닥 돌멩이는 사람도 죽이고 던지는 사람도 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의 돌멩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멩이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행해 던지셨습니다.
아주 힘없게 던졌습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듯 한 돌멩입니다.
그러나 그 힘없어 보이는 말씀 돌멩이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토록 살기등등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다 녹였습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땅바닥에 버리고 하나 둘 다 사라지게 했습니다.

말씀의 돌멩이 한방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의 돌멩이는 따듯한 사랑이 담긴 돌멩입니다. 그러기에 그 돌멩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찌르는 돌멩이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돌멩이입니다.

9절을 보세요.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던 돌멩이는 어떤 돌멩이 입니까? 차가운 돌멩입니다. 차가운 시선, 비판과 정죄가 가득한 돌멩이입니다.
그런 돌멩이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멀쩡한 사람까지도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도 가정도 파괴 시킵니다.

그런 돌멩이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가득합니까? 우리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그런 돌멩이는 차고 넘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란 돌멩이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가지셨던 그 말씀의 돌멩이, 그 사랑이 담긴 돌멩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죄인도 살게 되고 살기등등한 사람들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서만 적용되고 교회에서만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활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말씀을 모른다면 사단의 간교한 궤계에 걸려들게 됩니다.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죽이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만 말씀의 돌멩이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3.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다 떠난 후에 그 여인을 향해 뭐라 말씀하십니까?
10절~11절을 봅시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왜 물어보실까요?
사람은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이 중요합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용서는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죄짓지 않을 때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 집나간 아들을 용서합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용서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집을 나가기 전에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돌아왔기에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가 먼저였기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55:7에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용서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6:14~15에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6:37을 보세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하십니다.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런 자격이 없기 때문이고 더 나가서는 그것으로는 사람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용서입니다.
용서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자는 하나님이 들어 쓰십니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판 형들을 용서 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향해 돌을 치는 사람을 용서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용서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바닥 돌멩이로가 아닌 말씀 돌멩이로 그들을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손에는 어떤 것이 들려 있습니까?
혹시나 비판과 비난, 정죄의 돌멩이가 들려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던져 버리고 말씀의 돌멩이, 용서의 돌멩이를 던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골로새서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하셨습니다.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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