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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내게 이런 일이 (욥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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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 1;1-5                    제목 ; 왜 내게 이런 일이?

미국의 저명한 존 테일러 주교는 자기 친구의 딸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넌 대학에서 늘 장학금을 받는다지?  하지만 네가 실패에 직면했을 때 넌 과연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니?”  간단하지만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질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성공만을 위해서, 승리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어느 누구도 원치 않지만 고난과 절망은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도무지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아이들에게 성공적인 인생을 남겨 주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시키고, 성공을 위해서 공부를 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막연히 생각합니다.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이 아이의 인생에는 고난이 없을거야.  내 아이의 삶은 성공한 삶이 되꺼야.”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인생길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누 누구도 완벽하게 그 덫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도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고난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것이 부모님의 노력 부족입니까?  부모님이 내게 더 많은 학업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전 개인적으로 부모님이 뒷받침만 잘 해 줬으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합니다.  그 사람의 실패는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미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언제나 모든 고난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며 평생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욥이라는 의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이런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면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런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고난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그가 고난을 받을만한 일을 했는지, 

1. 고난받는 의인

욥은 아마도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근거로 욥기에는 성전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활 배경이 아브라함 시대와 비슷합니다.  욥이 살고 있었던 우스 땅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경선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당시 고대 근동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떤 사람이었을가요?  어떤 의미에서 그는 아브라함보다도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반복되는 실패와 타락 가운데서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지만 욥은 마치 처음부터 의인이었던 것처럼 기록되고 있습니다.

1) 욥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A. 욥의 적극적인 경건 - 순전, 정직, 하나님을 경외

순전은 주로 인격적인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정직은 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믿음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인간관계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욥은 모두 아름다운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B. 욥의 소극적인 경건 - 악을 멀리함

악에서 떠난 자라는 말이 얼마나 큰 말입니까?  욥은 적극적으로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소극적으로는 악을 멀리했던 진정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2) 욥은 재물의 복을 누렸습니다. (1;2-3)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복은 종종 재물로 측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누구나 재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유산을 더 물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재물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물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단 그것이 잘못 사용될 때 하나님은 채찍을 드십니다.  욥은 그가 받은 복을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3) 욥은 가정의 믿음을 돌보았습니다. (1;4-5)

욥은 자신만 믿음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칠남삼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욥은 생일잔치가 지나면 자식의 숫자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거의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1;4-5절을 읽겠습니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잔치에 자식들이 무슨 구체적인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욥의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경건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이 흥겨운 잔치로 인해 하나님을 잊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욥은 그 잔치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신 것을 자식들이 잊을까봐 걱정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라도 그들이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되지는 않을까를 걱정한 것입니다.  그는 번제를 통하여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일 잔치가 아무리 즐거워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잔치의 기쁨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보다 뛰어나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린단다.”

욥의 자녀교육은 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자녀들에게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고 더 기뻐할 수 있는 힘을 넣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욥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4) 욥은 재물을 바르게 사용했습니다. (31;16-20)

돈을 버는 것도 힘들지만 그 돈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더더욱 힘이든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세 친구는 혹시라도 욥이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벌을 벋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함께 31;16-2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17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19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20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이렇게 정결한 삶을 산 욥에게 닥친 시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물질의 대부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고난당한 것을 원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5) 욥은 재물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23;12, 31;24-25)

욥에게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가운데서도 더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행여 물질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적인 될까봐 번제를 드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녀교육에서만이 아니라 욥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23;12절과 31;24-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31;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25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욥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재물은 단지 생활을 조금 더 편하게 해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6) 욥은 재물을 잃은 후에도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1;20-22, 2;7-10)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이 한 순간 약탈당했습니다.  믿음직하고 예쁘던 그의 10 자녀들도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결국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몸뚱이 하나와 마누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순간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재물이야 다시 모으면 되는 것이고,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함께 1;20-22절을 읽겠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욥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제 욥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그 몸뚱이와 마누라를 그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욥의 몸에는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창이 납니다.  욥은 견딜 수 없어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습니다.  유일한 무기인 몸뚱이까지 빼앗긴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가 한 술 더 뜹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음성은 부인의 입술을 통하여 울리는 사탄의 음성이었습니다.

  평탄할 때는 신앙을 말하고, 신앙을 즐기던 사람이 최후의 순간이 되자 악을 발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이입니다.  평탄할 때는 신앙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 시련이 닥칠 때 비로소 옥석이 가려지기 시작합니다.  함께 2;7-10절을 읽겠습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순결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는 행동으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욥에게도 고난이 있었다면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이 뭐 그리 억울합니까?  모든 재산과 자식, 아내, 그리고 건강을 잃고도 욥이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욥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욥을 통하여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2. 고난에 대한 해석들

1) 세 친구 -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다.

욥기 전체를 통해서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처음에는 위로해 주러 왔으나 그들의 잘못된 편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잔인하게도 욥을 정죄합니다.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도 싸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전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진실일 뿐입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는 아닌 것입니다.

행여 우리에게도 이런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누군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요, 징계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랬다가는 욥의 세 친구, 빌닷과 소발, 앨리바스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2) 엘리후 - 고난은 하나님의 경고이다.

욥의 세 친구와 함께 온 나이 어린 엘리후는 그 세 친구의 말이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아울러 자신을 변호하는 욥도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난은 다가올 타락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는 세 친구보다 할 걸음 더 나갔습니다.  그러나 단지 한 걸음 더 나갔을 뿐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더 나가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재앙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부분적인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욥기 - 고난은 얻는 것 없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욥기는 네 친구의 말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더합니다.  1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 또한 가장 중요한 초점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그 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은 없다며 하나님에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며, 이 땅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대표적으로 욥을 뽑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이 땅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아니 스스로 자신의 모든 특권과 권리를 내려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욥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R.A 토저는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무가치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하나님, 그 분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그 동안 우리에게 맡겨 주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4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은 욥이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고, 자기가 당한 고난에 대해서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왜냐하면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서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고함치면 울부짖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이기에 갖는 한계이기 떄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결국 우리도 욥과 같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감사하기를 그치지 마십시오.  욥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신실하심을 의심치 마십시오. 

최후에 웃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행복한교회 - 김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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