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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대하 3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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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대하 33:10-19)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 미국사람, 일본 사람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천사가 "당신들은 세상에 살 때 너무 많은 죄를 졌으니 엉덩이를 백대씩 맞아야 겠소! 그런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한가지씩은 소원을 들어 주겠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미국인이 "저는 엉덩이를 때릴 때 두루마리 화장지를 위에 올려 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음 일본인이 "저는 방석을 올려 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엔 한국인 차례가 되었답니다. 천사가 "당신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자 한국인이 " 저는 금방 들어간 일본놈을 올려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아마 제일 감정적으로 일본 사람들을 싫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의 왕 중에 제 14대 왕 므낫세 왕에 대하여 살펴 보고 있는데 이 때 유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앗수르 나라일 것입니다. 이미 이 나라에 의해 북쪽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남쪽 유다도 두 차례라 침범하여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세계 패권국이 된 앗시리아는 주변국가를 점령하고 조공을 바치게 했으며 마치 일제시대때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한 것처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을 주변국 나라에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앗시리아 왕의 호감을 사고자 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민족주의적이면 하나님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을 단호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처럼 예배를 정화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예배의 중앙 통일화를 시도하였고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12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므낫세는 앗시리아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자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고 봉신국으로서 의무를 다 감당하며 앗시리아의 종교를 다시금 받아들였습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인 예속은 곧 종교적 예속을 의미합니다.

1. 실패한 므낫세의 잘못된 종교 정책

2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어려울수록 국민의식이 하나로 만드는 통치철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통치철학은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므낫세의 통치철학은 잘못되었습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보기에는 국제 정세를 잘 읽고 적절하게 타협하여 나라의 살길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한 길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다고 했습니다. 3절에 보십시오. 부친이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겼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늘의 일원성신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 전에 자신이 만든 목상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여호와의 전에서 단을 쌓고 앗수르 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들을 불 살라 제물로 바쳤습니다. 므낫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듣지 않고 점치는 자들 무당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신뢰하며 그들의 조언을 듣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바르게 고언하는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바른 지식인을 탄압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며 므낫세에 의해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진정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이 보장되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까? 7절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데 진정 번영과 안정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섬기는 신을 믿어야 강력해지고 앗수르의 신을 섬겨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기술, 자본, 문화”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선진 열강들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술, 자본, 문화 면에서 일본을 따라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나라의 운명의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 민족이 진정 번영하고 행복해지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온 민족이 여호와 신앙으로 무장한다면 그 보다 강력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2. 므낫세의 잘못된 종교 정책의 결과

므낫세의 이런 잘못된 종교 정책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1)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였습니다(6).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진노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진노를 피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면 더 심각한 파멸로 가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니까 멸망하였습니다. 그 화려한 도시도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니까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헤롯이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니까 영원하리라고 생각되었던 바벨론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2)자신을 따르던 백성들이 심각한 악에 빠져 버렸습니다(9).
이방신들을 섬기면 잘 될 것같았지만 오히려 백성들이 이방 사람보다 더 심각한 죄를 지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지도자의 잘못으로 백성들의 정신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삶의 질이 현격하게 저하되어 버렸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렸습니다(10).
세상의 소리는 달콤하게 들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시대 정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4)결국 자신이 무서운 징계를 당하였습니다(11).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와 유다를 쳤습니다. 그들의 신을 섬기면 잘 될 것같았는데, 그들의 비유를 맞추면 잘 될 것같았는데 결국 나라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다시 국토는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이 살상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므낫세라는 희대의 악한 왕이었습니다. 당시 앗수르 나라는 포로를 끌고 갈 때 포로들의 코에 갈고리를 꿰어 끌고갔다고 합니다. 짐승처럼 갈고리에 코를 꿰고 쇠사슬을 차고 걸어가는 왕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대낮에 한 나라의 임금이 다른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갈고리에 코를 꿰여 끌려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룰 말할 수 없는 치욕이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3. 실패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만든 므낫세

우리 모두는 므나셋 왕처럼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로 인생을 마감하길 원치 않습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므낫세 왕은 실패를 마지막 결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실패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1)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실패를 통해 잃은 것보다 가장 고귀한 것을 얻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12,13).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다. 징계받았을 때, 환난 당했을 때, 인생의 한계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주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지금 67살인 할아버지가 64살인 과거 부인에게 소송한 사건입니다. 젊을 때 사업이 잘되어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버리고 바람을 피워 새장가를 갔다고 합니다. 아내는 이혼 위자료로 당진군의 임야 1400평과 개봉동의 대지 42평을 넘겨받았는데 이 것을 자본으로 잘 불려 몇백억대의 부자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남편은 사업도 망하고 새부인도 도망가고 알거지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20년 전 이혼할 때 땅을 넘겨준 것은 제 정신이 아니라 정신이 혼미해서 넘겨 준 것이니 무효라고 주장하며 돌려달라고 소송을 한 것입니다. 남편은 노숙자 신세로 나왔고 아내는 고급 외제 승용차(렉서스)를 타고 법정에 나왔답니다. 판사가 불쌍하니 4000만 원을 주라고 조정을 했답니다. 한 번에 목돈을 주면 원고가 다시 바람을 피워 탕진할지 모르니까 2년 동안 네 번으로 나눠서 1000만 원씩 주라고 했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구차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여호와께 돌아오면 멋진 인생이 펼쳐질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참으로 처철한 실패의 현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잃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습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 근본적으로 살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혼도 살고 이 땅의 인생살이도 살아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진정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당당시킨 것입니다. 믿습니까?

요나는 실패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대적인 부흥운동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간음하고 실패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므낫세를 보십시오. 12절을 보십시오. 저가 환난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 크게 겸비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회개한 것입니다. 삼권을 쥐고 있는 자신이 왕으로 최고인줄 알고 살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쯤은 55년 중 한 49년은 통치할 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징계 앞에 철저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존심이 있습니다. 자기를 지키고 방어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설사 잘못한 것이 있어도 시인하기를 꺼리고 남들이 모두 명명백백 잘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본인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왕은 환난의 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회개했습니다. 현재 모든 환난과 수치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을 인정하고 참되신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결국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잃었다해도 하나님을 만나면 그 실패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고 결과는 성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함께 산다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 가장 값진 것을 얻는 것입니다. 때로 실패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선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가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그 실패를 과정으로 삼아 80에 다시 시작하여 민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을 보십시오. 이들은 각각 애굽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왕들입니다. 모두 므낫세 이후의 왕들입니다. 이들에게 바벨론은 환난의 땅, 수치와 심판의 땅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환난을 만나도 겸비하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환난 앞에 무감각하였습니다. 므낫세는 죄의 무게로 말한다면 네 왕의 무게를 다 합한 것보다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바벨론 앞에서 크게 겸비하여 자기를 돌이켜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만나면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합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실패를 통해 훈련되고 실패를 통해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바벨론이 있습니까? 이 바벨론은 전화위복의 장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2)실패는 통해 기도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고 새 힘을 얻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12,13).
므낫세는 환난 앞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이 자신을 지켜 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이 따르는 신을 섬기면 나라도 부강하고 가정도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패망의 위기에 처하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갖은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 때 사람같으면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도 배신하고 처절하게 짓밟았는데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만들어 주십니다. 어떤 죄악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주님께 고하면 용서해 주시고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므낫세는 처절한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받으시고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실패의 늪 속에 있습니까? 영적으로 실패의 늪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육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실패의 늪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그 실패가 끝이 아니라 과정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한나를 보십시오. 결혼하여 실패의 현장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남편이 다른 여인을 얻어 새장가를 들었습니다. 브닌나가 아이를 낳고 한나를 괄시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것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의 현장을 기도의 현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실패는 기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능력의 아들 사무엘을 낳아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므낫세의 아버지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끝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과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생명을 연장받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실패의 현장에서도 어떤 환란의 현장에서도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 주시고 받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믿습니다.
실패를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만드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3)과거의 실패가 미래의 독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되게 하면 새 삶, 명품 인생이 펼쳐집니다(14-20).
므낫세의 삶은 처절한 실패 후 어떻게 되었습니다. 그 실패가 독이 되어 수치심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국민들 앞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만백성이 아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코를 꿰이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사람입니다. 12대 왕 아하스에 뒤지지 않는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파기한 사람입니다. 가장 오래 살면서 가장 나쁜짓은 다 골라 한 사람입니다. 남북 이스라엘 왕국을 통털어 최장기 통치한 왕입니다. 40년 통치를 한 왕이 넷, 52년 통치한 왕이 하나인데 이들은 보편적으로 선한 왕들입니다. 그런데 55년 간 최장기 통치를 한 므낫세가 12살 어릴 때부터 갖은 악을 저질렀습니다. 아들을 불태워 죽이고 온 나라에 역술을 장려하였습니다. 점치는 사람, 사술과 요술을 행하는 사람, 신접한 사람과 박수들을 요직에 앉혔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아버지가 기도하여 낳은 아들인데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일평생 수치로 마음 속에 간직하며 얼굴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폭력범으로 인터넷에 공개됩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언론에 나옵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만약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한다면 결국 실패가 결과가 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인생을 끝내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도 살인 방조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어디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가 독이 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거름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도 성폭력 범으로 참으로 얼굴 들고 살기 힘들 사람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과거가 독이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므낫세를 보십시오. 어쩌면 므낫세는 유다 왕 중에서는 가장 악한 왕으로 끝이 났을 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시 국방을 튼튼하게 합니다. 힘없는 백성의 나약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성전의 우상을 다 제거해 버립니다. 모든 우상을 성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을 명령합니다. 과거를 철저히 독이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불행한 과거, 실패한 과거를 거름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열왕의 사기에 기록될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왕궁의 묘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과거가 끝이 아니라 과정이 되게 하려면 과거를 독이 아니라 거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미래는 새로운 인생, 명품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명품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명품이 되게 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과거가 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과거를 거름으로 삼고 일어서면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참으로 값진 명품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값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영적 바벨론이 올 때가 있습니다. 육적 바벨론, 경제적 바벨론, 가정적인 바벨론, 국가적인 바벨론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과정에 불과합니다. 실패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정표이며 실패는 끝이 아니라 성공을 향한 과정입니다.

이 때가 아마 므낫세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까 60대 나이였을 것입니다. 공병호 박사께서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을 책을 썼습니다. 10년이면 명품인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중지능 이론의 창시자인 하버드 대학교의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심리학, 물리학, 회화, 음악, 시, 무용, 정치 분야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마사 그레이엄, 간디)을 연구한 결과를 『열정과 기질』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자들 역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기 전에 최소한 10년의 수련기를 거쳐야 했다. 물론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는 또 다른 10년 후에 다시 한 번 중대한 혁신을 이루었다. …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하게 되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체스터필드는 “최고의 인생”이라는 책에서 자기 안에서 '최고의 인생'을 찾는 과정이 바로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톡홀름 대학교의 앤더스 에릭슨 박사는 '10년 법칙'에서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와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년 정도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앤드류 카슨 박사는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 지속적이고 정교한 훈련을 최소한 10년 정도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샌더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KFC)의 창시자 그는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 때 학업을 중도 포기한 뒤 유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농장 잡일, 기차표 판매원, 군 입대, 보일러공으로 취직했습니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도 얻었지만 아내의 출산 소식과 함께 해고 통지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다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는데 불행하게도 그 사이에 아내는 그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는 보험 판매도 해보고 자동차 판매도 해 보고, 배를 사서 사업도 벌이고 주유소도 인수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납치라도 해볼 생각을 했지만 납치하는 일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는 어느새 퇴직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빈손으로 말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가출한 아내에게서 자신의 딸을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 그의 딸이 돌아왔고 그의 아내도 다시 돌아와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둥지를 털고 일어나 커다란 날갯짓을 시작하였습니다. 매월 나오는 105달러의 연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고, 어느덧 그의 사업은 크게 번창하여 88세가 되던 해, 마침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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