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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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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오늘은 온 세계 교회가 성찬을 기념하는 만국 성찬 주일입니다. 성찬을 기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구약 이사야 말씀에 장차 메시야는 어떤 모습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예언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에는 이사야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의 초점은 “예수는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에서, 마태복음에 와서 “이제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공용어로 세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하셨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의 전통 언어로 지금까지 유대인들만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그 다음으로 당시는 헬라 문화가 많이 전파되어 신약 성경 전체가 헬라어로 기록될 만큼 유대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입니다. 신명기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 그래서 아람어는 유대 백성들의 뿌리 언어가 되므로 계속 내려와서 예수님 시대에도 아람어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똑같은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아이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내가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노력을 많이 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말하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버림당하는 일입니다. 버림이란 쓰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큰 문젯거리 중에 하나가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입니다. 산업 사회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버리는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다가는 한반도가 온통 다 쓰레기장이 되겠다.” 이런 생각에서, “어떻게 하면 쓰레기를 줄일 것인가? 재활용을 하자. 그래서 우리가 좀 귀찮지만 매일 분리수거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라 전체가 쓰레기장이 되는 것을 면하자.”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가서 쓰레기 때문에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이것이 굉장히 큰 불행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뉴욕에서는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 대형 유조선 같은 큰 배에다 뉴욕 사람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산더미같이 싣고 이것을 어디다 갖다 버릴까 하는데,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주변에서는 “뉴욕 주변에서 만들어낸 쓰레기를 너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지 어디다 갖다 버리려고 하는 것이냐?” 아무 곳에서도 그 쓰레기를 받아주지 않아서 몇 달 동안 바다에 떠서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 오고가고 참으로 곤란해 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는 없어지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고아들이란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고아들이 얼마나 슬픈 삶을 살아야 됩니까? 버려져서 살아야 되니까 고난스럽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회의 비극은 노인 문제가 심각하게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지는 노인 문제가 사회 문제로 등장해서 자식들마저도 부모를 돌보지 않고 버려지는 그런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도 한국에 와서 몇 년 사니까 사회 유머도 좀 알 것 같고 재미난 이야기 하는 것도 잘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여기에 와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한참동안 애를 먹었는데, 남자들이 젊어서는 크게 쓰임 받고 살았는데 늙어지니까 별로 쓸데가 없어서 버림 당할까봐 이사 갈 때 자동차 먼저 올라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버림당하는 것은 최대 슬픔입니다. 국제 정치에 대한 뉴스를 보시면, 6자 회담이니 정상회담이니 제네바 회담이니 하면서 날마다 모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국제사회에서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려고 신경을 써가면서 회담하고 유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일생동안 영광스런 선택과 버려진 슬픔, 이 두 가지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같은 날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는가를 조명해보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려졌습니다. 출생은 마구간에서 되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만삭의 여인을 영접하는 곳이 하나도 없어 결국 짐승들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실력도 없고 돈도 없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상은 어느 나라나 임산부들은 인격 대우를 받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에서 보세요. 임산부나 노약자들이 앉도록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임산부들이 지하철을 타고 곤란한 일을 겪지 않도록 “여기는 임산부의 자리”라고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만약에 만삭된 여인이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특별대우해 줍니다. 제일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편안히 쉬라고 합니다. 승무원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온갖 서비스를 다해주고 어쩌다가 비행기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 그것은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선물을 주고 온갖 혜택을 다 주고 태어난 아기는 앞으로 얼마동안 비행기 탈 때 공짜로 타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서 그 항공사 비행기를 일평생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게 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 몸에서 사람이 출산하니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은 버려져서 날 때가 없어 마구간에서 출생하시는 버려진 일생으로 시작됩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여 버리라고 하는 헤롯의 절대 명령이 내려져서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애굽으로 가면 예수 피난 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피난 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념교회를 지어놨습니다.

또한,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이라는 버려진 빈민촌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곳이 고향이라고 말하면 일평생 출세에 지장을 받고 사는 그런 버려진 곳에서 예수님이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에도 “나사렛과 같은 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비판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지역에서 성장하셨으며 다 성장하신 이후에는 그 곳에서마저 버려져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슬픈 독백을 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나중에는 가족들에게마저 버림을 당하셔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출가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슬프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갈 곳이 없다.”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버림을 당하여 가야바 법정에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았고 나중에는 로마에 버림을 당하여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은혜를 가장 많이 베풀어준 유대인마저 예수를 버려 그들의 고함 소리에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마지막 12제자는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12제자마저도 성경의 기록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장 슬픈 버림이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예수님은 출생에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버림으로 시작해서 버림으로 끝이 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버림의 이유를 묻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답변이 무엇인가? 버려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버려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 “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너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이미 약속해 놓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버려짐이 나의 사역이다. 네가 책임 져야 할 일은 버려짐이다. 버려짐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 “그는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버려진 예수이십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즉, 예수가 버려지는 과정에서 인간적 외로움을 표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세 제자에게 오셔서 슬프게 간청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슬프고 고민스럽다. 나와 함께 시간을 좀 보내줄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 모두 몸이 너무 피곤해서 모두 잠들어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가 모두 다 떠날 때 예수님은 떠나는 군중들의 뒤를 바라보시며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도 가려느냐?”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기록입니다. 왜 버려졌는가?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인간 구원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됨의 자격을 교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나의 버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만약 너희 중에 누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짐이나 전토나 부모를 버리면” 이것이 버려짐의 진리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나를 위하여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교육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후로 나를 따르는 자는 이렇게 자신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진리!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다.” 이렇게 가르치신 겁니다.

LA에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밀집 지역에 밤 12시가 넘었는데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는 겁니다. “응애, 응애!”하고 우는데 주변의 아파트에서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니, 저 집의 엄마는 이렇게 한밤중에 아기를 달랠 것이지 저렇게 끊임없이 두세 시간을 계속 울어대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답답한 겁니다.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데이비스라고 하는 흑인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그는 한국 6·25전쟁 때 참전 용사입니다. 혼자 외로이 살고 있는 이 할아버지가 그치지 않는 아기 울음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더니 아무도 안 나옵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잠겨있질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는 겁니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없고 오직 그 아이를 몇 월 며칠 몇 시에 낳았다고 하는 종이 한 장과 함께 어린 아기가 끝없이 우는데 한국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난지 3일 되었습니다. 엄마가 버리고 간 겁니다. ‘이 쪽지를 써놓은 것을 보니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이비스 흑인 할아버지가 알지도 못하는 3일된 한국 어린 아기를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지금은 이 아기가 대학을 졸업한 나이가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한인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갈보리교회 오기 전까지 그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우리 한국사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는 당신은 한국의 은인이라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서 상처를 받아가며 싸워준 당신, 그리고 태어난 지 3일 만에 버려진 한국 아기를 데려다 고난을 겪으며 키워주셨으니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부끄럽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기 전까지 그의 생활비를 교회에서 지원해 준 일이 있었는데 제가 온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버려진다는 것은 가장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살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버려진 예수님을 기년하는 것이 바로 이 성찬 예식입니다. 이 떡과 잔을 받는 의미는 나를 위해서 버림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도 어느 때는 내 생애를 주님을 위해서 버릴 것을 약속하는 성례전! 어느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시간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물질도 좀 버려야할 때가 있고, 자존심도 버려야할 때가 있고, 청춘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나의 버려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그렇게 정하고 이 성찬의 떡과 잔을 받아 마시고 먹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도 어느 때는 주님을 위해서 이 아픔의 살을 뗄 수 있으며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는 결단의 각오로 이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영원히 이것을 기념하라. 그리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계획인 인간 구원을 위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버린 것 같이 너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릴 때 하나님의 계획인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몇 번을 이것을 기념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며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오늘 여러분에게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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