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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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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눅 15:11-24)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하고 담판을 하고, 떼를 써서 그 재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이, 자신의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잔소리나, 간섭이 없는 먼 나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화려한 외출이였고, 당당한 독립선언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의 초점은 이 둘째 아들의 떠나간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이야기는 결코 가출의 드라마가 아니라 귀향의 드라마 그리고 회심의 드라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의 일생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풍요함이 아니라 흉년이었습니다.
그것도 적당한 흉년이 아니라 큰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투자하여 증식할 풍요를 꿈꾸며,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자유를 위해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난한 자가 되었고, 돼지의 밥인 쥐엄 열매를 먹고 돼지를 치고 있는 노예의 자리로 전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나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 그리고 무한한 자유가 펼쳐지는 사랑을 꿈꾸며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뼈져리는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문학자 도스도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만 떠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자유를 잃었고, 사랑을 잃었고, 양심도 잃었고, 가치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떠나가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흉년입니다.
그래서 지금 먼 나라로 떠났던 이 아들은 큰 흉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그런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분은 계시지 않는지요?
그런데 이 흉년이 아버지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다시 말해서 이 아들은 자기의 처지,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양식이 많은가? 거긴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살고 있을 때, 누렸던 그 풍요함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더불어 있을 때, 그가 누렸던 그 따뜻한 안식을 생각해냈을 것이고, 또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을 때 자기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던 평화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 17절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는데, 직역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들은 먼 나라로 떠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 때,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실로 오래간만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틀림없이 “아버지를 떠나서 나는 살아갈 수 없는 자야”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생각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둘째 아들에게 찾아왔던 흉년은 오히려 기회였고, 축복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장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어떤 궁핍이나 고통이 때로는 변장된 축복일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흉년 때문에 집을 나간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돌아올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 흉년이 오히려 그에게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2.“왜 그는 돌아와야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러분, 이 아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그는 그 먼 나라를 떠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떠남의 출발이요, 액숀이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일어나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행동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내용은 그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그가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1: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생각만 하시겠습니까?
물론 생각은 인생의 전환점이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인생의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행동하여 일어나 불신앙의 자리를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그 분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고 돌아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3.“어떻게 그는 영접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20절을 한번 더 읽어 보실까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여기 “상거가 먼데”라는 말은 “거리가 먼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는 “거리”는 단순히 문자적인 거리일 뿐만이 아니라, 이 둘째 아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심리적인 거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둘째 아들이 “내가 얼마나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비웃고 살았는데, 그런 나를 아버지가 정말 받아 주실까?” 하는 자기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던, 그가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에 마음에 거리, 심리적인 그 공간의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누구를 보았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측은히 여겨 달려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들이 돌아오는 스토리 일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스토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영접하였습니까?
20절 마지막을 보면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그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정신없이 왔구나, 왔구나, 내 아들이 왔구나”하시면서, 계속해서 입을 맞추는 이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을 보여주는 완벽한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 가져오게 하여 누더기를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너는 이제 의롭다하시고 의에 새 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떻게 했습니까?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가락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락지는 새로운 언약의 표시로서 “너하고 나는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떨어져서는 안 될 사이야”하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새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 그를 회복시켜 주신 아버지,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던 그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심으로 돌아오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그 돌아오는 길에는 누구나 큰 장애물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지경으로 인생을 살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얼굴로 무슨 면목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하는 죄책감에 대한 죄의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책감이 없도록 미리 다 용서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그분이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와 형벌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준비하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길을 닦아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놓고, 당신에게 참된 행복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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