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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중설교와 개인의 회심 (행 2: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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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설교와 개인의 회심 (행 2:22-36)
   
    저는 이곳 도곡동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고 후원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나오고 캐나다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외국에서 15년을 살다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알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하다보면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알기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들을 알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장사하는 분이 사람들을 많이 알기 때문에 장사하는 게 아닙니다. 장사를 하다보면 사람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게 되는 사람이 진짜 단골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들 믿고 장사를 시작하다가 낭패 봅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들 믿고 목회 시작하다가 실패하는 목사님들 많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목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을 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보면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돼 있고 목사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돼 있고 교인들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날 설교할 때 그가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을 알아서 그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설교한 것이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완전히 남남인 사람들을 앞에 두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는데 그들도 베드로를 원래 알고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들도 믿음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는데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베드로의 양들, 교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의 역할이요, 설교의 위력이에요. 교인들이 믿음을 갖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설교하면 됩니다. 교인들이 축복받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설교하면 됩니다. 교인들이 병이 낫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설교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그것을 전하고 그리고 듣는 중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받기 원하면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축복을 받을만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또 은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은혜를 받을만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병에서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병 고침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병에서 나을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를 꿈꾸는 사람은 선교에 대한 전도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땅 끝까지 갈 수 있는 담대함과 믿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설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정식으로 탄생하는 오순절날 베드로가 성령 받고 설교함으로 그 설교를 들은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음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셨지만 성령의 은사가 임하였지만 그것으로 교회가 생긴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깨닫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믿고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고 믿음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설교가 이셨고 제자들도 다 설교가였고 과거에 기독교 신앙이 부흥하는 곳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설교가 있는 교회들이 있었고 그리고 신실한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유념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마찬가지에요. 성 어거스틴, 그는 뛰어난 신학자인 것뿐만 아니라 설교가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역인 마틴 루터, 뛰어난 학자요 동시에 설교가였습니다. 또 존 캘빈, 그도 설교자였지요. 영국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요한 웨슬리, 그는 새벽부터 설교한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조지 휫필드, 그리고 미국의 영적인 각성운동의 주인공이었던 요나단 에드워드, 또 찰스 휘니, D. L 무디, 빌리 선데이, 다 설교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이십 세기의 대표적인 부흥사요 설교가인 빌리 그레함 목사님도 설교자입니다. 설교가 살아있는 곳에 믿음이 살고 교회가 살고 부흥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설교가 쇠하면 믿음이 쇠하고 신앙이 쇠하고 교회가 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살아있어야 됩니다. 설교가 힘이 있어야 됩니다. 설교가들을 배출해야 됩니다. 설교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이십 일 세기든 일 세기든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문화적인 욕구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더 복잡해진다고 해서 설교가 필요 없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주저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프로그램으로 설교를 대체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셀 모임이든 제자모임이든 열린 예배든 구도자 예배든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마는 결코 그것들이 설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이 설교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프로그램 중심으로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이천년 전의 일이에요. 예수님의 목회하시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복잡한 테크닉이 있을 수도 없고 그런 시설도 없고 장소도 없고 노하우도 없지만 예수님은 성령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 가지를 주력하셨는데 첫째, 설교하는 일 -preaching, 두 번째는 가르치는 일 - teaching, 그리고 세 번째는 병자를 고치는 일 - healing. preaching, teaching, healing, 이것은 시설이 필요 없고 복잡한 메커니즘이 필요 없고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호숫가에서도 하고 산 위에서도 하고 집안에서도 하고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베드로가 한 일은 예수님 흉내 내고 설교한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가 성령 받고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일어나서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설교한 것입니다. 그의 설교한 내용은 이천년 전의 설교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100% 적용되는 것이고 100% 유효한 것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역자의 사역하는 방법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복음의 본질을 본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보면 그가 청중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설교를 마친 후에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서 물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 Brothers, what shall we do?’ 왜 그 질문을 했습니까? 왜냐하면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을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베드로는 무슨 말을 했느냐? 하나님이 행하신 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것,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 것,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으신 것 그것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 내용 중에 사람이 뭐를 해야 된다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긴 했는데 뭔가 응답을 했으면 좋겠는데 어떤 식으로 응답해야 될지 모르니까 물은 것입니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해서 그 날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생기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한 내용이 진짜 복음이에요. 이것이 진짜 복음적인 설교요, 복음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초신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처음 믿는 사람이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목사든 장로든 교황이든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믿는 사람이나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오래 믿은 사람에게는 율법을 전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처음 믿는 사람 불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오래 믿은 사람에게는 율법을 전해야 된다, 그게 아니에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저런 식으로 실패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려면 좀 더 도덕, 윤리, 그들의 의무, 책임 이런 것을 가르쳐야 되지 않겠느냐? 이론적으로는 맞습니다마는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복음이라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주님의 복음이에요. 사람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도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믿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오래 믿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 ’ 요즘에는 모든 이름 앞에 ‘이’자를 붙이지요. 이메일, 이카멀스, 이베이 이런 식으로 정말로 선견지명이 있는 회사가 이랜드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름을 제대로 지은 것이지요. 요즘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 복음은 - this gospel, 다른, 틀린, 희석된 복음이 아니고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뿐만이 아니고 사람을 감화시키고 사람을 치유하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어느 유수한 교회의 목사님의 아들이 책을 썼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평생 목사의 아들로 교회를 다니던 분인데 그 분이 책에서 고백하기를 자기는 어렸을 때 기독교는 코미디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거듭났어요. 그리고 과거에 자기가 왜 기독교가 코미디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자기가 과거에 교회를 다니면서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 세 가지를 지목했는데 첫째는 예배가 엔터테인먼트 화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예배는 지루하게 생각 할 테니까 그들을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된다고 교회마다 생각하는 것, 그것을 코미디라고 생각했고 둘째는 교회에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업하는 것처럼 요즘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그들의 욕구를 알고 수요를 알고 교회가 그것을 채워주는 방법으로 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 하는 어떤 마케팅 방법을 도입하고 의지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심리학을 설교하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만 가지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심리학적인 이론을 도입해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사람들이 은혜도 받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서 하는 말이 ‘그게 사람 은혜 받는 거라면 차라리 설교 듣지 말고 브라이언 트레이시 라든가 코비라든가 그런 강연 들으면 사람들 은혜 받겠다. 얼마나 복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면 그런 다른 외부의 이론을 빌려와서 그런 것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심리학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지목했는데 정말 맞는 지적입니다. 요즘 설교들 들어보면 그 설교의 내용이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교회 다니고 믿어서 얼마만큼 자기 개발을 할 수 있느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 이런 내용으로 설교하는 데가 많지요.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사람들의 필요, 수요, 심리학적인 고민 이런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사람이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행위, 예수님의 이벤트, 예수님의 사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냐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 믿는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유효합니다. 할렐루야! 여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구원을 주고 그들을 건질 수 있는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의지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지 않습니까? 율법은 ‘여러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누가 몰라요? 사랑해야 되는지 누가 몰라요? 안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사랑해야 됩니다!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누가 모릅니까? 그건 율법입니다. 그럼 복음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처음 믿는 사람도 그것을 들어야 됩니다. 오래 믿고 자기가 변화되지 않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도 그것을 들어야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오순절날 첫 설교하면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분이 뭘 해야 되는지,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초점은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설교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 당연히 여기에 따르는 결론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믿음은 행위로써의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어라!’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사람 바라보던 사람들이 여기에는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이루셨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유일한 기쁜 소식이에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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