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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마무리 (창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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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마무리 (창 23:1-20)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23장에서 실질적으로 마무리 됩니다. 24장과 25장에도 잠깐 등장하지만 중심인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1-2절에서만 짧게 언급되고, 나머지 구절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구입하는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성경이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겠지요. 오늘은 그 의미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생의 마무리와 관련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매장지 구입할 때 헷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 말했습니다(4).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평생을 ‘나그네’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4대 후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5:16). 가나안 땅의 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부여된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소유를 위해 애쓰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며 살았습니다(히 11:13). 그들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기록합니다(히 11:16).

사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아무리 안정된 직장이 있고 가정이 있을지라도 이 세상을 영원한 거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이요 나그네라는 심정으로 살게 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며,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여 집착하거나 욕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요일 2:15). 만약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밤낮 애쓰는 삶을 살았다면 성경의 평가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하나님 말씀을 믿고 복 받은 말년을 보냈다고 평가할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몇 마디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사명을 명확하게 깨달았고, 그것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을 세웠으며, 일생토록 일관되게 그 사명의 분량 안에서 행하였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소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삶에 태만하지 않고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 대해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6). 그들은 존경하는 아브라함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기 원했습니다(6, 11, 1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계속 해서 이곳저곳 장막을 옮기며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22:19절에서는 브엘세바에 거했었는데, 23:2절에서는 헤브론에 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2). 사라가 죽기까지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삶이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고 해서 대충, 가볍게 살지 않았습니다. 뜨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방백답게 처신하며 살았고, 주변 사람에게조차 그러한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신중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완성된 천국의 삶을 위한 예행 연습장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주님의 재림까지 지루하게 기다리고만 있는 갑갑한 시간의 연속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의 시간이라면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참으로 무의미한 동시에 무가치한 것이며, 장수라는 것도 결코 복이 될 수 없겠지요. 성도란 저 하늘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 백성이 되는 준비생이 아닙니다. 성도란 이 땅에서 이미 천국 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잠깐 만나고 헤어질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응대해야 할 사람입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도 하나님 백성답게 말해야 할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사람이 되고픈 소망 때문에, 모든 순간에 조용히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매장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삶의 한 단면에서 그 모습의 실례를 볼 수 있습니다. 7절에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라는 말씀이 있고, 12절에도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존경을 받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그 땅 지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땅 백성들에게조차 몸을 굽힐 정도였다는 것은, 그의 겸손이 정치적인 쇼맨십이 아니라 몸에 배인 것임을 말해줍니다. 가나안 땅은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았다는 것도, 그가 얄팍한 처세술로써 겸손을 가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굵직한 문제들에 대해서만 하나님 백성답게 처신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내의 매장지를 구입하는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처신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의 말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불신자가 평가한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전혀 ‘무례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서 남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위협적인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은 누구라도 존경을 표현할 만했습니다. 가능한 호의를 베풀어 주고 싶을 만큼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이 종교적으로 유별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답게 처신했다는 것은 그의 경제생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헷 족속뿐만 아니라 땅 주인인 에브론 역시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를 무상으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6, 11). 이 때 아브라함은 ‘이야! 내가 이제껏 하나님 백성답게 살았더니 공짜로 땅이 생기는 구나. 하나님 은혜로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 주인이 “준가를 받고” 팔기를 원합니다(9). 공짜로 주겠다는 것도 만류하면서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라고 했습니다(13). 가나안 생활 초기에도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재물을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모든 불신자들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애굽 왕이나 그랄 왕이 준 재물들은 거절하지 않고 받았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불신자들의 호의일지라도 잘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가려질 수 있다고 판단되면 단호하게 혹은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한 신중함 없이 공짜라고 덥석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헷 족속은 400여년 후에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 추방될 족속입니다. 그들이 지금은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약속으로 주셨다는 증거를 남겨놓기 원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내의 무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후손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이러한 역사의식 때문에 아브라함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땅을 구입하려 했습니다. 또한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거래하지 않고, “그 땅 백성의 듣는”(13) 곳에서, 곧 공개적으로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18) 소유권을 이전 받았습니다.

가끔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제 자신이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공의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이와 함께 가끔 ‘경제적 이권 앞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유익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강하게 혹은 하나님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돈의 힘은 양심의 소리도 억누를 수 있고, 인륜도 저버리게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 돈 앞에서 원칙과 소신을 버린 채 무릎을 꿇기도 하고, 돈 때문에 자존심과 명예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평생을 존경 받던 인물이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돈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돈은 인간 세상에서 강하게 역사하는 ‘돈 신’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 앞에서는 성도이더라도 돈 앞에서 불신자와 다름없다면 과연 하나님 백성답다 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게 됩니다. 돈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고서는 참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유명한 옛 설교자의 지적은, 그것이 헌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한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가 평가해 볼 수는 있지만 남이 평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이권 앞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체 평가보다 타인의 평가가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왔다고 착각했던 사람이, 막상 경제적 이권 앞에서 그동안 자기를 움직여 온 것이 돈의 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에게 던져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아브라함을 움직였던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가슴 속에 품고 살았던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그 나라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도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역사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와 같이 평가 되게 하실 것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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