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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행 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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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행 23:1~11)

똑같은 상황에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혜로워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격려의 말을 할 때도 어떤 태도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힘이 될 수도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을 바로 잡아 줄 때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미안해하며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할 수도 있고 오히려 미안은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 한 마디도 그리고 표정 하나도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내 딴엔 상대방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상처만 안겨줄 때가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딴엔 말씀 따라 기쁨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왜 그렇게 모든 것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은지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상처가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안겨줄 때 그 마음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겠죠. 그런데 무슨 일을 그렇게 하냐고 비난이라도 쏟아지게 되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격려하고 붙들어주어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인데 거기에다 대고 “잘 하네 못 하네 마음에 드네, 안 드네.” 한다면 어찌 한 걸음인들 더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지혜롭게 처신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그런 바울을 격려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은 철저히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 공의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순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은 겉만 하얗게 회칠한 벽과 같소. 당신은 율법대로 나를 재판한다고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스스로는 율법을 어겨 가며 나를 치라고 말할 수 있소?”
그러니까 바울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감히 욕할 수 있소?”
그때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형제 여러분, 나는 그 사람이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성경에도 이르기를 ‘네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이 비난해 마땅한 말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나가는 입장에서 오히려 율법을 어겨 가며 바울을 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곧바로 사과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네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방 여인을 후처로 들였을 때 그 형제가 되는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합니다. 물론 이방 여인이라고는 해도 광야까지 따라온 것을 볼 때 그 여인은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방 사람이라고 해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대우했던 당시의 풍습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심하게 비난받을 일만도 아닙니다. 물론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이방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인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지 이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방 여인까지도 외면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모세는 내 종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내가 다룰 일이지 너희가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잘못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니 그들에게 문둥병이 들어 진 밖으로 내쳐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빌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화를 내셨습니까? 모세를 비난하는 것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잘못했다고 해도 그 잘잘못을 따질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단지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 인도하는 대로 따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두 번씩이나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 하나 대지를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내가 손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다윗을 위대한 지도자로 이스라엘에 세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택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세운 주의 종들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섬겨야 하는지를 여기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아나니아가 잘못을 했지만 그러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비록 자기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던 그 사람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그래도 그를 비난한 것을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를 깨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요 동시에 끝까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해야 된다는 것과 같은 뜻도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매우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 화를 내신다고 하면 내게 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내게 해로운 일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 역시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지금 유대 공의회 앞에 서서 증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말씀도 그들의 귀에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증거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먼저 깨고 들어간다면 어찌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사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 질서를 따라 목회자와 장로에게 순복하여야 하고 또한 장로님들 역시 그 질서를 따라 목회자에게 순복하야만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말씀 안에서 목회자에게 순복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깨우쳐 바로 세우실 것이요 그로 인해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순복하는 모든 이들이들도 더 은혜와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은혜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오늘 저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아주 지혜롭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 공의화가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바울은 지금 증거할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쉽지 않은 기회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공의회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개파 사람이었고 일부는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며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처음에는 모두가 다 바울을 비난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며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이요 나는 지금 죽은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 마디를 하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공의회 의원들이 나뉘었습니다. 그것은 사두개파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으며 천사나 영도 없다고 주장한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장 그들 가운데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천사나 영이 이 사람을 시켜서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고 바울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울을 대적해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덕분에 바울은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고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툼이 점점 심각해지자, 천부장은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의 몸이 찢겨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내려가서 강제로라도 바울을 군중들 손에서 빼내어 병영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보는 바울과 같은 지혜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나를 대적하고 비난하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항상 먼저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하게 되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내 뜻을 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먼저 그 마음이 상하게 되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마음이 닫히게 되면 무슨 말을 한들 그 말이 들려지겠습니까? 오히려 반발만 가져오고 말겠죠.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수습하기조차 쉽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좋은 뜻으로 시작했던 일도 오히려 안 함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다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도록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그것이 덕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와 함께 하든 그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서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고 피치 못해 말을 하게 될 경우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달래가며 말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일을 해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지혜도 또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좋았던 기분도 다 상하게 만들어 놓고 하라고 하면 누군들 그것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상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찌 좋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그 사람이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이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모든 것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성령께서 바울의 사역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바울은 죽기를 각오한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분위기가 험악하다고 해도 그래서 그로 인해서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움츠러들 바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힘든 일이 계속되게 될 때 어려움이 계속해서 닥쳐오게 될 때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어려운 세월들을 잘 지내옵니다. 꿋꿋하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 물리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큰 비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세벨 왕비가 이를 듣고는 ‘엘리야 내가 꼭 죽이고 말거야’ 하고 외쳤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만 힘이 쭉 빠져서 광야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세요”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해 주시며 엘리야를 다독거려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충성하는 바울이지만 그냥 지쳐 쓰러지도록 버려두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을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여야 한다.”
그것은 곧 네가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할 수 있도록 그 길을 내가 지켜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바울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주춤거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오히려 더욱 반발하고 대적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주저주저 합니다. 다른 말은 쉽게 잘 하면서도 예수 이야기는 입 밖에 내는 것조차도 힘들어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흠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나에게 상대방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어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분명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면서 주신 말씀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또한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힘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니 악한 자가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했는데 더 이상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하려니까 힘들고 두렵고 한 것이지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한다면 두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입을 열면 되는 것입니다.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대답할 말도 더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로마 군대의 보호아래 결국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과도 함께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셨던 약속입니다. 그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만 믿고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늘을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그 무엇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는다고 해도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해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변치 않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 약속을 따라 날마다 이기고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곧 우리들이 가까이는 우리의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는 세상 끝에 있는 사람까지도 다 우리가 증거하여야 할 대상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기회가 있든지 없든지 항상 예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가 나를 보더라도 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런 사랑의 사람, 은혜의 사람으로서 날마다 살아가야 할 것이요 이를 위해 더욱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내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 되고 모두가 다 함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베풀어나가고 섬겨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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