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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를 맺으십시오!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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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3장 6절~9절
제목 : 열매를 맺으십시오!

1. 결실의 계절

요즘 산에 가면 조용한 숲 속에서 “딱”하는 소리와 풀섶으로 작은 것들이 구르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면, 다람쥐보다 더 쉽게 만날 수 있는 청솔들이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를 따다가 떨어뜨려서 나는 소리이거나 혹은 도토리가 저절로 떨어져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토리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딱 떼구르르”로 들리는 것이죠. 그 외에도 하얀 때죽나무 열매와 빨간 것들이 자잘하게 많이 달린 백당나무 열매, 산수유 열매, 조금 깊은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자라는 으름 등이 가을 산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도 ‘올 한 해 그냥 살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는 듯이 제각각 열매를 맺고서 의기양양하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을산야의 풀들과 나무들, 그리고 그 열매를 바라보다가, 문득 홀로 열매도 없이 그 가운데 서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과 들의 생명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저마다의 열매를 맺어서 그것을 두 손에 담아 하늘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데, 유독 만물의 으뜸이라는 우리 인생들만이 별 열매 없이 가을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이것은 저만 하는 생각입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2. 열매 없음에 대한 경고

오늘 본문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갈릴리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1~3)

비교적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초창기일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 두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아주 놀랄만한 한 사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린 것은 빌라도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대한 것으로서, 이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의하여 살해되고 그들의 피가 그들이 드리던 제물에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빌라도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만 10년을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들을 강하게 억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특히 로마에 반대하는 열심당원들을 색출하여 처형했는데, 그가 36년에 로마로 소환된 이유는 피지배국민들을 너무나 강력하게 억눌렀고, 그것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한 것은 유대인들의 명절인 수전절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지내고, 또 거기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온 갈릴리 사람들이 평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해왔던 갈릴리 지방의 반로마주의자 즉 독립운동을 벌리던 열심당원들이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일 것으로 오해하여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이 명절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와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것을 초기에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주님께 말씀드리는 사람들의 의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빌라도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이 사건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의도한 바는, ‘빌라도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그렇게 희생당할 만한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희생자들은 매우 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손을 빌어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었다는 말을 하고자 이 사건을 예수님께 고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인간사를 인과응보적으로 보았습니다. 즉 불행과 재난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 ”죽을 짓을 했으니 죽지!“ 그러면서 이 말을 전하는 자신들은 불행이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상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대로 그 사람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불행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들과 이 말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역시 죄인이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화를 당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회개란 ‘죄에 대한 뼈저린 후회, 몸살보다 더 지독한 고통, 얼굴을 들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수치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되리라는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결단’을 말합니다. 즉 참된 회개는 지난 삶이 대부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였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하고, 나아가 자신의 생활과 인격을 바꾸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1절부터 3절에서 ‘갈릴리 살인 사건’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너희들도 역시 망하리라”는 경고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에 걸맞는 삶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4~5)

갈릴리 사람들의 비참한 죽음을 들으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최근에 일어났던 다른 사건 하나를 언급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인위적이고 고의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충분히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할 수 있었지만, 4절부터 6절에 소개된 경우는 그와는 또 다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자연적인 재난과 관계되는 것으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실로암 망대는 예루살렘 성의 동남편 성 밖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실로암 연못이 있었으며, 기혼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그리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실로암 못가의 성벽은 남쪽으로 굽어져 있으며, 이것이 오랜 세월에 의해 점점 파손되었고, 지하로 스며든 물에 의해 지반이 약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려 18명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을 당한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이 그야말로 하늘의 진노를 샀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인과응보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이 사건으로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자연 재해로 인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유독 그 사람들에게만 이런 사고가 생겨서 죽는다는 말입니까? ‘평소에 잘 살았으면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아마 여러분들도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죽어간 사람들, 불의의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다른 사람이 저지른 실수로 사고사한 사람들에 대해서 들으면서, 그들에게 뭔지는 모르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 불의의 재난이 그 사람들이 범죄자이기 때문에 징벌의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다시 한 번 듣는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지금 주님 곁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죽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니 어쩌면 그렇게 죽은 그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된 회개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가혹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 이 땅에서는 혹 불행이나 재난을 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재난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나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가? 만약 내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나에게도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죄를 지으면 다 이렇게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불행을 듣는 자는 그 불행으로 자신과 자신이 맺어야 하는 삶의 열매를 살피는 교훈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3. 열매 맺는 삶, 성도의 존재 이유

이러한 두 가지 사건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은 6절부터 9절에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을 가진 한 사람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주인과 과수원을 책임진 농부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받으면서 포도원에서 3번의 가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말에 의하면 지난 3년 동안 매년 가을마다 열매를 구한 주인은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린 묘목을 심을 경우에는 3년이면 열매가 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다 자란 나무를 옮겨심을 경우에는 바로 그해부터 열매가 열리더라구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어린 묘목을 심었다기보다는 다 자란 나무를 옮겨 심은 경우입니다. 주인이 “내가 3년을 와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비유로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포도원 밖에 있다가 구원의 포도원으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고 본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열매를 맺는 것은 곧바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무화과나무에게는 3년이라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3년 동안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가망이 없는 나무로 판정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은 열매를 맺지 못할뿐더러, 다른 식물을 위해서나 다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더욱이 강한 뿌리로 다른 식물에게 필요한 물이나 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이 악한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다시 한 번 주인에게 인내를 간청하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부탁합니다. ‘햇볕이 잘 들게 하고, 비를 잘 맞도록 하고, 또 나무 주위를 파서 흙을 부드럽게 하고, 거름을 주어 토양을 기름지게 해볼 테니 한 해만 더 기다려보자’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되, 그래도 안 되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빌라도가 사람을 죽인 사건과 망대가 무너져 깔려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신학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두 사건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살해당한 일’과 ‘실로암 망대 붕괴로 인한 죽음’이 무화과나무 비유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당시 청중들과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이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느냐?” 열매가 없는 나무는 ‘쓸모없는 나무(good for nothing)’이듯이, 하나님께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 역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참 회개’란 자신의 과거와 죄를 회개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삶의 봄과 여름을 보낸 지금 여러분의 열매는 무엇이며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에게서 열매를 구하시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시렵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 맺게 될 열매는 아주 많습니다. 기도, 봉사, 구제, 전도, 찬양의 열매 등 ․․․. ‘나는 맺을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나무입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보면서 거기서 여러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은 사람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찍혀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것처럼,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그와 같은 상태는 아닌지 돌아보아서 각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는 특별한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삶, 아니 굳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삶과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이 여러분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부분에서 우리에게 한 가지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 “조금만 더 그대로 두소서"라고 애원하는 과원지기의 간구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지난 삶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가을을 맞은 것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인내하심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기회가 언제까지나 계속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시만, 그 인내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늑장을 부리는 동안, 기회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지 않아도 맺을 수 있는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 당장 헌신하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4.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열매를 맺어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드리고 있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시기에 여러분은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할 때에 받게 될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열매맺지 못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씀을 듣고 열매 맺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주어진 시간과 기회와 사람과 달란트와 자원을 낭비한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그 사랑을 알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남은 시간, 그리고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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