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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 (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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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요 3:1-15)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당대에 유대교의 여러 계파 중 가장 두드러진 계파였던 바리새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리새파 중에서도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던 무리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 먼저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본문 2절) 했습니다.

본문보다 앞서는 2:23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를 믿었다고 합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어떤 놀라운 이적기사를 의미하고,
둘째는 꼭 기적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떤 상징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니고데모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에 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일단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들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 짐승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동 때문에 다른 바리새인들은 거부감을 느끼고 반발하며 항변했지만 그는 오히려 예수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오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는 훗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바르게 처리되게 하기도 했습니다(요19:39-40). 끝까지 예수님께 호의를 표한 것입니다. 그는 또 “유대인의 지도자”(본문 1절)요 “선생”(본문 10절)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라 한 것은 그가 유대인을 다스리는 협의기구의 구성원 중 하나였음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내부문제에 관해서는 산헤드린이 자율권을 가진 최고의 통치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니고데모는 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할 만큼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유대인이었고 점잖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으로부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말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꾸하신 것입니다(본문 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한 말하고는 상관없는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종종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 하시는 것 같아도 오히려 곧바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말”에 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에 답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싶어한 것은 사실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확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그 속생각을 꿰뚫어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셔서 그가 궁금해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시며 부정적인 대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배교하거나 어떤 명백한 죄를 범하지만 않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게다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한다고 말하면 자기가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보다 확실한 답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내심 품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인데 그런 그의 기대가 단번에 깨지고 만 것입니다.

  분명 실망하고 당황해했을 니고데모에게서 나온 질문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본문 4절). 이 질문이야말로 유대인의 지도자요 선생이라 하는 사람의 질문치고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황당한 질문입니다. 의외로 낮은 그의 지적, 영적 수준을 폭로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에 대해 점잖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본문 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육신적인 거듭남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이라고 진지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물로 태어남과 성령으로 태어남이라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적 태어남과 구별되는 영적 태어남 한 가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영적 태어남은 물로 깨끗이 씻듯이 우리가 죄의 사하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의 사하심을 받는 것은 오직 참된 믿음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고 그 참된 믿음을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태어남이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본질적 의미는 영적으로 태어남에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고 새 사람 되는 것이 거듭남이며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하드라도 그것이 육신적인 태어남이라 하면 그 다시 태어남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이루어주지 못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무리 두 번 세 번을 거듭날 수 있다 해도 그 거듭남이 영적 거듭남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하신 것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뜻의 거듭남이라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지와 혼란스러움이 가중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그런 거듭남이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자문하면서도 부끄러워서 차마 예수님께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본문 7-8절입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성령의 역사로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듣고 나서야 니고데모는 속에 갖고 있던 질문을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그러나 이 물음의 형식적 의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거듭남이 가능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따라서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새삼 질문하는 니고데모가 속에서 갖고 있던 진짜 질문은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다 아십니까? 당신의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니고데모의 이 질문과 함께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즉 요한복음에서의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주제인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다시 하신 대답이 본문 10-15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대답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근거는 바로 인자가 들린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배역죄로 말미암아 다 죽게 된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려 일으키심을 받으셨으며 하늘 아버지께로 들어 올려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남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던 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하늘의 진리와 구원의 진리를 친히 다 알고 계신 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직접 다 아시기에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장에서 이미 밝힌 사실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7-18절)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오직 그의 말씀을 따라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옛날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마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뱀에 많은 사람이 물려 죽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뱀에 물린 사람이 누구든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높이 들어 올린 불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민21:4-9).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배역죄로 다 사탄의 죽음의 권세 아래 놓였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우리는 그저 그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없이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14-15절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말씀이 그 요약이고 결론입니다. 여기서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부활과 승천을 뜻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의미는 민21:4-9의 불뱀과 장대 위에 들린 놋뱀 사건에서, 후자의 의미는 사52:13-15에서 그 근거를 발견합니다. 이사야서를 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52:13-15).

  오늘 본문은 거듭남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거듭남이란 삶의 새로운 시작이고 결정적인 내적 변화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고 갈6:15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한 것과 같은 바로 그 새로운 창조와 같은 것입니다. 거듭남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습니다. 그를 믿고 그만을 바라볼 줄 아는 데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확실히 믿는 데 있습니다. 그 믿음 없이는 아무리 지식과 교양과 도덕적 뛰어남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호의적 태도를 가져도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뛰어난 랍비나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알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의 요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혹 어떤 신앙적 이해의 변화를 경험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대로의 그런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대하는 것으로 그치는 신자들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가 가졌던 것과 같은 예수님에 대한 어떤 호감이나 점잖은 태도가 결코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거듭남과 새로운 삶의 근거입니다. 오랫동안 점잖게 교회 다니면서도 니고데모처럼 영적 진리의 말씀에 대해 지극히 유치하고 천박한 질문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신자가 되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그저 막연히 한 훌륭한 인간으로 존경하는 교양인으로 남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인간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영원하신 주로 굳게 믿고 오직 그만을 바라보며 그를 가까이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의 의미와 목표와 기쁨과 방식이 온전히 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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