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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떡 몇개나 있느냐 (막 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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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떡 몇개나 있느냐 (막 6:34-44) 

우리는 삶의 길을 가다보면 의외로 생각보다 자주 어려움을 겪습니다.
잘 되는 것 같다가도 하루아침에 재앙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믿었던 우리 자신까지도 마치 배신을 하듯 스스로에게 마땅치 않은 일을 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깨닫고, 인간을 깨닫고, 삶의 상황을 깨달아가며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으로 완성되어져 갑니다.

이러한 관점을 보면 모든 사물과 사항, 그리고 사람과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일어나고 만나지는 모든 일과 사람과 사항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 바로 이러한 면이 가장 먼저 다가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이해와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십니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인생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죽을 인생들이 가엾어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살리셔야 할 대상으로 우리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디를 가든 귀신을 쫒고, 병을 고쳐주셨고, 눈물 흘리는 자를 위로하여 주셨고, 배고픈 자는 먹이셨고, 슬픈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소망과 기대할 수 있는 바를 허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을 위해서, 또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주님의 세력을 확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과 은혜가 더욱 더 넓은 범위 속에 펼쳐지기를 원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끔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그것이 일로써 끝나지 않아야 할 이유와 같습니다. 이런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발로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경이 확장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세계는 평가와 판단에 익숙하고 비교와 빼어남이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이해와 사랑의 눈길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하는 이와 같은 내용들도 결국은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펼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수레바퀴에 치어서 자비와 사랑은커녕 우리자신조차 유지 못하고, 살아가기에 전전긍긍한 인생으로 살다가 어느 날 정처 없이 왔던 인생길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변에 몰려왔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또 그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볼 때 또 그것을 가엾이 여기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그들을 먹이시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우리육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자비와 사랑의 눈길로 다가오셔서 우리 영혼과 육신을 감싸고 계심을 봅니다.
오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니까 너무나 안됐고 가엾었어요. 그래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때가되매 그들이 배가 고파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그들이 안 되어서 뭔가 먹을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말하니 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서 먹이리이까’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200데나리온은 장정의 200일분의 임금입니다. 그러니 요즘으로 따지면 상당히 많은 돈, 한 열 달치쯤 월급이 되겠지요. 굉장히 많은 돈이겠지요. 그러니까 그걸 사면 좀 나누어 먹일 수 있는데 첫째는 돈도 없고, 두 번째는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어야 될 떡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다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그들을 뻔히 아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들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할 때 먹을 것을 도저히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말을 하신 이유는 결국 예수님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을 미리 머릿속에 그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도전하십니다.
“도대체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예, 우리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전부 찾아서 가져오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여 나누어 주십니다. 또 나누어주실 뿐 아니라 다 나누어주고 남은 것에 대해서 또 거두어서 보관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은혜가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다시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크기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이루고, 인간들은 계산으로 어떤 일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 생각과 한계가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능력이 계셨던 것입니다. 먼저 마음의 근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몰려올 때 그들을 사랑과 자비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심정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선생님이 그냥 말씀 한마디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만약에 이러면 정말 우리 선생님이 큰 나라를 얻게 되면 우리도 그 나라에 한 가지 하겠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그들은 마음이 뿌듯했을 겁니다. 자랑스러웠고 뭔가 보람이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볼 때 자비와 연민과 사랑과 애달픔이었단 말입니다.
저 소망 없는 사람들, 가엾은 백성들, 내가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천국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고, 그들이 배고파 하셨을 때 그들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싶어 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진행될 때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발로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인간의 일로 끝내고 말게 됩니다. 결코 우리는 당당한 사람들이지만 당당하게 살아갈 뿐 아니라 진정한 섬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내가 어떤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 우리가 뻐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계셨던 근본적인 마음은 오늘 <34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주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또 주님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능력의 차이로 인한 생각과 방법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능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 중에 능력이 결국 우리의 생각까지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달라지면 능력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능력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능력을 준비하여 우리의 생각조차를 확실하게 지지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빨리 서현역까지 다녀오십시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걸어서 갔다 와야 됩니다. "이거 뛰어 갔다 와도 30분 내에 갔다 오기 힘들 텐데." 이렇게 얘기하면 상당히 먼 거리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동차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예,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말하면 믿음의 능력이 아닙니까?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그것이 내게 어떤 능력으로 와 닿는가 하는 겁니다.
구원의 능력,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능력, 뿐만 아니라 내 생활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내 생활의 구원을 통한 자신감과 인내할 수 있음과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이와 같은 믿음의 능력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의 능력과 우리의 능력이 달라요. 지난주에 말씀드렸지요. 사람들은 죽었다고 어린소녀에 대하여 얘기하는데 예수님은 그 회당장인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왜죠?
능력의 차이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죽은 건데 예수님이 볼 때는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계시니까 그것은 자는 것에 불과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능력과 이 제자들의 능력이 틀렸습니다.

제자들은 떡을 사다줄 수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그게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도 못했던 방법을 예수님은 실행할 수 있고 그 실행에 대한 생각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분이었으니 생각하는 바가 틀린 겁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줄 수가 없는데요?”
여기에는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능력이 차이가 나니까 생각도 차이가 나고, 방법도 차이가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방법과 주님의 능력으로 인한 새로운 방법의 차이를 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 제한된 인간의 능력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우리를 뛰어넘는 능력으로 나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남을 도울 수 있는 여건과 형편이 못됩니다. 능력도 안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돕는단 말입니다. 왜죠? 그 사람의 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 자비와 사랑의 심정이 있으니
도무지 다른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형편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겁니다.
전에는 우리가 별 특별한 일이 없는 사람인데 주님을 사랑하다보니 없는 능력이 생기고, 없는 꿈도 생기고, 없는 사랑도 생기게 됩니다.
접근 방법의 차이입니다.
“무엇을 사먹게 하소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200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먹이리이까”
근본적으로 접근 방법이 틀렸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뭔가 사다 먹이는 것 밖에, 돈과 떡이라는 물건 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기적과 사랑의 역사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능력으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믿음에 익숙해지면 주님의 뜻하시는 바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연단하시고 능력을 갖추어주시기 위함이야. 이만큼 기도했는데도 안 되면 조금 더 기도하면 되겠지. 또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흘러가겠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또 아는 것은 뭐죠?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 결국 주님의 뜻에 대해서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주님의 뜻이라도 나는 순종하겠다.’하는 마음의 믿음의 결정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어떤 일을 하셔도, 어떻게 행하셔도, 어떤 결과를 주셔도 내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틀릴 때 인간들은 답답해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주님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문제는 그 조금을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이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무한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혀주기 위하여 각종 은혜의 방법을 동원하십니다. 전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용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실수를 통해서, 허물을 통해서, 무능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하고 인간들을 깨닫고 이해하게 하십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해의 폭이 언제 넓어졌지요?
우리의 인생의 어떤 일이 잘돼서 감사해서 넓어졌던가요?
내가 실수하고 실패함으로 내가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나에 대한 부끄러운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히려 남들을 이해하지 않습니까?
정말 내가 ‘나도 이렇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남을 이해하는 겁니다.
‘나도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과정이 아닙니까?

때로는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는 더 자비로워지고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는 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고 사람들을 더욱 더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가 생각해요.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의 고리가 잘됨을 통해서 오기도 하지만 우리의 부족과 연약과 안 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깨달아지기도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요즘 주어진 어떤 일을 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가, 누가 그 능력이 있는가, 누가 좀 낫는가, 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겠지만 점점 생각이 이렇게 바뀌는 것 같습니다.
누가 그 일에 가장 절실한가? 누가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겸손한가? 누가 진실히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가?
누가 더 멀리보고 인내하고 자신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가?
결국 그것이 최종적인 결과에 더 유익하더라고요.
인간에 대한 이해요.
무슨 일과 무슨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것은 다 이해받아야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이해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이해인 것을 생각합니다.
나하고 다르다고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고 이해 무엇이 다를까, 무엇이 옳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할까?
내가 그것이 틀리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인정하고 내가 따르는 것이 더 유익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금 내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수 있는가 생각하면 우리는 또 한 번 우리자신의 주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 능력과 주님이 능력에서의 차이, 그것으로 인한 방법의 차이, 또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근원의 차이에서 우리는 주님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내 자신의 한계와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생각하고 원하시는 것에 따라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해결방법입니다.
도대체 구체적인 해결방법으로 주님은 무엇을 행하셨을까?
기적 중에도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생각할까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기적을 이루었으니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음 속에 우리는 또 무엇을 볼 것인가?
‘너희 떡 몇 개나 있느냐’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주님은 물어보셨습니다. 그들에게 떡으로 해결해주어야 될 텐데 주님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 아니면 얼마나 떡을 사올 수 있도록 준비가 됐느냐? 라고 묻지 않고 주님은 너희가 가진 떡이 얼마냐라고 물어봤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항상 “예, 뭐가 얼마나 필요하고 어떤 게 있어야 되고 뭐가 언제까지 무슨 준비가 돼야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한단 말입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고, 사람이 얼마나 필요하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 재주와 능력이 얼마나 필요합니다.’라고 우리는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뭘 할 줄 아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네가 헌신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라고 우리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여쭤보시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서 부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불씨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우리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는 피할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려면 시험하실 필요 없이 번개로 한 번 치면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당하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고통당하면 하나님의 즐거움이 아닐 텐데 하나님의 기쁨이라면 지금 내게 고통당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을 합니다.

오늘 주님을 보니 주님은 아무것도 없어서 난감한 지경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 가진 것이 몇 개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뭐 가지고 있습니까?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 우선 시작하고 진행하고 해볼까? 해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합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찾아서 개발하여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닙니까? 사람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십분의 일정도 발휘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왜죠?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고 계시니까.
여러분, 숨 쉴 수 있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 없잖아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힘으로 숨 떨어진 사람에게 단 십분이라도 숨 쉬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하잖아요.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 호흡하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무엇인가 우리가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중에서 어떤 기능이 상실 되도 그중에 어떤 기쁨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생각을 합니다.
<38절>을 보니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나 가서 알아보라 하시니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가 있습니다.
여기서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 가지고 시작합니다.

다윗의 손에 물맷돌이 있었는데 그 물맷돌이 역사를 갈랐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여인의 집에 가서 "너희 집에 뭐있냐?"
"예, 밀가루 조금 기름 조금 있습니다."
"그것으로 나에게 떡을 해다오." 그리고서 먹고 그 집을 축복하여서 밀가루독과 기름병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엘리사에게 선지생도의 미망인이 와서 선지 공부하다가 먼저 세상 떠나서 그냥 여자 혼자 살려니까 빚을 지게 되고 그 빚값으로 아들들이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됐습니다. 살려주세요.”
“너희 집에 뭐있냐?”
아무것도 없어서 빚값에 자기에게 종이 된다는 사람에게 집에 뭐있냐고 물어봤습니다.
“예, 기름 조금 있습니다.”
“그릇 빌려와라 빌려온 만큼 다 병에 쏟아라.”
그릇에 기름이 가득 찼어요.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팔아서 빚을 갚고 먹고 살아라.”
뭐든지 있는 것 가지고 한단 말입니다.

기드온의 300명 군사가 뭘 가지고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쳤습니까? 그들 손에는 횃불항아리 나팔이었죠?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던 겁니다.
누구나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난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잃어버릴 것도 없어요.” 라고 여러분 한탄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없는 것 가지고 역사하심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역사하십니다.
내게 없는 것 주님께 굳이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것 가지고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소원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구하되 있는 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무엇이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 이게 있으니 이것을 한 번 사용해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오병이어밖에 없는데 하고 생각하지 말고 오병이어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 헌신하여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헌신과 희생 없이 어떤 은혜의 꽃도 피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는 분들 보면 존경해 드리세요. 결국은 어떤 경우든지 희생과 헌신이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들, 누구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적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겁니다. 내 작은 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주님의 손에 쓰임 받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입니다. 내가 주님의 손에 들려드리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입니다. 작은 것 내놓을 때 부끄럽지 않습니다. 큰 것 내놓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작은 헌신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감사하고, 당당할 수 있고 큰 것을 드릴 수 있을 때 겸손할 수 있는 성도가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주님은 외적인 평가전에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평가하십니다.


나머지 세 번째,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전 이 장면이 성경을 볼 때마다 가장 의문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의문이 됐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그 조그만 것을 손에 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단 말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화끈하게 기도하면 되지 뭘 그 부스러기를 줍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좀 이상하네요. 전 이게 영 이상해요. ‘한 번 더 기도하면 되는 것이지 뭘 치사하게 부스러기를 주워서 모으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려드리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요새 수험 철이니까 수험생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해 봅시다.
어떤 수험생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지만-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제가 공부한 만큼만 점수가 나와야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더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합격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주의 일을 잘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울고불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 안 하세요? 너무 믿음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하거든요. 목사인데도 “하나님, 정말 심는 대로 거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죄송하지만 은혜를 더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학생이 정말 합격을 했습니다. 이 학생이 너무나 놀라서 뛸 듯이 기쁠 겁니다. 제가 보니까 합격해서 기쁜 사람 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한 사람도 너무 기쁘지만 좀 부족한 데 합격한 사람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합격해서 두 가지로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번에 기회를 주신 것으로 보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먹었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하나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이 심오한 뜻을 못 알아 들으셨습니까? 하나님 저는 이번을 통해서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이제는 저는 제 삶의 모든 길에 안심입니다. 뭐라고 생각했겠어요?
‘그렇구나! 준비가 부족해도 그렇게 기도하면 되는구나!’

그런데 이 사람 준비 안하고 다음에도 또 그렇게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옳겠습니까?
여러분 저는 왜 열두 바구니에 그 부스러기를 모으라고 했을까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모으라고 했을까? 주님이 기도하면 오천 명도 먹이는데 그까짓 열두 바구니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기적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똑같은 기적을 체험하려고 하십니까? 한 번 기적을 베풀어주셨으면 똑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야지요. 그렇죠?

여러분 기도에도 진보가 있어야 되잖아요.
“하나님 이번에 정말 제가 게으르고 부족해서 하나도 준비를 못했는데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으면 다음에는 “하나님, 정말 제가 전보다는 더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그래도 부족합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보고 ‘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 다르다’ 하고 인정하게 하시고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기여하는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어떻게 기도해야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정말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도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셔서 은혜를 주십시오. 제가 준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진보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 앞에 전부 진보되어야 합니다. 왜 똑같은 기도를 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똑같은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적을 체험했으면 이제는 그것보다 또 다른 은혜를, 또 다른 은혜를, 또 다른 은혜를 간구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의 떡을 먹여주셨으니 이제는 그것도 챙길 줄 알고 준비할 줄도 알고 이제는 다음의 사람들이 올 때 준비도 시켜주고 준비할 수 없으면 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예비도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이 그들에게 더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이와 같은 늘상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기적을 베풀지 않아도 될 만한 준비를 갖추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요?
위기에 처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신앙은 한탕주의가 아닙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그저 마음에 작심하고 철야기도 하고 금식하고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거둔 것이 또 다른 기적의 능력과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번 은혜를 주셨으면 이제 그것가지고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은혜가 일회용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우리는 새로운 은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실과 진실과 그리고 정직과 그리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노력과 애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작은 것을 아껴야 큰 것에 대범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니까 작은 것에 헤픈 사람은 큰일에 대범하지 못하던데요. 작은 일에 아껴서 큰 것을 만들어 놓아야 큰일에 대범할 수 있던데요.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냥 모든 것 다 하다보니까 정말 뭔가 큰일을 도와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정말 여러 성도들이 노력하고 애써서 준비해서 큰일을 이룰 수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큰일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순연히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작은 일이라도 애써 수고해서 큰일이 됐을 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며 함께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일 아닙니까?
열두 바구니의 역사, 정말 그 열두 바구니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천 명 앞에서.
그런데 그것을 주워서 모으는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의 헌신은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가지고 오천 명 먹어도 열두 광주리 남은 것 보니까 결국 손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아름답게 헌신하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남은 것은 헌신한 것 밖에 없어 라고 말할 수 있어도 축복이 아닙니까? ‘난 모든 것 잃어버렸어 그래도 나는 그동안 주님 앞에 헌신이라도 했어.’ 이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백성의 모습들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저희에게 묻고 계신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 있느냐?
넌 뭘 가지고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헌신할 것이냐?
넌 뭘 가지고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뭐냐?
왜 없다고 하느냐?
왜 못한다고 하느냐?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왜 너는 실패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들에게-못한다는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계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힘 있게 달려가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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