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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에 근심하지 맙시다 (요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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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마음에 근심하지 맙시다.
+ 설교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현대인의 모든 질병은 대부분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온다고 합니다. 70%이상이 염려와 근심해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없었던 진통제나 두통약의 종류도 많아졌습니다. 한 알만 먹으면 되던 것이 두 알 세 알... 점점 더 많이 먹어야 되고, 결국 위장을 버리게 되어서 또 다른 질병을 일으키는... 이런 악순환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소비되는 수면제가 자그마치 700억 알이나 된다고 합니다(1996년 통계). 이것은 미국 사람이 먹는 수면제가 하루에 1,900만 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만 해도 1,900만 명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스피린은 한 해 동안에 1,100만 파운드나 팔렸는데, 이것은 1년에 750억의 두통 건수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통약 선전이 많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그것이 무엇에 쓰는 약인지 다 아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고 있으며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근심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카아브’라는 말인데 이것은 ‘아픔을 느끼다’, ‘슬퍼하다’, ‘상하다’, ‘아프다’ 그런 뜻이고, 헬라어로는 ‘뤼페’라는 말인데, 이는 ‘슬픔’, ‘한숨’, ‘서러움’ 이런 뜻입니다. 한문으로는 ‘괴롭고 애를 쓰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근심이라는 단어는 ‘타랏세스도’입니다. 이 말은 ‘뒤흔들다’, ‘혼란에 빠뜨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뜻을 종합해서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근심이 마음에 있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번뇌하게 만들고(잠12:25), 심령을 상하게 하며(잠언15:13)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잠17:22).

나이가 들어가면서 믿음이 더 좋아지고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야 할텐데,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근심거리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근심 보따리 짊어지고 사는 것을 보면 부끄러운 믿음을 가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다락방 설교입니다.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주님을 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갈 것이고 수제자 베드로는 닭이 2번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주님을 겪어보니 그분은 헛된 말씀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떤 말씀이든지 그분이 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을 봤습니다. 죽어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하시니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광풍이 치는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하시니 바람과 바다가 잔잔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으니 어찌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절에 보니 주님께서는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음성이 오늘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의 일들로 근심하는 우리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극복하지 못하는 일들로 근심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근심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동일한 이유를 찾아봅시다.

1.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근심하지 맙시다(1절).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근심하지 않아도 될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그 사람은 주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영접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엡2:1-8에 보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신자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주님의 부활과 함께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함께 일으키시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합니다. 갈2:16에 보면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 때문이 아니며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그 결과 주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가 함께 달린 것이고 지금은 우리 안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요 14:12에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그보다 더 큰 일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과 내가 하나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능력으로 주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주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어떤 문제도 극복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해결하신 분입니다. 사단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주님은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셨다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주님이 나와 하나라면 문제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해서 그분이 가지신 열쇠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분을 믿는다면 그분이 가지신 열쇠는 내 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 우리에게는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죄의 문제와 사망의 문제는 주님 안에서 해결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주님은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분야에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과 하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정말 그분의 능력을 확신한다면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마 11:28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벧전 5:7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짐은 주님에게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그 부인이 폐병으로 다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불안해서 잠을 못잡니다. 안달거립니다. “내가 죽으면 남편은 어떡하나, 이 많은 자식은 어떡하나” 하나님을 원망도 해보고 불평도 해보고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잠이 오지 않고 밥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기들이 쓰던 전도지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시편 55:22). 그리하면 저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는 말씀을 읽고 성령의 감동이 오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내 질병을 맡겨 버립니다. 내 가정도 맡겨 버립니다. 내가 죽어도 내 남편 내 자식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이지 내가 염려한다고 되겠습니까? 주여! 맡겨 버립니다” 그랬더니 그 순간부터 마음이 편안해 지더니 잠이 오더랍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 잠을 자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수술하는 것 같이 치료를 하시더니 “네가 죽지 않고 살리라”하는 음성을 듣고 잠을 깨고 나니 그 다음부터 몸이 낫기 시작해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2. 영원한 천국이 있으니 근심하지 맙시다(2-3절).

천국은 실재합니다.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2절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말한 ‘내 아버지 집’이란 하늘나라, 천국, 천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천국은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곳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께서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거주할 공간이 많다는 뜻입니다. ‘거할 곳’은 영구한 저택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처’는 웅장한 궁전의 거실이 달린 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방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기에 계21:2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준비한 것 같더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답게 꾸밀 때가 언제입니까? 시집 갈 때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어떻게 갑니까? 3절에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먼저 천국에 가셔서 우리가 거할 거처를 준비하신 후에 우리들을 데리러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즉 재림하실 때 믿는 우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 보면 정관사가 붙어있어 ‘그 길’ 즉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4:12절에도 보면 예수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는 오직 천국 입국 비자를 받은 자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자는 어린 양 예수의 붉은 피(계7:14)로 찍힌 도장을 받은 생명책(계21:27)에 기록된 자들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대속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문제, 큰 문제를 가지고 있어도 곧 천국에 들어간다고 확신한다면 충분히 참아낼 수 있고, 천국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근심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살고 있지만 내일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면 판잣집의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도가 고장이 났어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전기에 문제가 있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이사를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이유 중에 하나는 그에게는 내세에 대한 확신이 충만했습니다. 욥19:26에 보면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입니다. 잠시 불편해도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거처는 천국에 있습니다.

3. 기도할 수 있으니 근심하지 맙시다(13-14절).

우리가 여러 가지 근심이 될만한 일들을 만나도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근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13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 그 말씀을 다시 한번 반복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를 13절에서는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내용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크고 작은 것은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내용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고 응답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응답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응답은 주님이 하시니 기도의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응답하시는 분이 제한이 있다면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저는 신28:1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 교회에서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나오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반드시 응답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1200명의 예언적 중보기도자, 1000명의 바르실래, 700명의 전문성을 가진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해마다 세계 선교여행을 하는 꿈을 갖고 기도합니다. 엄청난 기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시 81:10에서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셨고 그 능력을 전재로 기도응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을 넓게 벌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입을 넓게 벌리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을 넓게 벌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입을 넓게 벌리지 않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4. 성령이 함께 하시니 근심하지 맙시다(16-18절).

16절에 보면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롬 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곁에 계시는 것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은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시면 예루살렘에는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면 갈릴리에는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육체를 입고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점은 성령님은 육체를 입고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면 주님을 성령님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에게 도움을 받았던 제자들보다 더 풍성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요14장에서는 성령의 가르침이 있다고 말합니다. 26절에 보면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치신다고 약속합니다. 성도들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자꾸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는데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기도 응답은 내가 직접 받아야 합니다. 간혹 목회자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는 것은 필요합니다. 내가 받은 응답이 제대로 된 응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도를 받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늘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응답 받으려는 것은 절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은사를 받아서 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영적인 거지근성이 문제입니다. 조금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서 기도를 받고 그 사람의 지시를 따라 가려고 합입니다. 제가 영적인 거지근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집에 밥이 있는데 꼭 남의 집에 가서 밥 얻어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순간순간 지혜를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6.25 때 한 목사님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국군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와서 다급히 말했습니다. “목사님, 숨겨 주세요. 피할 데가 없어서 교회로 왔습니다.” 목사님이 군인들을 다락방에 숨겼습니다. 곧이어 인민군들이 교회 문을 확 열고 들어왔습니다. “목사 동무, 동무는 하나님을 섬기니 거짓말하지 않지? 바른대로 말해. 국군 둘이 왔지? 어디 있나?” 목사님이 ‘주여!’하는데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목사님이 마루 바닥을 발로 탕탕 치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군인 두 사람을 여기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두 군인이 다락방에서 내려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살려 주셔서 고맙지만 거짓말을 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거짓말 안 했습니다. 내가 마루 밑에 숨기지 않았다고 했지, 다락방에 숨기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말도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세상 살아가면서 근심할 일도 참 많지만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제 근심을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영한 천국이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보혜사로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다 내려놓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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