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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십니다 (눅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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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유심히 살펴보십니다 (눅 21:1~4)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에 나온 대부분의 후보들의 선거 이슈는 ‘경제’입니다.
옛날에는 “민주주의”가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경제를 회복시키고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먹여 살릴 것이냐?” 그리고 “누가 이 나라의 경제를 회복시킬 것이냐”가 백성들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모당의 이 모 후보가 그런 면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정말 우리가 못살고 경제가 옛날 20년 30년 전보다 못한 것일까요? 그때보다는 우리가 어렵기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구호를 외친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그것이 모든 국민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작년도 수출액만 3,255억 달러입니다. 작년도 1인당 국민소득은 17,000달러로 세계 39권입니다. 올해에 2만 달러가 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과거 30년 전보다 30배가 넘은 수출을 하고 개인소득은 17배가 넘는데도 사람들은 늘 경제 문제를 만족하질 못합니다. 다들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 한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가만히 읽다보면 재미있는 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다루신 예화나 설교의 주제가 재물이나 돈에 관한 설교가 참으로 많습니다. 달란트 비유도 재물 이야기고 불의한 청직이 이야기도 돈 문제이고, 탕자 이야기도 돈 문제이고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도 재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오병이어 기적,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 사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 비유, 옥합 이야기 등 수많은 것이 다 물질 문제입니다.
왜일까요? 그만큼 물질이나 돈 문제는 우리 인간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가치관과 우리 신앙을 보실 때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유심히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면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마음이 있는 것에 보물이 따라가고 반대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19~21을 보세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하신 이 구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이나 헌물을 받으실 때 그 마음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도, 감사헌금도, 선교헌금도, 마음이 담긴 것을 받으시고 그 물질을 통해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그에게 소원을 물어 조신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안 받으신 것은 제물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드리는 자의 마음과 정성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4~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 즉 제물이 문제일수도 있을 것이나 사람 그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가치의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을 씻으실 때도 그것을 받으신 것은 그의 마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어떻게 헌금생활을 해야 올바른 것인가, 어떻게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실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헌금하는 자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헌금함을 교회 입구에 놓아두고 성도들이 교회에 들어오실 때 자유롭게 자원하여 헌금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원하는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가 헌금 바구니를 돌려 헌금은 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좋으나 성도들 중 개중에는 사람들 눈치 때문에 헌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하고 싶은데도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도 간혹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헌금바구니를 돌리면 더 헌금이 더 나올 텐데 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안 드리고 싶은데 다른 사람 의식해서 억지로 드린다면 그런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헌금이 아닌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2절을 보세요.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헌금함에 헌금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들어오면서 헌금하는 모습도 보셨고 어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도 보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 주님은 헌금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헌금함에 누가 헌금하는지도 관심사였고 얼마나 헌금하는지도 유심히 살펴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빈손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원에 제가 아는 어느 교회 목사님은 성도들이 헌금 할 때 이름을 써서 내면 예배 후에 돌려준다고 합니다. 십일조인지 감사헌금인지는 밝혀도 되나 이름은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안 써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이고 그리고 이름을 쓰게 되면 사람이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목사님도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는지 알게 되면 사람을 차별할 것 같아 그렇게 한답니다. 참 좋은 생각이긴 한데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요즘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기록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성전을 건축할 때, 보수할 때 누가 헌신했는지에 대해 이름을 일일이 기록한 것이 있기에 우리교회도 주보에 공지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사람이 알아주길 기대하고 헌금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심합시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 사람은 몰라줄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계시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은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15년 전 우리 교회 다니시며 재정을 보시던 집사님 한 분은 늘 새 돈을 헌금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날그날 수입 중에 십일조를 떼는데 그중 새 돈을 드리되 돈이 좀 깨끗지 못하면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려서 드린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 모친에게서 그 소리를 듣고 물어봤습니다. 집사님 꼭 그렇게 할 필요 있나요? 했더니 그분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례비 받으실 때 헌 돈으로 드리는 것과 새 돈으로 드리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이 기분이 좋습니까? 당연히 새 돈이지요, 했더니 마찬가집니다. 하나님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더군요. 제가 좀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도 우리 헌금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헌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헌금의 액수보다는 믿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헌금의 액수를 아시고 평가하십니다.
3절~4절을 보세요.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액수로는 부자가 많이 넣었는데 사는 형편과 경제적 수준에 비하면 가난한 과부가 많이 했다고 평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드리는 자의 환경과 생활, 경제적 형편을 다 보고 그 헌금을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자가 몇 천 만원 했을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사는 형편에 비하면 극히 작은 헌금일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 몇 만원 했을지라도 그것이 부자보다 더 많은 헌금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 교회 어떤 주일학교에서 예배 후 헌금을 교사들이 계산하는데 헌금바구니에서 쪽지하나가 나왔답니다. 그 쪽지를 펴보니 어린 글이 써 있었답니다. “예수님 미안해요. 오늘은 돈이 없어요. 미안해요.”라고 써 있었답니다. 교사들이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그 쪽지를 사진을 찍어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답니다. 저는 그날 헌금중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큰 헌금은 그 어린이의 헌금이라고 봅니다. 왜요? 그 속에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에 보는 가치로 헌금을 보면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계산하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계산법은 눈에 보이는 액수만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계산법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 라고 하신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다르고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계산법도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계산을 안하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든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든지 나름대로 계산을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점심을 먹을 때 무엇을 먹을까? 계산을 합니다. 어떻게 먹어야 맛있고 싼 것을 먹을까? 계산합니다. 회사를 갈 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까? 계산을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돈은 적게 드는데 가서 돌아다닐 때 불편하다. 그러나 자가용을 가져가면 주차비에 기름 값에 얼마가 들 테니 그래도 좀 고생하더라도 버스타고 가자. 이게 계산입니다.
어떻든 최대한의 이익을 만들면서도 최소한의 비용을 지출하려는 계산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들어온 돈은 절대 쓰지 않음으로 돈을 모으자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그래도 쓰면서 살자 라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하는 대로 우리들에게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일반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128:2에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수고하지 않은 자에게 열매를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수고하고 땀 흘린 자들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
그래서 고후9: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계산법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에게는 은혜의 계산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잠언11:24~25을 보세요.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행함의 계산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행한 대로만의 계산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계산법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저녁에 퇴근하면서 늘 쭈그러진 사과를 사옵니다. 부인 집사님 이 어디에서 샀느냐고 다그치자 남자 집사님은 말했습니다.
“알고 사는 거야. 맨 정신에 그런 사과를 어떻게 사겠어.”하더랍니다. 
알고 보니 사업에 실패해서 쫄딱 망한 교회 집사님이 교우들의 도움으로 리어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리어카로 사과 장사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기에 퇴근길 때마다 그 사과를 사온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계산으로 계산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계산법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만 거두게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심은 것보다 수십 배 수백 배 거두게도 하십니다.
왜요? 그게 은혜요.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계산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엡3:20을 보세요.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계산법, 긍휼 계산법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기뻐하며 마음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헌금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이 가난할지라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처럼 헌금을 잘하라는 내용의 본문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앞뒤 문맥을 잘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서 가르칩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의 탐심과 외식, 그리고 그들의 허영을 칠타하십니다. 바로 앞장 누가복음 20:45~47을 보세요.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이어서 과부 헌금을 칭찬합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가 되도록 버려두는 부자들의 행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 이하를 보면 그렇게 드린 헌금으로 지어진 성전이 얼마 되지 않아 다 무너져 내릴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 말씀 속에 끼어 들어간 사건이 본문의 과부의 두렙돈 헌금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 건축을 위한 헌금 부자들이 아무리 많이 드리지만 그것은 자기의 허세를 들어내기 위한 헌금이고 그러면서도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도적놈들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과부는 두렙 돈, 지금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돈 일 이천 원이 생활비 전부인 처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지경에도 이 여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활비 전부를 드립니다. 그러니 주님이 감동 받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어떻게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자기들 딴에는 많이 드렸다고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였으나 주님은 그들을 알아주질 않습니다. 사람은 알아주고 칭찬하나 주님은 안 속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드린 것 보다는 과부의 두 렙돈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과부를 칭찬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당시의 지도층이나 부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헌금으로 속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압니다. 그 두렙돈이 생활비 전부인 것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속이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십일조가 아닌 것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안 속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데 드리는 감사도 안속고요, 건축헌금이나 선교헌금도 대충 적당히 드리는 것도 안 속습니다.
왜요?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아무리 많은 헌금을 드려도 그것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면이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것이 때로는 엄청난 위로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의 도구가 됨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헌금은 어떻습니까?
어느 집 어린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빚 때문에 아버지가 한숨 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가 그토록 아끼며 한푼 두푼 모아온 돼지 저금통을 가져 왔습니다.
“아빠 이것 가지고 아빠 빚 다 갚아버려요,”하더랍니다. 그 아빠 엄마는 그 아이의 저금통을 붙잡고 감격해 하며 울었답니다. 그 돼지 저금통 때문에 엄마 아빠는 힘을 내고 일어섰답니다.
마치 이 과부의 헌금도 그런 감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금이 주님이 감동받으실 만한 마음이 담겨있습니까?
적당히 드리고도 이 정도면 많이 드린 것이라고 자부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정성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헌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비록 적게 드려도 속이려고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주는 교훈은 성령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기로 작정할 때 다 드리기로 작정했으면 다 드리면 되고 반만 드리기로 했으면 반이라고 하면 됩니다. 일부만 드리면서 다라고 속이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도 보시나 우리의 중심도 유심히 보고 계십니다.
특별히 헌금은 우리의 믿음과 정성이 담긴 것이기에 최선을 다하시고 정직하게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헌금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기에 정직하게 하고 마음을 담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관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 어디에 어떻게 쓰는가를 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헌금은 예배자의 헌신의 표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그것이 예배요. 그 예배중 중요한 순서가 헌금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 마음과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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