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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보시옵소서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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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보시옵소서 (눅 19:1~10)

젊은 나이에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긴장과 부담감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출세 가도를 달리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정신착란 증세까지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을 더럽고 무가치한 존재로 자학하다가 자살까지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변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한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며 시로 고백하였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찬송가 190장입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입니다. 이후 영국 문학사에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31일 마틴루터(Martin Luther)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잘못된 행태들을 95개 항목으로 정리해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종교개혁의 큰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현대의 교회들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당시 카톨릭교회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부와 명예가 교회로 몰리면서 온갖 타락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가 교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성도들은 그런 타락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새롭게 개혁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개혁을 일으키는 자, 이 시대의 루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의로운 사람' 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름과 달리 불의한 일을 행하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었지만 제도를 이용하여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겨 동족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창기와 더불어 죄인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이런 제도를 악용하여 부를 축척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여리고의 세관을 책임지고 있었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결국 의롭다는 이름의 삭개오는 이름과 정반대로 불의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삭개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름 값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도 됩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오르게 되었으며 많은 성도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름대로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놓겠다고 말합니다. 누구를 억울하게 하여 모은 것이 있다면 사배나 갚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삭개오는 구원을 베푸신 예수를 향해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보시옵소서".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첫째로 사모하는 열정을

미국의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16세 때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로서 더 나은 삶을 향한 결단이 없었기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20살 때 사귀던 자매와 헤어지고 남미 여행을 하게 됩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식당에서 식사할 때 근처에 앉은 노부부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아! 좋다! 여태껏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다가 이렇게 휴가를 누리니 고생할 만하네!". 이 말이 하이벨스에게 실로 어리석게만 들렸습니다. "그토록 안 먹고 안 쓴 결과가 고작 해변의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방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더 나은 무엇인가 있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변화된 삶을 추구하려는 열정은 그를 미국 최대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여기의 '보고자 하되' 라는 구절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으며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이 열정이 삭개오를 뽕나무까지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거룩한 것을 위해 속된 것을 버렸습니다. 하늘의 것을 위해 땅의 것을 버립니다. 그런 열정은 거룩한 욕망이 되어 위대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껏 이름 값을 못하던 그가 이름 값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모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욕심을 품는다' 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했습니다. 만나고자 했습니다. 평소에 예수께 관심도 없던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자 합니다. 물질을 추구하고 세상 것을 추구하던 삭개오의 더러운 탐욕이 거룩한 열정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열정이 사람의 벽을 넘어서게 만들었습니다. 작은 키의 장애도 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열정을 품은 모습을 보임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만나려는 용기를

프랑스 외인부대의 표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전진하다 쓰러지면 일으켜 달라. 내가 머뭇거리면 떠밀어달라. 그러나 내가 물러설 때는 나를 쏘아 달라".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체면을 버리는 용기입니다. 부끄러움도 잊어야 합니다. 경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을 향해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수모가 있고, 조롱이 있고, 자존심이 상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려고 했지만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과 그의 작은 키는 큰 핸디캡이었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용기있는 결단입니다. 세리장의 신분으로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고 체면이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체면 때문에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병 낫기를 사모하여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바디매오의 소경은 눈을 뜨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정결함을 얻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모두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는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진리는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외적으로 조금 성공했다고 마음이 높아지거나 체면을 내세우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자신을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 붙잡히려는 자기 파괴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로켓(Rocket)이 우주로 나갈 때 가장 힘든 일은 대기권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로켓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4분의 3을 써야 합니다. 체면은 대기권과 같은 껍질입니다. 껍질을 깨기가 어렵지만 반드시 깨어야 합니다. 진리와 구원이 체면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버릴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옷을 벗어야 합니다. 지식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배웠다고 아는 척 하면 신앙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지위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감정의 겉옷과 자존심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예수 때문에 참고 마음에 상처가 있어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용기가 없으면 모두 불가능한 행동들입니다. 부디 주님을 향한 용기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내려놓는 회개를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는 원숭이 잡는 방법이 특이하다고 합니다. 나무에 묶어 놓은 야자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는 숨어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몰려듭니다. 다가온 원숭이는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열매 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때 사람들이 나와 원숭이를 잡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자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움켜쥔 땅콩을 내려놓아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원숭이들이 생각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숭이들은 한 웅큼의 땅콩과 생명을 맞바꾸게 됩니다. 아직 움켜쥐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 집에 황금 벽돌을 주시고 싶어하는데 당신은 정작 흔해빠진 시멘트 벽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율법에서 정하는 변상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이지만 새로운 삶을 결단하면서 과감히 물질을 주님 앞에 내놓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쉽지 않은 고백이지만 삭개오는 내려놓는 회개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실 때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임을 깨닫고 감격하였습니다. 지금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십니까?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께 나아오십시오. 세상을 향한 집착을 벗어버리며 회개하십시오. 그리하여 변화된 모습을 보이십시오.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젊은 시절 가난이 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까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노동 착취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미국 최대의 부자가 되었지만 삶의 보람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몸은 다 망가졌고 불안은 더 심해졌습니다. 53세에는 노이로제, 불면증, 무력증 등 각종 질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록펠러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면서 리버사이드 교회를 짓고, 교육활동을 하며 시카고 대학을 세웠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하나님께 보이니 건강이 회복되었고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자녀답게 거룩한 열정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용기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열매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삭개오처럼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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