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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역사의 빛을 이어가는 사람 (느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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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빛을 이어가는 사람 (느 13:1-9)

(느13:1-9)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1. B.C.930년경 솔로몬의 우상숭배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극도로 패역했던 북 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 유다는 그 후 136년 뒤인 B.C.586년에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패망당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의 빛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던 것처럼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의 징계가 끝나갈 무렵인 B.C.538년,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바사(페르샤) 왕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 아래 무너진 성전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스2:1-2) 성전 재건에 숱한 난관과 고난을 겪으며(스4:7-23), 민족 대학살의 위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에스더3장)

마침내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3차 귀환과 성벽 공사를 마침으로 그 험난하고 고통스럽던 성전 재건의 모든 공사가 완수되었습니다.(느6:15) 이른 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은 성전 재건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열방의 빛으로 세우신 이스라엘의 회복(사42:6)은 성전 재건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어 이방의 빛이 되게 하여 흑암에 처한 자를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성전 재건을 통해 시작하신 것입니다.”(사42:1-7)

이스라엘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로 세우신 교회를 말합니다.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셨듯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사45:7,60:3,6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의 빛으로 오시고, 그 빛을 열방 가운데 비추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세우시고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 9:5, 마 5:14, 눅 2:32)

그러므로 이 시대 역사에 깊게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어 내고 역사를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성전을 재건해야만 합니다. 일제 36년의 식민지 통치와 6.25 한국 전쟁으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워진 성전을 정화하는 제 2의 성전 재건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성전은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성전은 예배를 통해 인간의 더러운 죄를 씻는 곳입니다. 어느 나라 민족이든 죄악으로 멸망당하고, 죄 사함으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를 떨만큼 악독하고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가득한 앗수르의 니느웨일지라도 지은 죄악을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더욱 더 성결해야만 합니다. 성전이 인간의 죄를 씻는 곳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죄악으로 오염되었을 때, 가차 없이 그 성전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성전이 종교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등)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성전을 장사꾼들의 무대로 만들어 주므로 거룩한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렸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 진리의 기둥과 터가 기득권 계층의 약탈 무대가 되어 진리는 매몰되고 “이방의 빛”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의 빛을 소멸시키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같은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사흘만에, 다시 말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온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추는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성전 재건에 주변 족속들의 온갖 방해공작과 느헤미야 암살 음모 등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이겨내고 성전 재건 공사를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웠던 공직 수행을 위해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1년여 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가 돌아와 보니 그 사이 성전이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의 겉모양은 재건되었을지라도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재 구실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민족과 열방의 빛이 되어 역사의 빛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온갖 죄악으로 민족이 앞날을 어둡게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2. 이러한 때에 느헤미야가 분연히 일어나 성전 정화를 위해 개혁의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성전 정화를 통해 역사의 빛을 이루어가고자 구원과 생명의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자신의 개혁 의지나, 총독의 권력, 자신을 예루살렘에 파송한 바사 왕의 왕권에 의한 성전 정화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따른 개혁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1절)

1) 성전 정화를 위해 제일 먼저 뽑아 든 칼은 암몬과 모압 사람을 추방하고 영원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본문 2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느13: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암몬과 모압 사람은 본래 혈통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한 뿌리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변경을 통과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결코 그들을 괴롭히거나 그들과 다투지 말라, 다시 말해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했습니다.(신2:19)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양식과 물을 값없이 제공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의 왕 발락은 복술가 발람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과 모압을 한 형제로 알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만 비켜 달라, 양식과 물도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해당되는 값을 주고 사겠다고 말했을 뿐입니다.(신2:27-29)

그럼에도 복술가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형제 민족을 저주했던 것입니다.(민22장) 모압과 암몬이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이스라엘을 저주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가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2절 하반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가 세게 저주한다고 해서 결코 그 저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누구이든 저주한다고 해서 결코 그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하는 길에 사울 집안의 시므이가 다윗 왕에게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삼하16:7,13) 듣다못해 신하 아비새가 감히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을 독한 말로 왕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칼을 뽑아 들자(삼하19:21) 다윗은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왕상2:8)며 극구 말렸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고백한 시편을 보겠습니다.

(시109:17)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시109:28)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왕에 오르고 나서 시므이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2:44) 네가 무릇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 보내시리라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에게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시므이에게 돌려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시므이는 저주받아 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상2:46) 그러므로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는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성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을지라도 이웃을 축복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이지 저주할 권세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와 나라 민족가운데 암몬과 모압 같은 인물들을 엄단하여 역사의 빛을 이어가는 교회와 나라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성전 정화를 위해 내린 두 번째 조치는 3절,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 몰수히 분리케 한 것입니다.” “섞인 무리”는 이방인들로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방의 우상숭배와 악습을 그대로 살고 있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섞여 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우상숭배와 악습을 따르게 되거나 하나님 신앙을 혼잡케 하여 더욱 더 성전이 더럽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은근히 민족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들 “섞인 무리들” 중 한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모든 성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조치를 취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 주거지역에서 깨끗이 추방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섞인 무리” 즉 혼합주의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포도원이면 포도나무만 심어 재배하고, 다른 종자를 섞어 재배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레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호랑이(타이거)와 사자(라이온)을 교접시켜 ‘라이거’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호랑이로 만드시고 사자로 만드신 그대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해 입을지라도 혼방으로 하지 말고 나이론이면 100% 나이론으로, 면이면 100% 면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모든 생활 영역에 걸쳐 순수성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이같은 말씀들은 모두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속에 물들거나 세상 풍습이나 우상숭배와 타협해서 적당히 살지 말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며,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그 손으로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절에 가서 얼마든지 합장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심풀이 일지라도 운세, 사주 등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회사가 잘 되는 일이라면서 삶은 돼지 대가리 입에 돈 물려주고 그 앞에 절하는 행위 등 우상숭배나 그와 비슷한 이방 문화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하거나 결혼 날짜를 잡을 때 예배를 소중히 여겨 날을 정하고, 흔히 우상문화에서 말하는 악귀와 악신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서 손해가 없다는 ‘손 없는 날’을 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정화하면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까지도 백성들이 우상처럼 숭배하자 아낌없이 부셔버렸습니다.(왕하18:4) 아사 왕은 자신의 모친 마아가가 가증한 우상을 만들자 거침없이 태후 지위를 박탈하여 쫓아내고 그 우상을 가루로 만들어 불로 태워버렸습니다.(대하16:16) 아사 왕의 이러한 철저한 성전 개혁과 정화로 말미암아 아사 왕 통치 기간 중에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대하16:19)

개인이나 나라 민족의 평화와 복은 이처럼 성전 개혁과 정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두운 밤을 거두고 역사의 빛을 이루어가는 길은 바로 성전을 하나님 말씀대로 개혁하고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세속화되지 않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여러분과 나라 민족 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3) 성전 정화의 세 번째 조치는 성전의 성소를 정결케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돌아보니 거룩한 성전에 도저히 있어서는 안되는 큰 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토록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자신을 암살 기도했던, 그리고 “봉하지 않은 편지”, 즉 악성 루머를 퍼뜨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산발랏의 주구(走狗), 앞잡이 도비야를 위해 성전 한 곳에 큰 방을 만들어 주고, 성전 봉사와 제사를 맡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해 십일조 등을 보관하는 창고 열쇠를 맡겨 몽땅 들어먹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법에도 없는 특권을 부여해서 성전 재물을 가로채게 한 이유는, 엘리아십은 손자를 산발랏의 사위가 되게 하여 산발랏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느13:28) 엘리아십이 산발랏과 사돈지간이기 때문에 사돈에게 특혜가 가도록 하기 위해 산발랏의 주구세력인 도비야에게 성전에 큰 방을 만들고 성전 창고 열쇠를 맡겨 마음 놓고 배를 채울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비야는 이스라엘을 저주한 암몬 족속으로 영원히 추방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아십은 대제사장으로 그 누구보다 성별되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레21:4-6) 때문에 제사장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이방 우상숭배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직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레21:7, 1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아십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 권력층과 사돈지간을 맺어 그 세력을 넓혀가며 거룩한 성전을 온갖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키워갔던 것입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엘리아십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그의 손자 요야다에게 산발랏의 딸과 이혼을 요구했지만 거절하자 사마리아로 추방하므로 더럽혀진 제사장 직분과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했습니다.(느13:28-30)

느헤미야는 이처럼 형제일지라도 저주를 일삼은 암몬과 모압 족속들을 영원히 추방하고, “섞인 무리들” 즉, 신앙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혼합주의와 그 세력을 척결하며, 성전 깊숙이 측근과 친인척을 박아두고 성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거룩한 재물을 약탈하는 제사장과 그의 친인척과 측근들을 깨끗이 추방하므로 꺼져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빛을 다시 붙여 민족과 나라 역사의 빛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나 교단 가운데 암몬과 모압같은 형제들이 있다면, 그들을 영원히 추방하여 상종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섞인 무리들”, 즉 혼합주의와 그 세력들이 있다면, 깨끗이 척결해야만 합니다. 교회나 나라 권력층에 엘리아십과 도비야같은 측근과 친인척들이 요직에 똬리를 틀고 앉아 교회를 더럽히거나 나라 재산을 축내고 있다면, 이들 무리들을 속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교회와 나라 민족이 역사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같은 정화와 개혁을 통해 역사의 빛을 이어가는 교회 성도, 나라 민족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회와 나라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사람들과 그 세력들이 있습니다. 반면 어두운 사회와 나라 민족의 앞날에 소망을 주고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 바 우리 사회에는 ‘빛의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어둠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역사의 빛을 이어가도록 어둠의 세력들이 속히 제거되기 바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나라 민족의 앞날에 빛을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암몬과 모압 족속’, ‘섞인 무리들’, ‘엘리아십과 도비야’ 등 이들은 이스라엘 나라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리고 빛의 자녀들이 아무리 작아 보여도 작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빛과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여러분 가정과 교회, 우리가 사회에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추어 역사의 빛을 이어가는 ‘빛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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