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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년의 혁명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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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혁명 (창 12:1-9)
   
    일본 최대의 갑부로 알려진 손정의 씨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니까 그분은 인생을 십 년 단위로 설계했다고 했습니다. 이십 대에 깃발을 세우고 삼십 대에 군자금을 모으고 사십 대에는 승부를 걸어서 오십 대에 완성한다, 정말 멋진 설계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오십 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여성의 평균 수명이 팔십을 넘었지요. 남자도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는 평균 수명이 더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죽하면 재수가 없으면 백세까지도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몇 살까지 살았지요? 백 이십 세까지 살았는데 모세가 부럽지 않은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기대하지 않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설계를 새롭게 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오, 육십이 되면 슬슬 정리할 단계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우리가 백세까지 살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앞으로 더 살게 된다는 얘기인데 새로운 인생 설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보험회사의 TV 광고를 보니까 부부가 자식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주차장으로 달려 나가서 스포츠카를 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광고가 있던데 보셨습니까? 그 광고 내용이 아직은 우리 눈에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색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의 생각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광고는 낭만적인 면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자식을 키우느라 인생을 엔조이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과거에 즐기지 못한 것을 즐겨보자 이런 내용을 부각시킨 광고라고 생각됩니다마는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여생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왜 꿈꾸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비전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기업에 대한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물려주시는 유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기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업이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다윗의 기업은 임금의 자리였습니다.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천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 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꿈꾸고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알 수 없지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남들은 은퇴를 꿈꾸는 칠십 오세라는 나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새로운 비전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첫째는 기업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후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식을 너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기업에 대한 약속, 후손에 대한 약속을 남들은 은퇴를 꿈꾸는 나이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시점까지 그들이 뭘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부터 이들의 삶은 많은 수고가 따를 것이고 또 믿음을 지켜야 되고 또 애쓰고 그리고 많은 열매를 거두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의 경우를 살펴보면 욥은 고난 받는 의의 종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고난 받는 의의 종.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욥기의 맨 마지막 장을 보면 욥의 인생의 후반기에 고난이 끝난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들의 과거에 잃어버렸던 것의 곱절을 주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소유도 곱절, 자녀도 곱절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이 나이가 먹어서도 얼마든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기의 요점이 그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거기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얼마든지 사람은 생산적이고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것이 잃어버린 재물의 곱절 플러스 자식도 이전에 잃었던 자식이 있었는데 그만큼의 자식을 또 낳게 하시고 또 욥의 딸들이 미모가 뛰어났다고 하는데 의인의 자손은 생기기도 잘 생깁니다. 그것이 성경적이에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의인의 자식은 생긴 것도 잘 생기고 믿음도 좋고 심성도 좋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 축복인 줄 믿습니다. 그것을 가장 좋은 축복이라고 믿어야 됩니다.

  요한3서에 있는 말씀대로 영혼이 잘됨과 같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먼저에요.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혼이 잘 되면 나머지는 당연히 잘 될 것입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잘 되면 나머지도 잘 될 줄로 믿으셔야 됩니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서 이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스케줄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계절이 다릅니다. 시즌이 다릅니다. 봄에 유행하는 과일, 여름에 나는 과일, 가을에 나는 과일, 그리고 요즘에는 겨울에도 비닐하우스 때문에 과일이 납니다. 이처럼 계절마다 나는 과일이 다른 것처럼 사람도 피는 계절이 다릅니다. 그 사람이 성숙하고 열매 맺는 계절이 사람마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일찍 시작합니다, 모차르트처럼. 모차르트는 몇 살 때 심포니 교향곡을 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굉장히 일찍 시작한 경우입니다마는 그러나 세상에는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음악가이지만 늦게 시작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스케줄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스케줄을 보고 긴장하고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아가 복을 받으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나도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합당한 열매, 일, 돈, 자녀, 모든 면에 있어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지금 이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라는 것을 분별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은 인내해야 될 시절, 심어야 될 시절, 배워야 될 시절, 또 공부해야 될 시절, 또 땅을 일궈야 될 시절 아니면 지금은 빨리 거둬야 될 시절 이런 식으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그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서 읽을 때 그들이 늙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칠십 오세였다고 했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고 늙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몇 살까지 살았는데요? 백 칠십 오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칠십 오세에 하란을 떠났다는 것은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아직 중반도 통과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에요. 사라는 몇 살 까지 살았는지 아십니까? 백 이십칠 세까지 살았어요. 사라도 오래 살았지만 남편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라도 육십 오세에 하란을 떠났다는 것은 인생의 중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년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좇아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그들이 나이가 많았다고 생각했지만 장차 평균 수명이 길어지게 되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은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젊음을 동경하고 젊어지려고 애를 씁니다. 젊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젊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순은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이고 노년층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은 사람이 신체적으로는 젊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또 건설적으로 살고 생산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 또 사람이 젊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나이 팔십이었을 때 선지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왜 그때까지 기다렸느냐? 모세가 기다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의 뜻대로 했다면 더 젊은 나이에 선지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시절 다 보낸 다음에 모세 나이 팔십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이제 네가 준비가 되었다. 이제가 적절한 시간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는 다릅니다. 사람의 때라는 것은 없어요. 사람이 생각하는 때가 있을 뿐이지요. 사람이 요구하는 때가 있을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the God's timing -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그것이 중요한 것인데 모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시간은 모세가 생각한 것보다 늦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모세는 나이가 든 후에 할 수 있었고 젊었을 때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도 많이 들고 그래도 결과가 없을만한 그런 일을 나이가 드니까 별로 힘들지 않고 애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애를 많이 써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애쓰고 노력해야지요.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애쓰고 수고했다’고 말하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근면해야 되고 부지런해야 되고 성실해야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이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내가 성실하고 열심히 하고 다 중요합니다마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니까 과거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꿈쩍하지 않던 바로가 하나님이 몇 번 움직이니까 그만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그 백성을 내어주지 않습니까.

남북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남북문제도 결국은 바로처럼 마음이 강퍅하게 보이는 인물들이 있지만 이것은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정치적인 압박이나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결국은 바로처럼 강퍅한 사람이 손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처럼 강퍅한 사람이 손을 들어야 북한 동포들에게도 좋은 날이 올 수 있고 그들도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고 그들이 새로운 시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결국은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바로처럼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인간은 젊어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라의 미모가 뛰어났다고 했는데 저는 아브라함에 대한 영화를 여러 번 봤습니다. 거기에 사라가 어떤 식으로 묘사됐을까…. 그런데 젊어 보이는 배우를 썼더라고요. 그러나 저는 사라의 아름다움은 젊은이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나이가 들었어도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이 든 사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은 젊음으로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지금과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어도 지금보다 더 피부가 고왔을 것이다? 아닙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사라가 왜 자식을 주리라는 말씀에 웃었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가 웃은 이유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신체적인 시계는 똑같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의 미모를 말하는 것은 젊음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배우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지만 아내 사라가 같이 가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결혼해야 된다는 뜻도 아니고 미혼자는 빨리 결혼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배필이 있는 경우에는 그 배필이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을 함께 이어받을 파트너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더라도 배우자는 함께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의지할 사람은 배우자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에게 잘 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친구도 떠나가고 자식도 떠나갑니다. 자식도 해외 가서 살고 바쁘고요, 남는 사람은 배우자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이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다 떠나 고독한데 그 옆에 같이 가는 사람은 사라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자식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주신다니 그 말은 성경이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이좋게 지내라,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고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라, 하나님이 그런 의도로 이런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마는 사람이 앞으로 더 건강해지고 우리의 수명이 길어질수록 결혼 생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가정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특별히 배우자와 같이 사이좋게 함께 가는 법을 배워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유업을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좀 더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그동안은 우리가 사느라고 너무 바빴어요. 이런 것에 대해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위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위하는 법을 잘 몰라요. 목사님은 잘 아십니까? 그런 질문은 안하셔도 됩니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법을 잘 몰라요. 부모님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별로 사이좋은 것 같지 않았어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였지만 우리의 인간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보면 부부생활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 나라가 프랑스더라고요. 유럽 국가들이 결혼생활을 훨씬 더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사십 몇 위. 그게 돈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문화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습니까? 정신 연령이 낮아서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한 백성이에요. 뛰어난 백성이에요.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배울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러나 앞으로는 배워야 됩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배워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법, 자녀 공부시키는 법이 아니고 자녀를 올바로 사랑하고 도와주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우리는 자녀를 닦달하는 법은 알아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대로 키워주고 도와주는 법은 잘 모릅니다. 이것을 배울 수 있는 데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가정을 위해서 돈을 벌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은 잘 합니다. 지금까지 그걸 해 왔으니까. 그러나 가정이라는 것이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지요. 가정이 떡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배워야 되는지 몰라요.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믿음의 가정, 아브라함과 사라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 그 비결이 나옵니다. 그들이 나이 들었을 때 하나님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첫째는 부부가 화목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용기를 내서 남들은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하시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받을 분복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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