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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골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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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골 3:1-11)
   
    제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동안 성도님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좀 죄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윤리를 자주 가르치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자꾸 행함을 강조하다 보면 도로 율법으로 돌아갈까 하는 우려 때문이고 또 하나는 윤리를 강조한다고 과연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될까 하는 어떤 주저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윤리를 가르치셨고 사도바울도 윤리를 가르쳤는데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반쪽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전거에 두 개의 바퀴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믿음과 행함이 균형을 잡아야 되고, 교리와 윤리가 균형을 잡아야 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균형을 잡아야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라는 천장화에 우리 눈에 가장 익은 부분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는 부분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고 또 아담도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구상이지만 깊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 내미십니다.

그러나 우리도 우리의 손을 하나님께 내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열 두해 혈우병 걸렸던 여인이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 때 나음을 입었던 것처럼 병 고치는 능력은 예수님께 있지만 손을 내밀어야 그 능력이 나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은혜가 예수님께 있지만 손을 내밀어야 나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협력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시쳇말로 하면 하나님과 죽이 잘 맞아야 됩니다. 죽이 잘 맞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죽이 잘 맞아야 그 학생이 공부를 즐거워하고 성적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가 죽이 잘 맞아야 치료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목사와 교인이 죽이 잘 맞아야 은혜를 받기가 쉬워집니다.

  이것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그 씨앗은 똑같은 씨앗입니다. 똑같은 씨를 뿌리는 것인데 토양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예 씨가 먹히지 않는 땅도 있고, 금방 말라버리는 땅도 있고, 기운을 빼앗겨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도 있고, 그리고 옥토와 같은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옥토라도 삼십 배 열매 맺는 땅이 있고, 육십 배 맺는 땅이 있고, 백배를 맺는 땅이 있습니다. 옥토라도 다 같은 옥토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우리의 인격적인 변화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격적인 변화라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에 지배받지 않고,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윤리적인 변화요,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영적으로, 위치적으로, 법적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영적인 안목, 영적인 지혜, 그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된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후 일어난 새로운 일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깨달음, 또 분별력, 지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기도하는 것,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것, 그것도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의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중심이 변하는 것, 가치관이 변하는 것, 그 가치관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줄만큼 진정으로 변화하는 것,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제가 예수 믿고 경험한 바에 의해도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설교하는 것, 신학교 가는 것, 목회자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고, 가치관이 변하는 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게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목사가 되고, 그게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씨름은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인데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임금이 기독교를 후원하고, 또 주관자가 교회를 후원하게 되면서 발전할 수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이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가 없이 제도만 바뀌고 외형적으로 기독교적인 활동만을 하게 되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긴 하는데 결국은 세상적인 동기가 나오고, 세상적인 방법이 나오고, 그리고 결과를 보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영광을 막고, 사람들이 예수 믿는 길을 막고,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제대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중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나 과거의 십자군 전쟁이니, 이런 것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은 중심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외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적인 행사를 하다 보니까 결국은 변하지 않았던 옛 사람이 나오고, 또 세상적인 욕심이 나오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기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new creation-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이란 물이 포도주가 된 것 같은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의지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뜻을 품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다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성경 말씀이 믿어집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이런 것이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 안에 중대한 변화가 진짜 일어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외적인 인격, 도덕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데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고 우리가 협력해야 됩니다. 죽이 맞아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편지를 썼지요. 로마서에서부터 빌레몬까지 사도바울은 많은 서신을 써서 신약성경의 반 이상이 바울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쓰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는 전반부에는 교리를 말하고 후반부에는 윤리를 말합니다. 교리라 함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죄 값을 지불하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다 이게 교리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교리만 말하지 않고 후반부에 윤리를 말하는데 윤리는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 우리가 해야 될 것, 우리가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걸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왜 교리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윤리를 말하느냐?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그걸 먼저 알고 믿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은 첫 번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첫 번째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그 첫 번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행해 주셨는데 우리가 당연히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배려해 주었는데 감사하지도 않고 또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면 그건 배은망덕한 것이지요. 이건 상식적인 차원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건 당연한 것이지요. 그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그 여인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더라도 행함이 따라야 예수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행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가령 ‘이리 오라’ 해서 우리가 가게 되면 갈 수 있는 능력이 임합니다. 주님이 이리 오라 하셨을 때는 우리가 갈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십니다. 반대로 이리 오라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임의로 가게 되면 거기에는 주님이 책임지지 않고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가 의롭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은혜가 없고 다른 종교에서처럼 자력으로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사람이 애쓰고, 힘쓰고, 자기가 모든 것을 해야 되지만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주십니다.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도록 하면 첫째는 사도바울은 우리의 윤리적 변화의 근거부터 제시합니다. 그것이 소위 교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3절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것은 신비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죽었다는 말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옛 사람은 죽었어요. 새사람이 되었어요.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5절에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 구절은 읽은 다음에 이를 닦고 싶을 정도로 입에 올리기 민망한 것들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돌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인간은 다 이렇습니다. 지성인이든, 어떤 사람이든, 예수 믿기 이전의 인간은 이렇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릴 뿐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우상 숭배와 그리고 8절에 계속됩니다,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 이런 것이 옛 사람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악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7절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니’ 예외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너희도 예수 믿기 이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 행하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8절에 ‘이제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now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사도바울은 벗는다, 입는다 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또 9절에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 그리고 10절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그랬지요. 그리고 읽지 않았지만 12절에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옷 입으라, 아주 심플한 표현을 썼는데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처럼 심플합니다.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심플합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의 행위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벗어버리면 벗겨집니다. 그것은 실천해 보셔야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할 뜻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 순종할 뜻만 있으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단순합니다.

  다만 그것을 벗어버리는 목적은 새사람을 입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벌거벗은 몸으로 집을 나서지 않지요. 옷은 우리 몸의 일부분입니다. 옷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됩니다. 이건 의도적인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교회 집사다, 장로다, 목사다, 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다, 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깨우고 옷을 입는 것처럼 우리가 새사람을 입어야 됩니다. 새사람을 입고 방에서 나오고, 새사람을 입고 집에서 나오고, 새사람을 입고 직장에 나가고, 새사람을 입고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정직함이라는 명분으로 새사람을 입지 않고 우리의 벌거벗은 몸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됩니다. 의도적인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주일 예배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담임목사님 방에서 같이 점심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다음 예배 시간이 되었어요. 그 목사님이 거울 앞에서 가운을 입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또 십자가를 질 시간이다.’ 저는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십자가 지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은 처음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 심정일 때도 있지요. 이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심정일지라도 새사람을 늘 의도적으로 입어야 됩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것이다, 새사람을 입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는 한결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2절 말씀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의 것,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TV를 끄고, 인터넷을 끄고, 또 도움이 안 되는 친구를 멀리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꾸만 땅의 것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땅의 것, 그게 우리에게 결국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좀 심플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도 귀중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좀 미련한 것이 좋아요. 로마서 16장 19절을 보면 ‘악한 일에는 미련하고 선한 일에 지혜로워라’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다 똑똑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한 일에는 지혜로워야지요. 악한 일에는 미련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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