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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삼하 6:1-11, 고후 6:14-18, 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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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삼하 6:1-11, 고후 6:14-18, 마 21:12-17)

1.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면서 의도적으로 “새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새 성전 건축 위원회”, “새 성전 입당”, “새 성전 봉헌”이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들은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구 성전에도 그렇고 현 교회도 그렇듯이 외벽 전면 상단에 “예배당”이라고 새겨놓았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oo교회 예배당”이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이런 교회당에 대한 호칭은 가톨릭에서 “성당”이라고 한 것과 대조가 됩니다. 그것은 단지 이름만이 아니라 분위기에 있어서도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물론 예배 의식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예배당”이라는 말과 “성당”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부터가 벌써 다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성전에 대한 인식이 덜 철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번은 엄청나게 분노하신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었었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입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신상에 얼마나 불이익을 줄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예민한 시기에 교권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마치 일부러라도 하시듯이 저지르셨습니다.

   당시는 소위 흩어진 유대인들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성취이듯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고와 비용,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제물이었습니다. 양이나 비둘기와 같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교권자들은 편의 제공차원이라면서 제물을 시장에서가 아니라 성전에서 사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폭리를 취하여 자기들의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성전에서 사는 것이면 무조건 합격품이지만 아무리 좋아도 시장에서 사오면 불합격품으로 판정받게 됩니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성전에서 사야했습니다. 거룩한 일을 빙자해서 개인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분노케 했습니다. 주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개탄하셨습니다.

   이로보건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것,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테면 시간에 있어서 주일을 성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직분을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섬기기 위한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물건들을 성물이라 또는 성구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 예배드리는데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무시하거나 더럽히면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저를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거룩하신 주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의적인 판단과 욕심 때문에 직분을 더럽혔습니다. 결과 그는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거룩한 반열에서 제외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고후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리요......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마땅히 거룩한 것, 하나님께 속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오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왕이 되고나서 맨 먼저 생각한 것이 민족의 통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헤브론에 있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헤브론은 북쪽 사람들을 포용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남쪽에 치우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북쪽을 택하면 남쪽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 지점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수도를 정하고 나니까 정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있었습니다. 선왕 사울이 원래 신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좋은 집을 마련하여 왕권을 누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개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권이 확립되고 나서 첫 사업으로 여호와의 궤를 수도로 옮겨와서 제대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옮기게 됩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앞장선 사람이 궤를 보관했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기회에 자기 이름을 내고 싶었습니다. 왕이 하는 일에 앞장서서 자기 입지를 넓히려는 야심이 만만하였습니다. 이 거룩하고 큰일을 성대하게 치르기 위하여 다윗은 3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서 웃사를 돕도록 했습니다. 웃사가 얼마나 우쭐했겠습니까? 웃사는 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멘 소를 웃사와 그 형제 아효가 몰고 나섰습니다. 웃사로서는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트럼펫이 울리고 합창단이 찬양을 합니다. 그야말로 축제였습니다. 그렇게 한 3km를 갔습니다. 길이 험해지더니 소가 뛰는 통에 궤를 실은 수레가 기우뚱하여 궤가 떨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깜짝 놀란 웃사가 급히 궤를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축제는 일시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백성들은 우르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너무 놀라서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하던 궤는 일단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임시 보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황당한 사건이었으므로 그 진상 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오래 있지 않았습니다. 석 달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게 되었는데 이때 다윗은 심지어 겉옷까지 벗어던지고 속 옷  바람으로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웃사처럼 하나님께 진노를 받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사건인데 어째서 웃사는 거기서 죽었고 다윗은 아무 탈이 없었습니까?


3. 웃사는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단지 나무로 된 상자였지만 그것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그것을 마치 무슨 짐짝 취급하듯 수레에 실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짓밟았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궤는 수레에 싣도록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메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수레에 실은 것은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럴테면 편의주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도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시고도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신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리한대로 지름길을 택하라는 유혹자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우리 주변의 교계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편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오던 많은 것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가 어렵다고 금요일에 예배드리는 일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교회까지 나가는 수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면서 생긴 것이 소위 “사이버 처치”입니다. 집안에서 텔레비전 통해서 설교 듣고, 헌금은 계좌로 송금하면 됩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도 살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찬양 예배도 언젠가는 살아지고 말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상품취급하고, 자기 편리한대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모든 행동, 모든 사람들이 다 웃사의 후예들입니다.

   웃사를 대하여 매우 가혹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는 후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율법도 다 무시하고 자기 임의대로, 그리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를 들어내려고 했던 웃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하는 이 무서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웃사사건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옮기기는 하되 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다른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방법대로 했습니다. 수레에 싣고 소로 운송케 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직접 어깨로 메었습니다. 자기 편리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몰아 달려가면 삽시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이 궤를 메고 여섯 발자국 갈 쩍 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속도와 성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오히려 “느리게”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속도전이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느림의 행동입니다. 베드로가 속도와 성과에 집착하여 십자가를 피할 것을 권했을 때  우리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행동을 보십시오. 나중에 다윗의 아내 미갈도 이런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윗의 행동을 비난했던 미갈은 평생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다윗이 그와 함께 잠자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다윗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 겉옷도 벗어 던진 채 힘껏 춤을 추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 같은데도 하나님은 웃사처럼 다윗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아들이 독일 먼저 가고 자부와 손자들이 우리와 6개월을 같이 지냈습니다. 큰 손자 한슬이가 겨우 말을 할 때인데 내가 출근 후 한나절 기다리다 내가 식사시간이 되어 돌아올 때가 가까워지면 현관 근처에서 기다립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아버지”란 호칭은 길어서 못하고, “할배, 할배”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매달립니다. 내 옷에 침이 묻고 코가 묻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책망하겠습니까? 나도 덩달아 좋아서 그놈을 번쩍 들어앉고 같이 들어갑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되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기쁨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춤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임재가 좋아서 춤을 추는 다윗을 하나님인들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윗을 싫어하거나 책망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토록 소원하였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엄마 아빠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옆에 있기만 해도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제 혼자서 흥얼거리며 잘도 놉니다. 다윗은 이제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국극적인 목적으로 삼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럴 때 성도 여러분도 다윗처럼 춤을 추며 여호와의 임재를 찬양하고 기뻐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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