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라! (눅 15:11-24)

  • 잡초 잡초
  • 455
  • 0

첨부 1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라! (눅 15:11-24)

영철이 친구가 영철이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영철이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거기 영철이네 집이지요?"
"아니다.  내 집이다"

여러분, 이런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은 곧 내 집입니다.  아버지가 주는 모든 자원과 권세와 능력과 축복, 이 모든 것은 곧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가질 수 있는 저주 가운데 저주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우리가 자녀된 권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무섭고 엄하기만 하신 진노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불경죄로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모든 자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의 말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쓴 동시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셨을까?
나를 자세히 쳐다보시기 위하여.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에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사랑하는 여러분, 한자에 어버이 친(親)자를 아십니까?
나무 목(木) 변에 설립(立)자를 위에 붙이고 볼 견(見)자를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우뚝 서서 자식이 어디에 있나, 자식이 무엇을 하나 찾아보기 위하여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바로 어버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다가 먼 산을 바라보며 늘어진 목을 길게 뻗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는 그 모습 속에 어버이 친자가 생생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집 나간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아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본문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그러나 잃은 양의 비유라고 하기보다는 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 비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러나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라고 하기보다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 나서는 여인의 심정 비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그러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과 애절함을 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비유입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독특한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누가 신학의 전체적인 틀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누가 신학의 주제는 잃어버린 영혼,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어디에도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인들을 향해서 탕자라고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잃은 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본문의 비유를 보면 시작 부분에 맏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론 부분에 가서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가 누구이며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의 주인공은 집 나간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살아간다고 할 때에 나는 어떤 마음, 어떤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그 아버지의 자녀된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갈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왜요?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요?  교회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장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된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자식은 그 아버지를 닮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어느 듯 자신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경험들이 풍요로움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건강한 인격의 소유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경험들이 작은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은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서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어린 시절 아버지의 경험이 어떠하냐의 여하에 따라서 내 인생과 신앙생활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존 홉킨슨 의과대학은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나쁜 관계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에 고혈압, 동맥관상질병, 각종 암, 우울증과 자살 등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낮은 자존감, 낮은 성취욕, 유혹에 쉽게 넘어감, 의지박약증, 이런 것들도 부모와의 좋지 못한 관계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자기 몸과 마음과 삶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함부로 살아가는 삶의 행동들, 이 모든 것이 어버이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버이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감정, 가장 아픈 상처의 밑바닥에는 어버이로부터 받은 거절 감정이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상처가 치료되지 못할 때에 삶에서 무서운 성품의 행태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이 상해집니다.  자신이 용납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 극한의 비난과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분노를 드러냅니다.

때로는 애증에 굶주려합니다.  조금만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착증을 드러냅니다.  쉽게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때로 일에 몰두하여 성공하기도 하고 봉사사업을 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고 성공적인 야망, 인정과 존경의 욕구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한 의지와 집착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의 작은 실수에도 야단과 저주를 퍼부어 댑니다.  화를 쏟아냅니다.  쉽게 실망합니다.  또 다른 거절 감정을 자녀들에게 남기게 됩니다.  거절의 신화를 자녀들에게 이어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가문의 씨를 뿌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는 되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어머니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배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에 무서운 저주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식을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오.  이처럼 손해 보는 장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을, 환경을, 정성을 다 쏟아 부어 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보상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닫고 마냥 감사해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은 이 모든 환경이 저절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이 단순히 내가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사랑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식들은 부모 곁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곁을 떠나겠다는 인생의 몸부림, 떠난 그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애절한 심정.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성경의 밑바닥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핵심일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풍요로움도 모자라서 선악과를 먹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  아버지를 떠나서 나는 성공하고 싶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본문의 이 아들을 보십시오.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 재산의 처리권까지 요구합니다.  지금도 그 풍습이 남아있지만 중동에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아직도 살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내 놓으라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하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여기에서 '다'라는 표현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미련, 가정을 향한 미련과 같은 모든 것을 다 싸 가지고 자기 혼자 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먼 나라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면 먼 나라는 바로 사단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먼 나라 사단의 나라입니다.  사단의 나라는 용서가 없는 먼 나라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는 먼 나라입니다.  평화가 없는 먼 나라입니다.  나를 파괴하고 가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먼 나라입니다.

오늘도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먼 나라로 가라.  너는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어.  하지마 하지마.  먹지마 먹지마.  지겹지도 않니?  너 혼자서 독립할 수 있어.  너는 성숙한 사람이야.  너는 어린애니?  너 혼자 독립해서 하나님 없이 잘 살아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가능한 한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마귀의 유혹입니다.

사단이 우리 인생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스스로를 의지해서 살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진정한 독립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13절 이하를 보십시오.  재산을 다 싸 가지고 먼 나라로 갔던 이 아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여기에서는 아들이 허랑방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허랑방탕하다는 것은 무조건 술을 먹고 창기와 놀았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고 헛된 일에 종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가지고 마음대로 낭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한 번 잘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갔을 때에는 단순히 쾌락을 즐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이 없는 자신의 힘으로 꿈과 목적을 이루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도 이 아들이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가지고 간 재산을 다 잃을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속아줍니다.  아니 믿어주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왜요?  자식은 재산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버리고 아들을 얻겠다는 겁니다.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도 우리를 얻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식을 공부나, 성취나, 업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그냥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 만나는 것입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성가한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자식 하나가 있는 것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하겠다고 떼를 씁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업 자금을 만들어주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업이 어려워져서 하나있는 빌딩까지 팔아치웠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 사업하는 거 망할 줄 몰랐습니까?"
"알았지요."
"아는데 왜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시고 빌딩까지 팔도록 허락했습니까?"

"줘야지요.  안주면 원수가 되는 걸요.  망할 것 알면서도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 그 자식은 내 아들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이 아들은 나를 돈 많은 과부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빌딩 주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사업이 어려워져서 빌딩까지 팔고 나니 그 자식이 아들이 되어서 돌아온 겁니다.  그때부터 나를 어미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재산을 다 버리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던 이 아들이 돈을 다 써버렸을 때 남은 것은 고독과 흉년으로 인한 궁핍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어떻게든지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쳐 본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어떻게 해 보려고 했던 이 아들, 그가 처절한 고독과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있을 때에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본분에 보면 그제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지.  미리 각본을 써봅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적으로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를 모르는 잔인한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오늘도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식에게 재산을 다 싸 짊어 주면서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돌아올 때까지 나는 기다릴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아들이 돌아와서 잘못을 고백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그 시간부터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동네 어귀에서 거지같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한 눈에 알아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곧장 달려갔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달려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려갑니다.  아버지의 자존심도 내려놓습니다.  왜요?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왜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니까 자신을 싫다고 거절하는 남자를 쫓아다니는 여동생을 보고 오빠가 한 마디 합니다.
"야, 너는 자존심도 없냐?"
그랬더니 이 여동생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대답합니다.
"오빠, 사랑해 봐.  자존심이 보이지 않아."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심정을 이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측은히' 'compassion'.  'com' '함께', 'passion' '고통을 느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파할 때에 아버지는 더 아파했습니다.  아십니까?  내가 힘들어 할 때에 내 아버지는 더 힘들어합니다.  내 약점 때문에 오늘도 애처롭게, 안쓰럽게 바라보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고, 자식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나 때문에 눈물지으시며 아파하시는 그분의 심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compassion',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겼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면 돌아오는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면서 찾는 것은 단순히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본문 17절부터 계속해서 반복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로,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이라,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버림받은 아들의 쉼터였습니다.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마음은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간 자식,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 망해 버린 못난 자식.  그것 봐라, 나를 버리고 떠난 놈은 십리도 못 가서 발 병 난다.  이것이 인간의 심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보십시오.  무조건 받아줍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은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냄새나는 그 자식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한 번 안아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녹여버립니다.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 놓고 기다린 아버지의 품,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져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식이 잃어버린 돈을 모조리 찾아놓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환경이 좋아져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렸던 건강이 온전하게 회복되어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이 돌아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아버지와 자식의 만남이라는 한 가지 행복 때문에 이 가정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빌 하이블즈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건강한 교회가 균형 잡힌 교회인 줄로 알았다.
건강한 성품이 균형 잡힌 성품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있을 때에 균형 감각을 상실하더라.
아버지의 가슴앓이, 아버지의 진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한 성품이요, 그런 교회가 건강 교회인 줄 알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도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너는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이 가을에 나는 너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기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내 가슴에 모난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말고 풍성한 아버지의 마음을 안고 이 땅에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십시오.  부모가 자식을 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젊고 많이 배운 자식이 늙어 가는 내 어버이를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셀리더가 셀 가족을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모든 셀가족이 셀리더를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남편이 함께 늙어 가는 아내를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내가 힘들어하는 남편을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목사와 교회가 성도를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가 교회와 목사를 바라볼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내 속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중요한 바로메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의 약점과 허물이 보일 때에, 교회의 실수가 보일 때에 여러분의 마음이 불편해지던가요?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던가요?  아버지의 마음이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교회의 약점을 가슴에 품을 수 있던가요?  목사의 허물을 품어줄 수 있던가요?  교회의 부족함이, 허물이, 약점이 내 약점처럼 아파서 그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던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책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그 가운데 보면 아버지의 우상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을 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부대를 어깨에 걸머지고 쇳조각, 유리병을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린 나는 마냥 창피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 공부를 해야 하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며 공부를 방해하는 겁니다.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받아도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나셨는지 횅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 골목 저 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 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허덕대며 우산을 쓰고 그 아들을 위해서 지붕을 수리하고 행여나 내 머리에 물방울이 떨어질까봐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아버지.  비를 흠뻑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 겁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눈물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 주님.  이 땅에 상처난 아버지의 가슴들을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들의 심장에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