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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알거니와 (롬 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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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거니와 (롬 8:28~30)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생들과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들 스스로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의 하나님이 아니고 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선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뜻대로 동원됩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으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병행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제한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역으로 생각해야 될 이유는 우리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을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게 하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누구나 부담없이 쉽게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Ⅱ.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8장 28절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즉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 (pavnta sunergei' eij" ajgaqovn)'을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가 선한 목표를 향하여 함께 협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선을 위해 일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의 선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사역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즉 '토브 (b/f)'라는 말이 동사로 될 때는 ① 좋다. 선하다(욥 13:9) ② 아름답다(민 24:5) ③ 즐겁다(아 4:10) ④ 유쾌하다(삼상 25:36)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이 형용사로 될 때는 ① 좋은(창 1:12) ② 친절한, 선한(잠 18:5) ③ 아름다운(창 6:2) ④ 향기로운 (렘 6:20) ⑤ 위대한, 탁월한(시 69:17) 이라는 말이 됩니다.
선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① 뜻(의지)의 자유입니다. ② 의지적용의 자유입니다. ③ 의지적용의 결과 성취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창조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속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약시대에는 법궤로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이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고 확증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시키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광범위한 유형무형의 모든 자원입니다. 금세와 내세와 천하의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과 표면적인 것과 이면적인 모든 것입니다.
모든 희노애락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희락, 불행, 슬픔, 고통, 질병, 환란, 성공, 실패, 죽음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계에 일어나는 현상들과 영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부한 것과 가난한 것과 친구와 원수와 온갖 불의한 것과 온갖 영예로운 것을 다 포함합니다.
비록 악하고 추하다 할지라도 자기 백성의 구원 완성의 수단으로 선용된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온 천하 만물이 다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증거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선한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갑니다.
(1) 천사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구원받을 성도들을 수종드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1절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1절에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라고 했습니다.

(2) 주의 종(교역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교역자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3) 우리의 거룩한 가정입니다.
온전한 크리스챤의 가정은 최소단위의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는 가정은 최소단위의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가정의 질서와 경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4) 발달한 과학문명입니다.
과학지상주의는 기독교의 적입니다. 첨단과학이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왜곡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상의 발달한 과학문명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하고 교회운동과 세계복음 선교활동에 유익을 줍니다.

(5) 세상에 있는 다양한 기능입니다.
성도가 아니라도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기능 즉 인적자원, 물적자원, 공간자원은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데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히 필요한 것이 아니고 택자를 불러 구원하는 교회운동이 존재하는 날까지만 필요합니다.
세상의 과학문명이나 정치권력구조나 사회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선용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모순입니다. 그렇다고 필요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택자 구원운동 즉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데 선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정도를 벗어나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든 것이 선하다고 했습니다(딤전 4:4).

2) 악한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갑니다.
(1) 죄로 인한 고통입니다.
잠언 18장 14절에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의 고통은 죄인에게 임하는 축복이요 소망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 때문에 슬퍼하고 있을 때가 행복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을 찾게 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서 회개할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2) 질병으로 인한 아픔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없이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주께서 바울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이 자신의 재산을 다 허비했으나 많은 의원들은 그 여인을 고치지 못하고 괴로움만 더해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막 5:27).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의 능력으로 인해 혈루의 근원이 말라버리고 그 병에서 자유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막 5:34).
육신의 병이나 육신의 연약으로 인해 병원에 가 본 사람이나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누워 본 사람은 인간의 육신이 내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질병은 곧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을 요청하는 기회가 됩니다.

(3) 죽음으로 인한 애통입니다.
죽음이라는 정체는 인생의 가장 무서운 원수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결국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부활을 얻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 때문에 영생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성도의 죽음은 고통의 끝이요 영원한 평안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데 선용되고 있습니다.

Ⅲ. 모든 것이 합력하여 구원을 성취 시킨다는 사실입니다.

1)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기원이 영원 전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33편 11절에『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은 불변하십니다.
이사야 14장 2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6장 11절에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주권적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가 형인데도 불구하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제비 뽑아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사도로 선택했습니다(행 1:24-26).
하나님은 선민 구원을 위하여 역사상에 나타난 제국들을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협조하여 잘 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1)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비통한 슬픔에서부터 출발할 때도 있습니다.
창세기 37장 35절에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그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애처 라헬이 낳은 아들입니다. 야곱은 모든 자식들 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 그에게 채색 옷을 입히는가하면 야곱이 특별히 요셉을 사랑하여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창 37:4, 23). 이러한 일이 계속되는 동안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요셉은 꿈을 꾸고 자기 형제들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7장 7절에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형들은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 마침내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구덩이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이복형들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겼다고 야곱에게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옷을 확인한 야곱은 악한 짐승에게 찢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다스리지 못하여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했습니다(창 37:34).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보디발 장관의 집에서 하인에서부터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그의 출세 과정은 꿈을 해석해서 얻은 것이었으나 알고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였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피 묻은 옷을 보고 애통하고 슬퍼하던 그 시간은 자기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환난 날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죽음의 위기를 통해서 성취될 때도 있습니다.
에스더 3장 13절에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 월 곧 아달 월 십삼 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그 부하 하만이 앙심을 품고 왕의 조서를 받아 유다인을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려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로 에스더가 간택이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후에 모르드개도 페르시아의 고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으로서 페르시아 최고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왕은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을 모든 신하 위에 높이 두었습니다. 대궐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들은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했습니다(에 3:2). 만이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경배를 요구하는 행위는 모르드개로서는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계명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만은 앙심을 품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한 것으로 여기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했습니다(에 3:6).

당시에 페르시아 전역에 유대인 인구는 약 삼백만 정도로 추산됩니다. 하만은 그들을 결코 간단하게 처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만이 왕의 허락을 받는데는 그렇게 어렵지 아니했습니다. 이 일은 단순히 하만과 모르드개의 싸움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이며 기스의 증손이라고 그의 신분을 언급했습니다. 하만을 유대인의 대적 곧 아각사람 하만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이 사건은 구속사적인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아각 사람은 일찍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진로를 방해하는가 하면 악랄한 공격을 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출 17:8-13; 신 25:17-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상에서 멸절될 자들로 선언하셨습니다(출 17:14;신 25:19).

그들은 결국 사울(삼상 15:5)과 다윗(삼하 8:11, 12)에 의해 진멸되었지만 완전히 진멸하지는 못했습니다(삼상 15:9). 그 남은 자 중에 한 사람이 바로 하만이었습니다. 악한 세력 사탄은 하만의 조상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진멸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다시 남은 자손 하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삿 3:13, 6:3-6). 모르드개가 이 일을 알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유대인과 함께 애통해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하만은 얼굴이 싸인 채로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나무에 자기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왕은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만에게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신구약 성경 66권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해서 Let it be 사고나 숙명론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인생 70이 되면 무엇을 하든지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된다는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했습니다.
공자 외에 많은 타락한 인생들에게 불가능한 말입니다. 오히려 외식과 거짓을 조장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날로날로 성화되는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궤도입니다.

아우슈비츠 대표적인 수기 '나이트(Night)'를 쓴 엘리위젤은 눈 앞에서 아버지가 맞아 죽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가스실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후에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학살이 진행될 때 많은 유럽인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학살은 나치만의 책임이 아니다. 침묵은 학살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전시 때는 아군 아니면 적군이다. 인간이 목숨과 존엄성이 위협받을 때는 국경을 초월해 나서야 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우리에게 합력을 요구하는데도 침묵하거나 방관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마귀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앞에 고상한 이기주의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명하는 바를 좇아 거침없이 나아갈 때 모든 것이 잘되는 이른바 만사형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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