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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벽을 넘어 축복으로 (눅 19:1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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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눅 19 : 1 - 10 
제목 : 장벽을 넘어 축복으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라는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단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성공을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인생에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이미 어떤 환경과 재능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을 가집니까?  그렇게 준비된 환경과 재능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성공에 대한 생각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인생에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월리암 제임스가 이런 말을 했지요?  “무엇을 할려고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구실을 찾아낸다.”

우리가 볼 때에,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은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성공한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는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못한 환경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보다 더 심한 빈곤과 무지, 더 심한 절망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와 다른 공통적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태양이 어느 쪽에 빛나든, 그 태양을 향해, 그 기회의 빛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햇빛을 향해 자라나는 식물처럼, 그들은 현재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깨지지 않는 하나의 규칙을 따릅니다. 
그 규칙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들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인생의 반환점은 돌았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인생의 성적표를 바라볼 때에, 느끼는 감정이 어떠합니까?
썩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사람은, 여러분 가운데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인생 성적표의 성적을, 좀더 향상시키기를 소원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벌써 들어버린 나이 때문에, 또는 이미 굳어진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성적표를 그대로 지닌 채,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인생을 포기하고 마감한다 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고, 환경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희망의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젊었을 때에 그 태양은 언제나 중천에 떠 있을 줄로만 생각을 하고, 인생의 걸음을 더디 했지만, 그 희망의 태양은 기다려 주질 아니하고, 이제 저무는  가운데 황혼의 빛만을 남겨둔 채, 인생에게 한숨만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고, 또 어떤 분은 벌써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신앙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태양이 무엇입니까?  그 태양은 바로 하나님이요, 그 태양은 바로, 믿음으로 인한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그 태양은 저물어 가는 우리 인생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그 소망의 태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런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성공을 뛰어넘어, 인생의 축복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성공이, 곧 인생의 축복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소망적인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세상적으로도 성공할 것이고, 또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여러분만 아니라, 여러분 주변에 있는 모두에게도  그 축복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삶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현재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런 성공적인 인생,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님의 축복으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경영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는 무엇이 성공의 걸림돌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무능력입니까?  아니면 주변의 환경입니까?  주변의 환경이,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성공으로, 축복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듭니까?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을 삶의 모습이든,  신앙의 모습이든, 여러분을 실패의 자리로 이끈 것은, 자신의 무능력도 아니요, 주변의 환경도, 주변의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내 인생과 나의 신앙을 실패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 곧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요, 또한 나를 향한 믿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축복하신다는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출 19 : 5절 말씀을 보세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에 보게 되면, “트레줘, 곧 보물”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라고 하는 이 말씀은,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보물이  되겠고” 라는 뜻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보물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보물을  어떻게 관리하시겠습니까?  그저 방치해 놓으시겠습니까?  물론 그것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깊숙한 곳에 숨겨 둘 것입니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그것을 꺼내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더욱 더 빛이 날 수 있도록, 잘 닦아 놓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오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을 보물처럼 아끼시고, 우리를 더욱 더 빛이 나게 닦으시고, 우리들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늘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을 더욱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며, 그 모습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우뚝 세워 자랑하고 싶어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귀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 마음에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여리고 라는 마을을 지나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의미가 있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 기간을 보내시면서, 결코 헛된 말이나, 헛된 행동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 가셨을까?  그 바쁜 스케줄 속에,  왜 하필이면 이방 땅인 여리고로 들어가는 스케줄을 잡아 놓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삭개오라고 하는, 한 인물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세리의 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세리와는 같이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세리의 가족과는 결혼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완전 소외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삭개오를, 예수님은 만나주시기 위해, 일부로 여리고로 들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는, 결코 우연이란 없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내 의지로, 내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도 아니요, 내 의지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를 만나시기를 원하셨고, 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기 때문에, 나를 만나러 내 심령 가운데로 찾아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코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나를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을 만한 선이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죄악된 모습으로 살고 있던 내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내 심령을 감동 시켜서,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유대인들은 들어가기를 꺼려했던, 사마리아 땅에도 들어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천대받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뙤약볕이 쏟아지는 아무도 없는 그 우물가에서, 먼저 그 여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만나 주셨고, 그 여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들이 새로운 신앙으로 성공적이요, 축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이 은혜를 새롭게 되새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삭개오나, 또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처럼,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들을 물리치며 주께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 앞에 놓여진, 여러 가지 인생의 장벽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난,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에게는 어떤 인생의 장벽이 있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있는 인생의 헨디켑을 제거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째로, 삭개오에게 있어서 인생의 장벽은, 키가 작다는 신체적인 헨디켑  이었습니다.  자신은 키가 작아서,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볼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삭개오에게는, 어떠한 인생의 장벽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외부적인 장벽, 환경에 의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자신이 키가 좀 작아도,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자신의 헨디켑을, 남들과 비교해 보아 전혀 나을 것이 없는 무능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외부적인 환경도 전혀 자기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절망 가운데 빠트리고 있다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뒤 돌아서고 만다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포기한다고 좋아집니까?  마음이 편안해 집니까?  오히려 더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해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이러한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사람이 많아 할 수 없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결코 뒤 돌아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한번 따라하실까요?  “앞으로 달려가” 
오히려 앞으로 달려 나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처럼 어떤 경우에라도 물러서지 말고, 앞으로 달려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무능력한 헨디켑이 있습니까?  남들보다 못한 조건 속에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앞으로 달려 나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노력을 가로막고 절망을 주는, 외부적인 환경이 있습니까?
그래도 삭개오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앞으로 달려 나갔겠습니까?
그것은 한 그루의 뽕나무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또 왜 삭개오는 그 뽕나무를 향해 달려갔을까요?  그 뽕나무는, 삭개오의 키가 작은 헨디켑과,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던 외부적인 환경마저도 극복케 해주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세요.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목에, 뽕나무는 위치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벽을 뛰어넘고, 자신 앞에 놓여진 한 그루의 뽕나무로  올라갔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성공과 축복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좀더 적극적인 신앙, 전진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 되는 거지” 이런 식의 소극적인 신앙생활에서, 이제는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꼭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신앙과 믿음으로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여러분도 삭개오와 같이 뽕나무로 올라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지닌 문제점들을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목에,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목에, 뽕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뽕나무가 무엇입니까? 
따라합시다.  “그 뽕나무는, 기도의 시간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뽕나무는, 다름 아닌, 새벽 기도의 시간이요, 다름 아닌 금요 합심 기도의 시간이요, 다름 아닌  여러분이 골방에서 가지는, 작정 기도의 시간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시 121 : 1 - 2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렐루야!!!

또 렘 33 : 3절에도 말씀하지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1부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들만 아니라, 우리 성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 만날 수 있는 수단인, 이런 기도의 뽕나무에 올라가서, 능력의 예수님을 만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 5절, 6절 말씀에 보세요.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주님의 감동하심과, 자신의 헨디켑과, 외부적인 장벽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그토록 소원하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졌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변화되게 되었습니까?  그에게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했다.” 고 했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알았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사귀어 보니까, 소문보다 훨씬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따돌리고 외면했었는데, 예수님은 죄인 된  자신을 만나주시고, 자신의 집에까지 들어와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누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이런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서, 삭개오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내가 예수를 아는 것과 그 분을 만나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예수 그 분을 만나는 것과, 사귀는 것은 또 분명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주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도를 통해 주님과  산 사귐을 가지는 일은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변화되어지고, 우리가 변화될 때, 인생도 변화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크리스챤이 된 삭개오에게, 그의 인생의 장벽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장벽이 남아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장벽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속에 있는 “욕심” 이라는 장벽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현대의 크리스챤들은, 바로 오늘 본문의 7절 말씀을 유념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무슨 말입니까?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은 크게 은혜를 입고 기뻐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하는 것” 이라고 말을 합니다.그래서인지 개개인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은혜의 체험도 있고, 신앙생활의 기쁨도 누리며 살아갑니다.
누구도 그들은 언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이웃의 시선이나,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선은 왠일인지  여전히 냉소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화 되지 못한 죄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지금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을 향해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죄인의 집”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 집에는 예수님이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집을 향해  죄인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예수님이 거하는 집이 죄인의 집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삭개오가 가진 세상의 욕심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 의인의 심령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법의 가치관과 도덕적인 가치관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 의인의 가정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직장이나,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를 분명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죄인이라고  수군거린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성공과 축복을 향한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장벽에 가로막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러한 자신의 속에 있는,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장벽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제가지 자신이 추구해 왔던, 세상 재물에 대한 헛된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그 남은 장벽마저도 허물기로 작정합니다.
여러분, 8절 말씀을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가 하는 이 말이, 단순히 사람들이 수군거림으로 인해 예수님을 대접하는 자리가 민망해서,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한번 해본 말  이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그렇게 느껴지는 분이 계시다면, 그 속에 있는 세상 욕심을 버리기 싫어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결코 그냥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삭개오가 서서 여짜오되” 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서서 이야기 했다는 말은, 굳은 결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의 4배나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삭개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별로 남는 것이 없을 줄 압니다.  이는 삭개오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세리입니다. 그것도 세리장입니다.
손익 계산이 분명한 사람이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이 욕심이 계속 자신의 속에 있어 자신을 지배하는 이상, 더 이상 예수님과의 관계가 진전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약 1 :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봅시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이,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싫은 소리를 듣습니까?  왜 나에게는 기도의 응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매일의 삶에 나타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장벽, “세상의 정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새로운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 그 속에 있는 욕심의 장벽을 허물어 내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죄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제는 삭개오와 같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으로 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찰스 피니는 말하기를, “문제는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재생되지 않는 점에서 더 비난받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트레이 목사도, “신앙부흥은 이미 생명을 소유했던 사람을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영적인 삶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성공과 축복으로 가는 길의 최대의 장벽은, 자신의 무능력도 아닙니다.  그리고 외적인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의 최대의 장벽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욕심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우리 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한, 우리의 인생은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변화 없는 그저 나 하나만 만족케 하는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고, 삭개오와 같이 이제까지 축복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인생의 장벽들을 제거하시고, 특별히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므로, 여러분의 앞날이, 축복의 날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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