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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의 힘 (삿 16: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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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삿 16 : 25 - 30
제 목 : 삼손의 힘

삼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가장 힘센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  구지 성경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화를  통해서나, 또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고 있지요.
어쨌든 삼손하면,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연상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가 왜 이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이었습니까?  아니면 운동을 많이 해서 후천적으로 힘이 세어진 것입니까?  삼손이 힘이 이처럼 세었던 것은, 그가 타고났거나, 육체적으로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힘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힘을 한 번 쓸 때에, 몇 명이 나가 떨어졌습니까?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 가지고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는데,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해 그들을 다 멸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천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삼손이었다는 것이지요.

자, 그런데, 이런 삼손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우리도 신앙생활 가운데, 이런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야와 같은 능력의 소유자, 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삼손과 같은 강력한 힘의 소유자, 그래서 좀 힘이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신앙의 파워를 보여 줄 수 있는,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이런 모습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정말 이 세상을 우리가 확 뒤집어 놓을 수 있을텐데.

그러나 오늘 우리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바라볼 때에 어떻습니까? 
이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너무나도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평범하지요.  아니 어떤 경우에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무능력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이런 인물들을 통해 도전을 받기보다는, “과연 나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될까?”  라고 하는, 염려와 의심, 더 나아가  신앙의 회의에 빠지는 분들도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어지면, 오늘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또 보통 이하의 연약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삼손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삿 13 : 24 - 25절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감동되었다.  여호와의 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다시 말해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로, 보통 사람이었던 삼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강한 자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에 불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감동되었을 때에, 성령이 임했을 때에,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졌고, 세상을 이기는 강한 자가 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에게만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소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내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입니다. 아멘!!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그 거룩한 능력을, 결코 아무에게나 허락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성도들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을, 이 성령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이러한 능력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삼손은 바로 이 자격을 갖추었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자격을 갖추었기에,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이 임하게 되었던 것이고,  또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도, 이런 자격을 신앙생활 가운데 갖추게 될 때에, 삼손과 동일한 능력을, 우리 또한 소유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셨던 그 자격이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사사기에 나타난 삼손의 삶을 통해, 그 자격의 요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삼손의 삶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을 때,  또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회복했을 때,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처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임했을 때, 그가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삿 13 : 25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여러분, 이 구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될 단어는 어떤 단어이겠습니까?  “비로소”라는 단어입니다.

비로소 감동했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느 특정한 때에” 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삼손이라 할지라도, 아무 때나 이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성령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어느 특정한 때에, 비로소 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 삼손에게, 이 성령을 허락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삼손에게 사명이 있을 때에, 성령은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삼손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명입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방인인 블레셋의 군대로부터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이 충만했습니다.  바로 이 사명감이 삼손에게 있을 때에, 성령은 그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했습니다.
또, “일 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주를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은 전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며, 말없이 겸손하게 교회 안에서, 희생하며 봉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나타날 때에,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가 감당하는 그 모든 일들을 끝까지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무성의하고, 나의 일에만 열심인 사람에게는, 그저 돈 모으고, 자신의 이름 날리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일과 헛된 시간에 정력을 소모하고 낭비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 성령이 임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사 임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때에는, 곧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세상에 속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인생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그래도 하나님께 속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에 잘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린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잘 나와도,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그의 관심이, 그의 중심이  여전히 세상 것들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면, 그는 세상에 속한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신앙이 세상에 속한 신앙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신앙인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기도의 주된 내용들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마 6 : 33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했습니다.

똑같이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이 불같이 임하고, 똑같이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냉랭함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화가 날 때도 있지요. “아니, 하나님 차별하시는 겁니까?  왜 아무개 집사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주시고, 왜 나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나도 기도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때로 차별화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일반적인 사랑과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고루 베풀어주시지만, 성령의 능력과 같은 특별한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시질 않습니다. 
누구에게 주십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이 특심인 사람에게만, 이 성령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똑같이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내 가정, 내 남편, 내 사업, 내 자식, 계속해서 자기를 향하여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를 연발합니다.

자, 과연 이러한 기도를 들으실 때에,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먼저 들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누구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먼저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줍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시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달란트를 어찌했습니까?  그냥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돌아와 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마 25 : 26절 이하에 보세요.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었습니까?  아니요?  있는 떡 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떡 빼앗아 어떻게 했습니까?  사랑하는 놈에게, 놈 하니까  좀 그러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러나 어떤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까?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에게 덤으로 더 주셨다는 것이예요  결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니, 주고 싶어도 못 줍니다.  왜요?  그 떡 먹으면, 반드시 체하기 때문에.  감당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일에 쓰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주시는 겁니다.  아니 못 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령을 사모하고, 충만하기를 소원하고 있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명감이 없이, 단순히 개인의 영적 만족을 위해 사사로이 성령을 구하기 때문에, 그 중심을 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성령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일에 열심이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내 일 다 뒤로하고,  하나님의 일에만 매달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삼손이 어디 그랬습니까? 
그도 평상시엔 자기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그 생각에는, 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삼손의 바로 그 마음을 보셨다는 겁니다.  그 중심을 보신 하나님께서, 삼손이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그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에서도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며 기도하기를 소원하는 분들에게, 사명감을 가지고 이를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그 심령 가운데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했을 때에 어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위한 사명감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그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블레셋의 여자,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한 삶을 살아갔을 때는 여지없이 그 성령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삼손에게는 금해진 것이 두 가지가 있었지요?  하나는 독주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일이고,  또 하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과 정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두 가지의 약속을 깨뜨렸을 때에, 하나님은 허락하셨던 그 성령을, 거두어 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삼손에게는 여전히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감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타오른다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자를 향하여 분노할 줄 알았고, 그래서 나귀 뼈로 일천 명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염려도 여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열심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순종 가운데, 머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냅니다.  교회에서 맡긴 일에 열심입니다.  기도하는 일에, 또 예배하는 일에도 열심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 칭찬 할만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인데도, 정작 자신은 마음은 기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피곤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 이러한 경험을 하고 계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데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금하신 독주와 포도주를 즐기고 있고,  마땅히 길러야 할 머리털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교회에서는 신앙적인데, 세상에서는 다릅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  갑니다.  분명 하나님이 금한 일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요한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그것을 모른 채 하고 행합니다. 
마땅히 신앙적인 요소들의 성장이, 자람이 있어야 하는데, 삼손의 머리털을 잘라 버리듯이 세상의 요구에 의해 신앙적인 요소들을 잘라내며, 이방 여인 들릴라의 품에 안기듯이, 세상의 품에 안기고 말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내 삶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이 되기 때문에, 내가 여전히 교회의 일에 열심을 내어도, 아니 전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해 나가도, 내 마음에는 기쁨이 없고, 내 신앙 가운데는 열매가 없고, 내 삶에는 도무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질 않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린 삼손의 모습과도 같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삼손,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두 눈을 뽑혀 버렸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불순종하면, 이처럼 영안이 어둡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앞일을 예견할 수 없게 되어집니다.  또, 삼손은 쇠사슬에 묶여 지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고 말면, 다시금 죄에 묶여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고 나니까, 악한 영이 나를 묶여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악한 영이 나를 묶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있기에 쉽게 끊어 버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전혀 힘쓸 수가 없어, 그대로 묶인 채, 끌려가지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 삼손은 어두운 감옥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계속적인 불순종 가운데, 죄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인생이 어둡게 되어져 고통과 절망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내 삶 속에 기쁨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에, 슬픔과 걱정과 근심이 내 속에 있게 암울한 삶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이와 같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일,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내 열심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꼭 기도해야 하고, 꼭 능력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까?  왜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있어야, 내게 맡겨주신 그 일을, 내가 맡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의 현재 신앙 상태는 어떠합니까?  적어도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며 기도하는 여러분들은, 교회 일에 대해서는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삼손과 같은 나실인이요, 하나님의 사명을 간직한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들을 들어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과거에도 여러분들을 사용하셨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여러분들을 들어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러나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능력을 상실한 삼손과 같이 지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이 다운된 분들이 계십니까?  예전에 누렸던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 신앙의 감격, 신앙의 능력, 이러한 것을 상실한 채로 지금  현재에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만약 그런 분들이 계실지라도, 그냥 주저앉지 마시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원인을 깨닫는 가운데,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손과 같이 능력을 상실했을지라도, 다시금 하나님을 부르며 일어서는 모습이 여러분에게 있을 때에, 신앙생활의 원동력인 성령을, 다시금 공급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삼손의 형편을 살펴 볼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능력을 회복했을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삼손에게 언제 능력이 다시금 임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 그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이 임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위에 있는 22절 말씀을 보게 되면,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그가 나실인으로 지켜야 될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능력의 근원인 머리가 잘리웠지만, 하나님은 회개하는 삼손의 머리를 다시금 자라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잘리면 그 다음에 자라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성경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힘의 근원이 머리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 힘의 근원이 다시 자라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아마 자란다면 금새 다시 잘라내었을 겁니다.  그러나 삼손의 머리는 자라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삼손이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머리를 자라게 해 주셨는데, 보통의 자라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라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빠른 능력의 회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그 죄에 대해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죄를 깨닫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에게는 은혜를 주시되, 다시금 빠르게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가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부지중에, 또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이렇게 자신 할 수 있겠습니까? 
롬 3 :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은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금 잃어버린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스스로가 이런 죄인 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은 아직도 괜찮은 신앙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한 채, 여전히  무능력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가 신앙생활에  어떤 룰을 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괜찮지만, 직분자는 달라야 돼.  또 직분자는 괜찮지만, 중직자는 달라야 돼.  또 중직자는 괜찮지만 교역자는 달라야 돼.  이런 룰을 정해 놓고, 이 룰을 넘어서면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향하여는, 이정도면 괜찮다고 늘 자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직분으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성도로서, 모든 이들을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죄가 있다면, 그 죄에 대해서는 직분을 막론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남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남의 허물과, 약점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속사람을, 우리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바라보며, 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다가와 주셔서, 그를 붙잡아 일으켜 주시고, 잃어버렸던 능력을  다시금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 용서의 은혜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자람이, 훨씬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 범죄한 부분은 없는지, 여러분의 심령에 질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상실되어져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웃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지금 현재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신앙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상에 깊이 빠져 나실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될 죄를 짓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의 모든 죄의 모습들을, 다 드러내 놓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한 심령 위에, 또 우리 성천 교회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새롭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지요.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무슨 말입니까?
회복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금 교회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회복의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 삼손과 같이 힘을 다하여 몸을 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주 앞에 낮아지시고, 엎드린 종 된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을 보세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처럼,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허리를 굽혀 교회 앞에 충성된 모습으로 다시금 힘을 내게 될 때에, 우리의 능력을  상실케 만든 원수를, 삼손과 같이 한 번에 제압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고, 이전에 우리가 나타냈던 열매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 16 : 30절 말씀을,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능력의 역사가, 이 시간 이후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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