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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로 힘써 준비하는 성도 (행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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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행 1 : 1 - 14
제 목 : 기도로 힘써 준비하는 성도

예수님이 택하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열 두 제자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에 동행했던 자들이었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목격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후에도 부활하신 주님과 사십일 동안을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지상을 떠나 승천하시는 것까지도,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이 무엇 입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런 사명을 받은 제자들은, 과연 무엇을 해야 했겠습니까?  이 마지막 명령을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당부하신 것은, 다름 아닌, 꼼짝 말고,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4절 말씀을 보세요.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런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이 주님의 명령은, 지금 당장 제자들에게 땅 끝을 향해 출발해서, 증인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라.” 고, 현재 진행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 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증인이 되는 전도의 사역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지금 해야 될 것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는 겁니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 8절 말씀을 보세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왜 주님이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증인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십니까? 
성령을 먼저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는 전도의 일, 우리가 성령 받았을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냥도 전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성령 받아 전도하게 될 때, 우리는 힘 있게 그 전도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이런 귀한 성령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성령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기도할 때에, 성령에 충만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 하다가, 성령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도들은, 그들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12절 말씀을 보세요.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한 곳에 모여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 쓰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우리의 인생 또한,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수천, 수만 가지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 언약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붙잡고  살아가는, 언약의 백성들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남발하는  공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될 귀한 축복의 내용들을, 실제적으로 내게 나타나게 될 축복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 가운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가 반드시 기도해야 될,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기도해야 하느냐?  기도하지 않고 기다리게 되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막연하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투명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들기도 하고, 갑자기 불안해 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시리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나는 기도할 필요가 없어.”  여러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 가능해도, 실제적으로 이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그 믿음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믿음으로 강하게 출발을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믿음이 약해져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예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엔, 전혀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막 1 : 35절에 보세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또 눅 6 : 12절에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밤에도 철야하시며 기도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기도를 대충하셨겠습니까?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여러분,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으면, 땀이 피 방울과 같이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왜 주님이 이처럼 많은 시간을 기도하시며, 또한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은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명은, 곧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그 십자가 질 수 있는 힘이 안 생기기 때문에, 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기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그 사명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 그렇게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도 보세요.  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냥 기다리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써야만 했겠습니까?  그들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이 명하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가진 복음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이, 결국에는 희미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을 복음 전도의 사명을 앞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하실까요?  “기도는, 믿음의 학교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를 통해서 학습 능력이나, 지식이 늘어가고 성장해 가듯이, 우리의 신앙은, 믿음의 학교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더 성장해 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앙적인 성숙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가운데 응답으로 실현되는 그 사이에는, 반드시 이런 준비하는 시간이 있게 됩니다.  그 준비하는 시간을, 약속과 응답 사이에 나타난 그 시간적 공간을, 우리는 무엇을 하며 채워나가겠습니까?  기도하면서 그 공간을, 약속과 응답 사이의 갭을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힘써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의 응답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세요.
대부분이 보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도가 뭡니까?  교회에 나와  예배조차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일 때가 많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배드리지도 않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삶에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니 자연히 불평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자신의 삶에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데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원망이고, 불평이라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는 기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기도의 제목들을 놓고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습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하며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든지  기도로 준비된 자들에게만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축복, 그리고 우리의 사역에 힘을 더해 주는,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로 힘써 준비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이것이 허락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앞둔 신부가 준비함이 없겠습니까?  결혼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단장하지 않겠습니까?  또, 혼수를 예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이와 같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만 잔뜩 있고, 기도함이 별로 없는 사람, 기도를 해도 응답이 잘 되질 않습니다. 

여러분, 남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 기도가 귀하고 좋은 것입니다만,  그것도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응답이 되어도 더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남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마 10 : 13절 말씀을 보세요.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중보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그 인생에 손해 봄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히려 이익을 본다는 겁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어지면,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것이요, 응답이 안 되어지면, 그 기도의 분량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와, 내게 유익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인생이 복된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그리고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기도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내 능력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무엇으로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기도할 때만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믿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직분을 맡고 있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내가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교회 일 많이만 하던데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의 일입니까?  자기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일이 좋아서 그냥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일에 대한 욕심과, 일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그 일을 놓고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을 통해, 교회가 유익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직분이 크면 클수록, 나에게 맡겨진 직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주님도 십자가의 사명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무슨 배짱으로 직분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내게 맡겨 주신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신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구역장의 일이나, 또는 교사의 일, 다 하나님의 일 아닙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도요 집에서는 다 기도합니다.” 
글쎄요.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왜요?  솔직히 목사인 저도, 집에서는 기도가 잘 되지 않는데,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신앙이 좋으시다면 가능하겠습니다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이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교회에 나와 기도해야 합니다.  적어도 금요 기도회에는 함께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제직들은 매주 나오셔야 합니다.  내 기도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매주 나오셔서,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6절 말씀을 보세요.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힘써 기도해야 할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전파됨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힘써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13절, 14절  말씀을 봅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 쓰니라.”

제자들이 기도하기로 결론은 맺은 것 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왜 한군데 모여  힘쓰며 기도했을까?  기도 응답을 의심한 것도 아니고, 이미 주시기로 약속한 것을 구하며 기다리는데, 각자 알아서 자기 처소에서, 편리한 대로 편한 시간에 기도하면 되지, 구태여 함께 모여서 힘써 기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 사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이 아직 연약해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모여 있었던 것입니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성령 충만이라는 한 기도의 제목을 놓고, 기도하기 위해서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목적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러한 목적만 있었다면, 오순절 날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후에 그들은 흩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이후에도 그들은 날마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행 2 : 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기도했던 주된 이유는, 사실 성령 충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아우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늘 팀웍이 잘 맞고 협동 단결하던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러 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 죽기 얼마 전까지도, 서로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겠다고 서로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 여인이라서 대접 못 받기도 했지만, 전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멸시와 천대와 조롱의 대상이었던  그런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질적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결코 혼자 하기 힘들어서 서로 약속하여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함께 하기 위해서가, 그 목적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 됨만이 아닙니다.  성도들 간에도 하나 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없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곳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 10 :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말세의 때입니다.  주님의 재림하심이 가까운 때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우리 성도들은 모이기를 더욱 더 힘써야 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보다, 골방에 들어앉아  모니터를 대하고 있는 게 더 익숙한 세대입니다.  사람들 만나면 말 많고  귀찮다고, 그래서 점점 더 깊은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안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오랜 시간 신앙적 훈련이 잘 되신 분들은, 오히려 함께 모여 기도 한다는 것이, 더 불편하고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개인에게 유익하냐?  무익하냐?  편하냐?  불편하냐? 를 떠나서,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 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한 교회가 어찌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초대 교회의 부흥의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늘 하나 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마가의 다락방으로 함께 모이시기를 바랍니다.
나와야 합니다.  자꾸 만나야 합니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능력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함께 선한 일들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위하여, 공통의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힘써 기도해 나가는 성천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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