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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대지 마 (행 23: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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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지 마 (행 23:12~35)

강산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습니다. 보는 이들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듭니다. 잡시 시간을 내서 산으로 들로 나가서 경치에 푹 잠길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시간만큼은 모든 근심 걱정을 다 잊고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경치 속에 풀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삶은 그러한 정경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언제부터인가 돈이 없이는 아무런 행세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돈이 원수라는 말도 합니다. 그만큼 돈이 없이는 살기조차 힘든 그런 세상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슬프나 기쁘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함께 하는 것으로 알았던 우리네 사회가 세계에서 이혼율 1위의 나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도 힘든 그런 세상살이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받은 상처를 집안에서나마 위로를 받고 치료를 받기를 원하지만 서로가 이를 채워주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저 공부 공부하면서 공부에 목을 매는 세상, 그것만이 인생의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자녀들을 다그치다보니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 아래 행복을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할 우리가 믿음 안에서조차도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며 살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여유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덮기는커녕 들추어내고 서로 상처주기에 바쁜 그런 삶의 현장에 우리는 팽개쳐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다고 해도 그 세상을 밝고 아름다운 세상, 정말 함께 하는 것이 즐겁고 마냥 기쁜 그런 삶으로 바꾸어나가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공의회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로 나뉘어 서로 논쟁을 벌이다 그만 바울을 처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유대인들은 너무도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약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며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우리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과 공의회에서는 천부장에게 가서 바울이 한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심문할 것이 있으니 바울을 내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가 바울이 이리로 오는 길에 그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바울을 죽이겠다고 음모를 꾸미는 40여명의 유대인들이나 그들의 계획을 듣고 그대로 승인해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모습을 보며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를 죽이겠다고 계획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말리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허락해 주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보면서 어찌 저들이 그럴 수가 있는지 정말 마음이 상합니다.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전하는 바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바울을 설득하거나 토론을 해서라도 바로 세는 노력을 했어야 합니다. 아니 혹시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 보다 자세히 바울의 말을 통해서 왜 바울이 그렇게 전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난 다음에 그런 계획을 세워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이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믿는 것과 바울이 전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잘못되었는지 잘못되었다면 어느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그 잘못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혹은 바울이 잘못되었다면 바울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하고 기도했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들은 언제나 올바르고 따라서 바울이 틀렸다고 처음부터 단정을 짓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 생각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바울을 도무지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라도 나서서 “아니다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난 다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도 늦지 않다”고 하며 저들을 말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조차도 이 바울을 죽이겠다고 음모를 꾸미는 40명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바울이 어겼기에 바울을 처벌하여야만 한다고 해도 자기들은 율법의 정신을 따라 바르게 처벌의 길을 마련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들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바울을 죽여 버리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이를 이루기까지는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까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믿음과 삶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이를 승인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실 저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속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저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사실은 예수가 다시 알아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가고 나서는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할 뿐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라고 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서워서 도망쳤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갑작스럽게 달라진 모습과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많은 역사들을 보면서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그만 할 말을 잃었던 것이 아닙니까? 억지로 제자들을 불러다가 때리면서까지 다시는 예수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지만 오히려 제자들은 더 당당하게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노라고 할 때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저들의 하는 일이 하나님께로 난 것인지도 모르니 그 되는 일들을 조용히 지켜보자고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은 자기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람들을 선동했던 그 잘못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라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누려오던 기득권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결국 저들의 양심을 가려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요 너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 비판은 오히려 남의 눈에 티를 빼라고 하면서 자기 눈에는 들보가 들어있는 사람과도 같다고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이건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흥분해서 이를 온통 사람들 앞에서 까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 죄는 눈 속에 티와 같이 극히 작은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그런 나뿐 사람이 다 있느냐고 하면서 이를 떠들어대는 그 사람이 더 나쁜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조차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떠들어대는 그 순간 나는 더 질이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또 말씀하셨습니까?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했으며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 있는 의인 100명을 인해서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은혜로 그를 잡아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남녀노소를 가지지 않고 도끼를 휘둘러 20여명의 사람들을 죽였던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형수를 한 사람이 끈질기게 찾아갑니다. 가족들도 외면하는 그런 끔찍한 사형수를 계속해서 찾아가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결국 그 사형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그가 사형을 당하기까지 감옥에서 자기 만난 예수를 다른 죄수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형수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자그마치 2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사형수도 이렇게 예수 안에 변화가 되니까 위대한 전도자가 되는데 하물며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40명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는지 말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는데 결국 바울을 죽이지 못했으니 결국 그들이 다 굶어 죽었을지 아니면 자기의 맹세를 다시 깨고 음식을 먹고 살아났는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사람을 죽이겠다 맹세까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아마 우리 가운데는 그런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실 줄로 믿습니다. 혹 그런 분이 있다면 그래서 정말 살기가 내 안에 가득한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시간 그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미움하며 외면하는 사람이 아닌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품어주고 바로 세워가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이제 바울은 꼼짝 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들의 음모대로 바울을 심문하도록 내어 달라고 하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천부장은 바울을 내어 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기다렸다가 그 길목에서 바울을 죽이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음모가 진행되도록 내버려두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 보십시오.

이들의 계획을 하필이면 바울의 조카가 듣게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삼촌인데 그 조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부랴부랴 병영에 있는 바울에게 조카가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 바울이 백부장 한 명을 불러 “이 젊은이를 천부장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천부장에게 전할 말씀이 있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의 조카를 데리고 천부장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바울이란 죄수가 저를 불러 이 젊은이를 천부장님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서 데려왔습니다. 천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천부장이 젊은이의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물었습니다.

“내게 전할 말이 무엇이냐?” 바울의 조카가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천부장님께 바울을 심문할 것이 더 있다는 구실을 대면서 내일 바울을 그들의 공의회로 끌어내어 달라고 천부장님께 청하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곧이듣지 마십시오. 사십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숨어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준비를 다 해 놓고 천부장님의 승낙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천부장이 젊은이를 돌려보내면서 “네가 이 내용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난 다음 백부장 두 명을 불러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병사 이백 명과 기병대 칠십 명과 창을 쓰는 병사 이백 명을 무장시켜 오늘 밤 9시에 가이사랴로 떠날 준비를 갖추게 하여라. 또 바울을 총독 벨릭스에게 안전하게 호송할 수 있도록 그를 태울 짐승도 준비해 두도록 하여라.” 그리고 천부장은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드립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잡혀 살해당할 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고는 제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그를 구했습니다. 저는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는지 알고 싶어 그들의 공의회로 이 사람을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들이 이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에 관한 것일 뿐, 이 사람에게는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정보를 듣고 저는 곧바로 이 사람을 각하께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에게도 이 사람에 대해 고소할 말이 있으면 각하께 직접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군인들은 명령대로 그 날 밤으로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기병대에게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라고 부탁하고 다른 군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병영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병대는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총독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바울도 그에게 넘겨줍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안전하게 그것도 마차를 타고 아주 편하게 가이사랴까지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총독에게까지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울이 누구기에 군대가 이렇게 극진하게 지켜주며 호송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야 어찌 바울이 총독을 만날 수가 있겠고 또 총독과 귀족들에게 어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지키시매 악한 자가 손도 대지 못한다고 하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 우리들도 지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힌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담대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드리면 됩니다. 그런데도 나 혼자 그것을 끌어안고 끙끙대며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손도 대지 못하도록 “손대지 마”하고 명령하시고 지켜주고 계시는데 그것도 모른 체 나 혼자 힘들어하고 끙끙대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야 합니다. 찬송가에도 있지를 않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이 이제 저와 우리 모두의 찬송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모든 죄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가셨는데 내가 무엇을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 주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전전긍긍하겠습니까? 그 사랑의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도 손대지 마, 그는 내 사람이야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내 사랑하는 딸이야”

그런데 감히 누가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가며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혹 우리 가운데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너희 가운데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가운데 나는 아무런 죄도 허물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 나를 죽을 때까지 아무런 죄도 결코 짓지 않은 거야 하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손을 대고 입을 벌렸다가 그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벌을 누구라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는 어리석은 죄인의 자리에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거든 얼른 내 마음을 바로 잡고 내 안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을만한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 나를 먼저 바로 세우고 내가 보고 들은 바 그 잘못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그 사람을 바로세워주시도록 중보 기도하는 중보자요 축복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내가 먼저 그런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도 용서하는 자요 감싸주는 자요 덮어주고 바로 세워가는 귀한 축복자로서의 귀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나를 손대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서로를 섬김으로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을 천국으로 바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험한 세상입니다. 온통 사실도 아닌 누가 그렇다 카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만 가지고 사람을 매장시키는 그런 세상입니다. 아니 카더라가 아닌 사실이라고 해도 감싸주고 덮어주어야 할 우리가 앞장서서 소문을 내고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모습이 더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할 죄인 아니었습니까? 내가 지옥 백성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이 택해 주시고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 주셨는데 그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그저 나만 잘난 사람인 양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그러다 그도 안 되면 온갖 추악한 모습으로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그런 모습이 혹 내 안에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살펴보십시오. 그저 다른 사람을 밟고서라도 나만 올라서면 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안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 누구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용서가 안 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으로 손을 내미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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