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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 (고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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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 (고후 11:1-4)

  마르틴 루터는 원래 법과대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여행 도중에 갑작스러운 천둥과 벼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그는 당시 루터의 아버지와 같이 광산업 계통의 사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수호성자로 모시던 '성 안나'를 부르면서 자기를 살려주면 수도승이 되겠다고 엉겁결에 서약을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설교, 성경연구, 그리고 고행주의로 명성이 높던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그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철야기도와 금식과 온갖 고행들을 거의 건강을 잃을 정도로 열심히 했었습니다.
  훗날 그는 "만일 누군가가 수도승으로서 천당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회고했을 정도로 '남보다 갑절로 열성적인, 최고로 우수한 수도승'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떤 구원의 확신도 얻지 못했으며 그것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에도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루터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을 대표하여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는 그 임무 자체보다는 로마의 성지순례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큰 기대를 가지고 떠나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40명이 넘는 교황들의 유해가 보존된 칼릭스투스 성당을 비롯하여 7만 6천여 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그야말로 소위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모세가 본 가시떨기나무,' '헤롯에게 죽임 당한 아이들의 뼈 300개,' '바울이 찼던 쇠고랑,' '도미티안 황제가 사도 요한의 목을 잘랐다는 가위,' '갸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을 때 받았다는 동전' 등 온갖 종류의 성물들의 전시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위 '성물'들은 루터에게 아무런 무슨 '면죄 효과'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특히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관저까지 걸어가셨던 곳이라 해서 소위 '거룩한 계단'이라고 불리던 라테랑 성당의 계단을 큰 기대를 가지고 참배했습니다.
  관례대로 루터는 그 28개의 계단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한 번씩 암송하고 계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계단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에도 그는 마음에 아무런 사죄의 평안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루터는 고행이나 순례가 구원의 확신을 주기는커녕 아무 도움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로마를 처음 본 순간에는 자기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서 "오, 로마여! 축복받은 도시여!"라고 외쳤지만, 나중에 가서는 바로 그 로마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교회를 짓는 바로 옆에 마귀는 자신의 제단을 놓는다."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로마카톨릭은 루터처럼 가장 열성적인 사제조차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습니까?
  그때와 꼭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천주교 신자들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선행을 많이 행했다는 마리아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까지 평생을 그렇게 "많은 영혼의 고통"과 "끔찍한 어두움" 속에서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내면서" 살게 만들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주교가 '복음의 본질' 즉 '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얻게 해 주는 진리'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종교개혁 제 490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가 왜 '가짜 기독교'이며 '이단 종교'인지에 대하여서 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의 말씀을 통하여 그 명백한 이유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 주일에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들을 보았고 오늘은 그 세 번째 이유를 연이어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3. 천주교는 '다른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가짜 기독교입니다.

  본문 4하반절에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 역시 사도 바울이 반어법적으로, 즉 비꼬는 투로 하는 말임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 너희들은 이해심이 많고 아량이 넓어서 내가 너희들에게 전해 준 복음과 다른 복음을 누가 전해 주어도 너그러이 받아들여주니 그게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신자의 자세요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드는 훌륭한 모습이다.'라고 칭찬하는 말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뱀의 간계에 넘어갔던 하와'의 꼴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진실함과 행위의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되는' 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진리'를 뜻하며 그래서 '기쁜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라 하면 이것 역시 단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는 소식을 듣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를 입고서, 이제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는 완전사죄 선언을 듣게 되는, 너무나도 놀랍고도 고맙기 짝이 없는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 '단 한 가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아예 부인하는 골수 유대교인들은 아니었고, 분명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이었고 또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서는 율법도 다 지켜야 한다.'라는 사상을 그 원래의 복음에다 첨가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선행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오늘날의 천주교와 꼭 같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의 구원관을 아주 확고부동하게 배격했습니다.
  그는 로마서를 통하여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육체가 없다"(롬 3:20)라고 그런 이행득구의 교리는 어떤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드는 이단일 뿐이라고 명백하게 규정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꾸어 놓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비록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라고 두 번을 연이어 반복하면서 강조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그 보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그런 까닭에 이행득구의 교리는 비단 천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서도 꼭 같이 공감되고 있는 '공통적인 복음'이며, 이 교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억지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왜 그것이 틀렸는지, 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행함으로써 구원 얻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서도 너무나 분명합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아무 주석 없어도, 그저 상식적인 문장 이해력만 가지고 있어도 그 뜻이 너무나도 명백한 말씀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이 최고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두고 사람 자신의 공로에다 그 원인을 돌린다는 것은 너무나 지독한 교만이 될 수밖에 없으며, 구원이라는 이 최고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을 두고도 하나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다른 무엇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본분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착하게 산다 해도 그 착한 것을 죄인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선하심에 어디 견줄 수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선행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이 엄청난 선행과 어떻게 감히 나란히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주교는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반반으로 하든지 아니면 99퍼센트 대 1퍼센트의 비율로 하든지 간에 하여튼 예수님의 선과 자기의 선을 나란히 구원에 필요한 공로로 올려놓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의 선을 감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까지 올려놓게 되면 결국 점점 사람의 선을 더 높이고 더 올려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목사들 중에서도 예수 십자가 사랑보다도 마리아 테레사 수녀의 사랑이 훨씬 더 크게 보이고 더 감동스럽고 더 모범적으로 보이고 더 설교의 재료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선행만을 강조하다 보면 소위 '예수는 안 믿어도 착하게 사는 사람'까지도 아무 문제없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다른 종교를 믿어도, 아니 종교가 아예 없어도 착하게 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구원 받기에는 충분한 것처럼 되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행위를 자랑하는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만이 유일한 참된 복음이며 그 외의 다른 그 어떤 복음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뚜렷하게 선포하며 그 이유까지도 명확하게 이해시켜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이 '이행득구'의 교리, 이 '다른 복음'을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뻔뻔스럽게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의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전혀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어떤 사람도 자기가 구원 얻을 만큼 충분히 선행을 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자신을 가진다면 그것 역시 엄청난 교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천주교에서는 사제였을 때의 마틴 루터나 마리아 테레사 수녀처럼 남보다 갑절로 열심히 노력하고 선행을 행하려는 사람일수록 겸손하자니 구원의 확신을 가질 길이 없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니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로 갈 때에는 이제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무언가 얻을 수 있으리라고 크게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완전한 실망에 빠져 에르푸르트로 돌아오게 되었던 루터는 더욱 로마카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회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그는 비텐베르그 대학에 종신직 성경교수로 임명되는데, 그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공의로써 죄인을 향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 누그러뜨릴 수 없음" 때문에 지금까지 고민을 해 오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 사이에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의'란 죄인을 향하여 그저 화를 내시고 심판만 하시는 공의가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공로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저 믿기만 하면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은혜와 자비를 발휘해 주셔서 그 믿음만을 보시고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상아탑 사건'(the event of tower experience)이라 불리게 된 이 경험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언제 있었는지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하여튼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순간이 자신이 "새로 태어나게 된" 참된 '중생의 시점'이었으며 바로 그 바울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자기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 열리는 '구원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로마카톨릭은 '복음의 본질'을 파괴시킴으로써 루터와 같은 가장 열성적인 사제조차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오직 성경 말씀에 기록된 복음, 지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전파한 복음'이라고 하는 그 원래의 '단 하나의 복음'만이 그의 심령에 드디어 구원의 확신과 그에 따른 넘치는 기쁨과 감격을 가져다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신득구'냐 '이행득구'냐 하는 문제가 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만든 도화선이었고, 바로 그 차이가 기독교와 천주교를 확실히 나누어 버린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개혁자들이 보았더라면 기절초풍할 일이 1994년 3월 29일에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소위 'ECT(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복음주의자와 천주교의 연합) 선언'이라는 것이 미국 교계에 발표되면서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주요한 교리적 차이점이 이제 다 극복되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 'ECT 선언'은 소위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와 자매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도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기독교와 천주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연구하여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문은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성경관, 교회관, 성례의 문제, 성모 마리아와 성자숭배 문제 등에 대하여서는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양자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전파라는 한 가지 사명을 지향해야만 할" 관계에 있으며 그런 까닭에 신앙의 공통점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하여(by grace through faith because of Christ) 의롭다함을 얻게 됨을 함께 확인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마치 칭의 교리에 대하여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듯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프라울(R. C. Sproul)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선언에 '오직 믿음(only faith)' 대신에 그냥 '믿음'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 즉 '오직(only)'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분 나쁜 일"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믿음이 칭의를 얻기 위한 조건'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한 적은 그 어느 때라도 한 번도 없었으며, 그러므로 이런 선언문에 합동조인했다고 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양보하거나 후퇴한 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칭의는 그런 "믿음을 통하여"가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하여"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직'이라는 말은 믿음만이 칭의와 그에 따른 구원을 얻는데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임을 강조하는 핵심이며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의 요점이었습니다.
  또한 이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인하여"라는 말의 의미 또한 반감되기 마련입니다.
  즉 칭의를 얻게 되는 조건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는 것'임을 크게 깎아내리고 '사람의 공로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여유'를 비워 두는 표현이 되며 그것이 바로 천주교의 교묘한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이처럼 미소작전으로 나오고 있지만 천주교 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나 지금이나 사실상 요지부동입니다.
  '반종교개혁운동'은 종교개혁운동의 확장을 저지하고 개신교회와 신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로마카톨릭이 일으킨 것인데, 그 일환으로 1545년에 당시 교황 바울 3세는 '트렌트 공회'를 소집합니다.
  그 트렌트 공회는 특히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공식적으로 부인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죄인은 칭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협조해야만 할 다른 아무 것이 없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며, 그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자기를 준비하고 처신해야 할 그 어떤 필요성도 없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anathema)를 받을지어다."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회는 그와 같은 트렌트 공회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재천명함으로써 역시 종교개혁자들을 '저주'했으며 그 저주는 바로 그들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는 오늘날의 개혁주의 신자와 교회를 향하여서도 여전히 내려지고 있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 'ECT 선언'에는 여러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이 천주교 사제들과 함께 조인했는데, 사실상 그들은 천주교의 계책에 고스란히 속아 넘어간 꼴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또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그대로 참된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은 이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들을 억지로 하나로 뭉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가리켜서 "교회의 존폐 자체가 걸려 있는 조항(the article upon which the church stands and falls)"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그를 비롯한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이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인성론에 맞먹는 필수적인 교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이런 '이신득구'의 복음을 마치 무슨 '공룡'처럼 여기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종교개혁자들이 그처럼 '필수적인 교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그 당시에는 크고 중대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중요한 신학적 논제로서는 멸종되어 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소위 'ECT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은 '별 것 아닌 약간의 신학적 차이를 두고 교회를 분열시킨 독선주의자'들이고, 자기네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관용할 줄 알고 이해심이 많고 참된 그리스도 사랑이 충만한 같은 형제들'이라고 뻐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천주교는 아직도 겉으로만 '천사의 미소'를 짓고 있지만 뒤로는 여전히 우리 개신교를 '저주'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저주를 받고 있는 쪽은 어디까지나 '다른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천주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는 것은 성경을 떠난 이단이 만들어낸 소리이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로마천주교 사제가 되어 뉴욕의 교구에서 사역하고 있던 요셉 자켈로라는 신부는 1944년 2월 어느 주일에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신교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신부는 바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사람들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 것이 성령을 거스리는 죄가 아님'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교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하는 종교일 뿐 아니라 구원 받았다고 믿는 자체가 오히려 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음은 어디까지나 '다른 복음'이며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완전히 빼앗아 가버리는 '가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켈로 신부는 바로 그때부터 '교황의 명령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참된 복음을 깨닫게 되고 개신교 목사가 되어 그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통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에 없는 복음' 곧 "너희의 받지 아니한 복음,"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의 선행과 공로로써 구원 받는다는 복음' 곧 이 "다른 복음"을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전파하고 있는 천주교는 틀림없는 가짜 기독교라는 사실을 꼭 깨닫고 경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7월 10에 천주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로마카톨릭만이 지상에서 유일하고 진정한 기독교"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그가 주교 시절 때부터 이미 공표하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베네딕토 16세는 그 전에 4월 25일에는 세계의 여러 주요 종교 대표들 앞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모든 종교의 신자들과 우정을 나누는 다리를 계속 건설할 것"이라고 선언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서를 두고 개신교 중에서 천주교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목사들은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야단을 떨었지만, 천주교 내에서는 "교황의 말씀이 교회연합 운동을 반대하는 말씀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능청스럽게 둘러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황의 이런 말을 듣고도 천주교의 본색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전에 그저 미소작전의 가면으로 일관했던 교황 바오로 2세에 비해서 이 베네딕토 16세는 오히려 '솔직하게' 나온 셈입니다.
  즉 "천주교 아닌 개신교나 다른 종교 모두는 사실상 참된 종교가 아니며 그러니 너희들은 우리 천주교를 '어머니 교회'로 여기고 우리 천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일치운동에 곱게 따라와야 한다."고 내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자기네 교회에 대하여 당당하며 기독교를 속으로는 깔보고 저주까지 하고 있는데, 왜 우리 기독교 쪽에서는 이런 천주교 앞에 굽실거리는 저자세를 취하고 목사가 테레사 수녀를 칭찬하는 따위의 꼴불견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까?

  천주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당시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모든 종교개혁자들을 분명히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교리를 전하며 천주교의 법령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며 기도와 세례와 성찬을 비롯한 거룩한 활동들을 위하여 별도로 집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 쪽에서도 그런 로마카톨릭을 '거짓 교회'(false church) 즉 '교회가 아닌 교회'라고 또한 명백히 규정했습니다.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로마카톨릭은 "주님의 법을 저버렸으며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져들어서" 이미 "교회의 특권을 상실한" 교회라고 단정했으며, 따라서 그처럼 "주님의 말씀이 공개적으로 마구 짓밟힘을 당하며, 교회의 주된 능력과 혼에 해당되는 주님의 사역이 파괴되고 있는 그런 회를 누가 어떻게 감히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우상숭배와 미신과 온갖 불경한 교리들로 오염되어 있는" "(로마카톨릭과) 교제를 나누고 교리에 있어서도 동의를 하면서" "(로마카톨릭을) 교회로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gravely err)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무작정 '사랑'이란 미명만 가지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고서 "사랑의 연합은 믿음의 통일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믿음이 사랑의 연합의 시작이요 끝이며, 결국 그 유일한 규범이 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가 바른 믿음 안에서 공감되고 통일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는 장로교 안에서도 '교리는 따지지 말고 일단 무조건 합치자.'라는 너무나 수준 낮은, 정말 저질적인 구호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실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참 잘도 용납하는구나"라고 장탄식했던 그대로인 것입니다.
  '천주교와 다시 합치는 것이 이 시대의 새 종교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망언으로 설교할 바에야 도대체 왜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속된 말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하는데, 이 개혁주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신이 목사직을 사면하고 천주교 사제가 되면 될 것이지, 왜 "한국의 장로교를 칼빈주의가 망쳐 놓았다."라는 따위의 소리를 장로교 목사 이름을 달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기독신자요 장로교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라면 정말 이래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이단성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있는 목사라면 당연히 강단에서 외쳐야 할 사실이며,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가 되고자 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깨닫고 경계해야 할 요주의 사항입니다.
  이단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예수'를 전할 뿐입니다.
  이단이 성령에 대해서 오히려 더 많이 강조합니다.
  단지 '다른 영'으로써 미혹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단도 '복음'이라는 꼭 같은 단어를 쓸 뿐 아니라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더 열심히 전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마 23:15) '다른 복음'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바보짓 아니겠습니까?
  종교개혁 당시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적그리스도의 앞잡이'이며 앞으로 예수님 재림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욱 '666의 표'를 사람들에게 강요할 이 '가짜 기독교' 천주교의 정체를 똑바로 깨닫고 이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참된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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