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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나바의 믿음(1) (행 4: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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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의 믿음(1)  (행 4:36-37)

  여러분은 성경에서 어떤 인물을 좋아하십니까? 아마 성경을 대하고, 신앙생활하면서 존경하고 좋아하는 인물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만약 없다면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처럼 살려고 노력도 하게 됩니다. 큰 바위의 얼굴을 보면서 자란 소년이 결국 큰 바위의 주인공이 되듯이,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목표로 산다면 그 사람처럼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예수님을 제외하고 좋아하는 인물을 꼽는다면 다윗과 바나바입니다. 한 사람만 꼽기가 매우 힘들어서 그냥 두 사람을 좋아합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구약의 인물이고, 바나바는 신약의 인물로서 신구약의 균형과 조화를 맞추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더 실제적인 이유는 다윗은 제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아하는 사람이고, 바나바는 목회자로서 좋아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처음에 왔을 때 바나바에 대해 언급하면서 강조한 기억이 납니다만 저는 목회자로서의 모델을 바나바로 생각합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으로서 바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목회자로서 귀한 모델이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믿음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나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두 번에 걸쳐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본문을 중심으로 그의 믿음을 찾으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우선적으로 발견하는 바나바의 믿음은 한마디로 ‘위로하는 믿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이 ‘위로의 아들, 권위자, 위로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것처럼 원래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본명이 요셉인데 왜 바나바가 되었을까요? 사도들은 바나바를 보면서 그가 사람을 너무도 잘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바나바의 삶은 오직 위로자로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위로하는 믿음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어떤 사람, 어떤 경우에 그가 위로하는지를 통해 오늘 위로하는 귀한 믿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첫째는 바울과 관련된 위로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이후 마음에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일으키며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나 그의 생애 커다란 전환점을 이룹니다. 바울은 그때부터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살기등등한 모습에서 양처럼 순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큰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기며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주님을 위해 평생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이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처음 생각한 계획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와 제자들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기의 잘못을 빌고, 이제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다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결심을 하고 모든 여건이 좋지 않았지만 흥분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찾았고, 성도들을 만나려고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경계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것처럼 위장하고 접근해서 자기를 더 헤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근처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바울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답답하고 황당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때가 바울의 생애에 힘들고 어려운 때였습니다. 낙심하고 기운이 빠진 때입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행동할 수도 없었고, 속을 보일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이런 바울을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위로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수긍하고 받아주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의 명예를 걸고 바울이 진짜 예수를 믿은 새 사람이 되었다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바나바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으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도와 교제를 나누었고, 처음 바울에게 찾아온 힘들고 어렵고 낙심된 상황을 잘 극복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바울의 마음은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이미 준비된 사람이고, 모든 일에 열정이 있던 사람이어서 누군가 그를 조금 끌어주고 이끌기만 하면 크게 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건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젠 그의 위치가 아주 어중간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전처럼 잘 나가던 바리새인과 함께 일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리를 잡고 있던 교회에 뛰어들 상황도 아닙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바울은 결국 그의 고향 다소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고향에서 정말 쓸쓸하고 외로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고독과 싸우며 지냈습니다. 맘대로 되지 않는 안타까움에 많이 울고 또 많이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을 잘 이해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사역자로 부임해 가서 제일 먼저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준비된 사람 바울이기에 그를 잘 쓰면 교회와 하나님의 일에 큰 보탬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다소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위해 섬깁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바로 그것을 시작으로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평생 잊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를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인생에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되고 쓰러질 때, 외롭고 지칠 때, 바나바의 위로가 너무도 컸던 것입니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결코 바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이처럼 위로의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되고 쓰러질 때, 외롭고 지칠 때, 큰 위로자였습니다. 이런 위로와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참 힘들고 어렵게 사는 자가 많습니다. 낙심되고 지쳐 울 기력도 없이 고통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알아주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 속에 눈물로 자기와 싸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자에게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둘째는 마가와 관련된 위로입니다. 요한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고,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무슨 일에 주인공은 아니지만 조연으로, 조력하는 사람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약시대의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모두 마가의 조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마가가 있었고, 베드로에게도 있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에게도 마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마지막에 마가가 자기 일에 유익한 자로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으로 기억했던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로 부르면서 마가가 아니었다면 베드로전후서가 기록되지 않았을 정도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도 마가는 예수님 활동에 중심지가 되었던 마가의 다락방을 제공함으로서 예수님의 주옥같은 말씀과 사역의 중심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이렇게 마가는 뒤에서 옆에서 말없이 협력사역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인생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3장에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의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큰 꿈을 안고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되어 선교지로 떠났고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는 두 사람이 전면에서 복음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뒤에서 말없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여행을 하던 중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팠던지, 아니면 일하다가 힘들고 지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든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합니다. 오직 마가가 여행을 하다가 돌아간 것만이 확실합니다. 마가의 도중하차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힘들게 1차여행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안식과 충전을 하고 2차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가가 다시 함께 팀에 합류하여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원칙론자였던 바울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혹이라도 또 중간에 마가가 도중하차하면 사역에 큰 어려움이 생기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마가를 변호하며 세워준 사람이 또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는 달랐습니다. 아무리 한번 실수 했더라도 용서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주장입니다. 이 일로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물론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다 회복됩니다. 하지만 이때가 마가의 생애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였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실패한 일로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도 못하고 힘들게 보낸 시기입니다. 바로 이런 그의 인생에 커다란 힘과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한번 실수했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마가의 인생은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에게 있어서도 바나바는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이 됩니다. 마가는 자기를 인정해주고, 신뢰해주고, 기회를 준 바나바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성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협력자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처럼 위로자입니다. 한 인생에 실패하고 넘어져 일어설 수 없는 안타까운 때에 힘을 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위로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도 많은 잘못과 실패를 경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우리를 용납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아 넘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원치 않는 실패로 좌절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도 의지가 약하여 잘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손가락질 하고, 비난하고,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고, 날카롭게 대하지 않습니까? 사실 자기는 더 많은 실수를 하면서도 남이 가진 작은 실수, 한 번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한 대로 대가를 받으면 아무도 여기에 남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하여 주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고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실패하고 잘못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사랑입니다. 질책과 비난에 앞서 용서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마가와 같은 사람에게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입니까?

  셋째는 성도와 관련된 위로입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안디옥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에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그 교회가 잘 세워진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그 교회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즐거운 마음으로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그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한 일은 오직 위로였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너무도 어려운 상황가운데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이 처한 어려움은 고향을 떠난 외로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 원했지만 박해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안디옥에 왔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겪으면서 그들은 날마다 눈물로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이들의 어려움은 박해에 대한 어려움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예루살렘 못지않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성도를 고소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아는 사람들도 이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처음 이 말은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 말입니다. 그냥 아무 일이 없어도 살기가 힘든데 늘 긴장하고 살던 때입니다. 게다가 죽음과 삶이 오가는 박해와 핍박으로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든 때였습니다.

이처럼 내부적, 외부적으로 고난이 겹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였습니다. 바나바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서 한 일은 매일 그들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이제 곧 지나갑니다, 지금의 고난은 앞으로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며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힘을 냅시다..’ 하며 바나바는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큰 힘을 얻었고, 교회는 점점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이방선교의 뜻을 이루어 사도행전의 획을 긋는 모범적인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 당대와 후대에 인정받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바나바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영향을 받은 성도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위로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부름 받아 함께 신앙 생활하는 모든 공동체를 향해 필요한 믿음입니다.

  인생은 수고와 슬픔이 그치지 않고 반복됩니다. 물론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많지만 이것이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많은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해서 생기는 일은 아닙니다. 예고 없이 고난은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이런 고난의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위로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서로를 향한 관심과 이해, 정감 있는 교제, 서로 세워주고 높여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위로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만약 우리 삶에 위로가 사라지면 너무도 삭막한 것입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밖에서 이렇게 힘든데 안에서의 귀한 사랑과 위로가 결국 우리가 지탱하고 사는 힘이 됩니다. 나는 위로의 사람입니까?

  그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지난 34년이란 세월을 은혜가운데 지내왔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전건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이 큰 축복과 은혜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과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일입니다. 이런 때 우리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위로입니다. 지적하고, 비난하기보다, 격려하고, 힘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어도 감당하기 힘든 때에 만약 자꾸 힘을 빼는 일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주저앉게 됩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과연 나는 위로의 사람입니까?

  헤밍웨이의 단편집 가운데 "세속의 신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어느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이 광고를 내고 아버지가 약속한 날 장소에 나갔을 때, 파코 라는 이름을 가진 800여명의 젊은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용서 받고 싶고 위로와 사랑을 받고 싶은 아들의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800명뿐이겠습니까? 아마 파코라는 이름을 빼고 ‘아들아 용서했다, 만나자’고 했다면 모든 젊은이들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용서요, 사랑이요, 위로입니다.

  성경은 위로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뭇 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66:12-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3-4)

  바나바의 믿음은 위로의 믿음입니다. 낙심하고 외로운 바울을, 실패하고 잘못한 마가를, 환란과 고난에 있는 성도를 위로한 사람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위로의 믿음으로 힘을 주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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