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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할 이유 (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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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할 이유 (빌 4:4)

현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지만 별로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넓은 방에서 잠을 자도, 으레 누리고 사는 것인 양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고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큰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족을 모르는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헐벗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더 좋은 차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상대적 빈곤 따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은 주관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행복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냐 하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질병으로 인해 시시각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당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에 근거해서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된 것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스런 신분을 말해 줍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을 만나보면 미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의 시민이 된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으스댑니다. 반면에 빈민국의 시민들은 기가 죽어서 지냅니다. 우리나라에 취업차 온 제 3세계 사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미국 시민권이 대단하다고 해도 천국의 시민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유리 조각과 다이아몬드에 견줄 수 있을까요? 아니 도저히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전자는 지상의 시민권이요, 후자는 하늘의 시민권입니다. 전자는 흥망성쇠가 있는 지상 나라의 시민권이요, 후자는 영원무궁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입니다. 이 땅의 나라는 군대와 경제의 힘으로 유지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전자는 인종 차별과 빈부의 격차가 상존하는 나라지만, 후자는 모든 시민이 사랑 안에서 한 형제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사는 나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런 신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신분에 관해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시민으로서 긍지를 갖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천국 시민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비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 정직하고, 예의 바르며, 인정 있고, 밝고 맑은 표정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원망 불평하고 불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천국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나는 천국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때 천국 시민답게 행동할 뿐 아니라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함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언뜻 보면, 성도들도 세인들과 별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모든 일을 하는 마음 자세가 다릅니다. 세인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만, 성도들은 이 땅을 나그네로 잠시 살다가 갈 곳으로 여깁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항상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부자였지만 돌이나 나무로 번듯한 집을 짓고 살지 않고 일평생 텐트를 치고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 10절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신앙의 선조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3-16)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성도들의 거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집에 살 수 있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거처할 집이 좋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속상할 것 없습니다. 남보다 가진 것이 적어도 너무 상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려한 옷이 없어도, 진수성찬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나그네로서 잠시 지내다가 본향으로 갈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를 위해 열 두 종류의 보석과 정금으로 지은 저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열 두 진주 문이 있고, 길은 맑은 유리와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으며, 길 가운데로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종류의 과일을 달마다 맺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호화스런 궁정인들 천국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한국 여류 여행자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여성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오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경험한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어떤 때는 소나기를 만나 온 몸이 비에 흠뻑 적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도를 만났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똥으로 벽을 바른 어두 껌껌한 움막에서 쓰러져 자기도 하고, 구역질나는 음식도 먹고, 온갖 생소하고 힘든 환경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즐깁니다.

아마 그 사람더러 그곳에서 평생 살라고 하면 기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계속 살 것이 아니고 몇 날 색다른 경험을 한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잠시 잠간의 불편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 형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국해서 친지들을 만나면 여행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위험한 순간들을 즐거운 모험담으로 풀어놓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모험담을 가슴 졸이면서 들으며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느라 고생하던 것이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잠시 나그네 길을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생각하시면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함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야말로 성도들이 항상 기뻐할 이유인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인류의 역사가 막을 내릴 것이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는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처럼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야 합니다. 세상의 지위나 재물, 학식, 재능 따위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쫒은 일을 하였더라도 그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칠십 인 제자를 세우시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 얼마 후에 그들이 기뻐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시고,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기뻐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것도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귀신을 쫒아내는 일은 지상의 삶이 끝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귀신들이 없으니까요. 더구나 귀신을 쫒아낸 것이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표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할지라도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면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여러분은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아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주의 강림을 소망함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거기로서’란 ‘하늘로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서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을 우리가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는 예수님께서 종말과 재림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9-30절에 보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고, 25장 31절 이하에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곧 이 세상 역사의 종말을 뜻함과 동시에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성도들에게 기뻐할 이유가 되는 것은, 그 날에 성도들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보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강림 시에 성도들이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15장 42절 이하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때로 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 다치기도 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고 쇠약해집니다. 그리고 죽어 땅에 묻힐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지만 그 역시 죽었습니다. 천년을 살더라도 언젠가는 한 번 죽는다고 할 때 단지 오래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영화로운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는 가운데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왕국에 들어가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6절에 보니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계 22:5).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해 우리에게 임할 이 모든 영광스러운 미래를 생각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자신 만만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근심,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무한 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초조해 합니다. 각종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음이 쉴 겨를이 없습니다.

미국에는 병원 중에서 정신과 병원이 가장 잘 된다고 하는데, 정신과 병원이 교회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신과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몰라도 우리가 가진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직업별로 자살률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살 원인의 80%가 우울증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난히 많이 받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정신과 의사를 찾지만 정작 정신과 의사는 어디 호소해서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신과 의사의 처지에서 자기가 정신적인 질병이나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있으니 곧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우리를 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 줄 자가 있습니까? 어느 재벌 회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장관입니까? 대통령입니까?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이 저마다 국민의 고충을 다 해결해 줄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들의 말이 진심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여념이 없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만드셨으며, 지금도 그 능력의 말씀으로 붙드시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 각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 언제라도 사정을 아뢸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신 대로, 성도들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도해도 되고 저것을 위해서는 기도하면 안 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기억할 점은,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란, 우리의 기도가 확실히 응답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감사할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그 결과로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인간은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큰 타격을 받아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많은 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낙망하고 좌절하였을 법한데, 두 사도는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것도 감옥에 갇힌 모든 죄수가 다 듣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을 주장하였기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서 붙잡혀 감옥에 갇혔습니다. 때는 무교절 명절이라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기가 끝나면 백성 앞에 끌어내어 처형할 작정이었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처형하려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천사가 그를 구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어찌나 깊이 잠들었던지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목이 잘릴 판국인데, 이를 알면서도 어떻게 그처럼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평안인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아이는 주위에서 무슨 난리가 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갓난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있는 한 무한히 평안을 만끽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를 신뢰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다윗은 시편 131편 2절에서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위기를 만나면 새벽에도, 밤중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구속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언제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와 간구를 올릴 특권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 어떠한 형편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감옥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치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제 처형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감옥에 갇힌 사도는 늙고 병든 죄수의 몸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와 비교할 때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은 얼마나 평안합니까? 여러분은 환경이 좋은 만큼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환경에 좌우되는 기쁨이라면 별 가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면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의 이 권면처럼 언제 어디서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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