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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가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계명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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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계명 (막 12:28-34)
 
삶이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인생에 발걸음을 들여놓게 되면 우리는 수많은 욕구들을 이루고 성취하고 살게 됩니다. 마음에 원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하고 싶은 것들을 참기도 하고, 때로는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능동적인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계획과 전략이 앞선 사람이 승리하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탁월한 이가 무엇을 얻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의지와 실천력이 강한 이가 승리를 이루기도 합니다.
결국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합하여서 그 마음의 욕구를 이루고, 나아가 평안과 여유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나누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얻고 누리기 때문에, 나아가서 베풀고 나누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의미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성취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또 다른 정신세계의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전수해줌으로 기쁨과 평안을 나누기도 합니다.

즉, 우리 인간들의 세계는 즉물적인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정신적 만족으로 인해서 삶의 다른 일들을 이전까지는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획일적으로 금을 긋거나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나이든 세대나 젊은 세대, 혹은 청소년이나 더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고, 기준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차이나 혹은 각자의 개인적인 세계관의 차이로 대화의 단절과 이해의 부재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큰 테두리 안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이 합하고 어우러져 우리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또 뿐만 아니라 함께 가기도 하며, 넘어지고 일어나며, 우리의 삶은 어느새 종합적인 감정의 결정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하루 일상을 살펴보아도 아침에 기분 좋았다가 오전에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점심식사 잘 했는데 저녁에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불편하기도 하고, 약 먹고 목욕했더니 더 좋아지기도 합니다. 전화 받아서 갑자기 우울해졌는데 늦게 들어온 자녀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더러는 생각해보니까 오늘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참 다양해.
이렇게 한 면보고 말할 수 없어.
하고 종합해보니 ‘그래도 살만한 거야.’ 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일 아침 다시 일찍 일어나 오늘 이루지 못한 미진한 일을 이루어보자 하고 힘쓰고 애쓰기 위하여 새로운 잠을 청한다면 그는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좀 될 만하면 또 안 되고, 기쁠만하다가 어려워지는 게 인생이구나.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는 삶이라면 참 난감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기쁨과 보람과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려면 우리는 우리 삶이 달려 나아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명확한 개념을 설정해주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주님의 원하심을 이루는 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믿음의 수준이 지나면 우리는 내 기쁨을 위해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큰 기쁨이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개념, 쉽게 말해서 ‘성도들은 이것은 꼭 이루어야 된다.’ 라는 것에 대해서 오늘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최고 가치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인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즉 주님의 사랑은 그를 죽임으로 우리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에게 계명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한 서기관에게
첫째,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개념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그리고 힘을 다하여야 할 만큼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는 제시되어져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어려움과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다하여야 할 만큼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쉬운 것이라면 이렇게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나열하고 운운하셨겠습니까?
더욱이 이러한 요구는 우리에게 어떤 한 순간뿐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지루한 전투가, 즉 우리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일정한 기간이나 수준까지만 하면 그다음 평안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싸우면서 그것을 견디고 기뻐해야 합니다. 믿음은 한순간 해놓으면 영구히 해결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한 순간으로 확정되지만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삶이라는 것은 늘 있어지는 수많은 문제들을 유연히 처리해 나가는 이와 같은 삶의 연속입니다.

저는 하는 일이 교회일밖에 없습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좀 편안해 질만하면 또 힘써 해야 되고, 사람도 어느만큼 키울만하면 또 주변에 없어지고, 또 늘 새로운 일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이러한 일 좀 될 만하면 또 다른 일, 또 다른 일 될 만하면 또 다른 일, 또 새롭게 시작해야 될 수많은 일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어디까지 수고하면 수고 끝나고 이제 편안해진다.’라는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어지는 모든 일이 기쁘고 즐겁고 과정까지 평안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가면서 날마다 숨 쉬고 살잖아요. 귀찮아서 호흡안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도 수많은 일을 늘 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요까지만 해놓으면 나는 아무 신경 안 쓰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어.’
우리 삶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높은 산 올라간다고 해서 요 앞에 있는 산 올라갈 때 숨도 안찰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 올라가도 그 다음에 얕은 산 올라가면 숨찬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42.195km 마라톤 풀코스 뛰는 사람들이 10km정도 뛰는 것 아무것도 아닐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숨차지만 익숙해지고 훈련되었으니 이겨낼 만하다고 가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른 것 예를 들것이 없으니까 목사가 설교하는데, 저도 설교 꽤 오래 했는데-이교회에서 17년째 하고 있고요-저는 이 교회 전에 교역자로 8년 정도 있었으니까 꽤 오래한 겁니다. 그런데 설교하면 할수록 더 쉬울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설교 많이 해놔서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한 말이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 다른 말 찾으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한 5분정도 짧게 하는 설교는 쉬울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좀 길게 하는 설교면 어쩌다 또 한마디 잘못해도 그것을 또 만회하고 커버할 수 는 시간이 있는데있, 짧은 시간 설교하면 한 마디 혹시라도 잘못하면 그것 만회할 시간도 없고 해서 정말 정신 차려서 짧은 시간에 핵심을 말씀드려야 되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모든 일 오래했다고 쉬운 것도 없고 오히려 점점 오래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우리인생의 삶입니다. ‘이만하면 됐다.’하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한 가지 하고, 또 한 가지 하고, 그저 하루하루의 싸움을 우리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같이 우리는 하루하루 숨 쉬며 살아갑니다.
요즘 저는 ‘연명해간다’라는 표현을 자주 생각을 하는데 정말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연명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갈등을 치러야 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 힘과 목숨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오늘도 싸우고, 내일도 싸우고, 세상 끝날 까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무지 무엇일까요?
이러한 우리의 모든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우리 기쁨 되고, 하나님이 이룸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 가슴이 뜨겁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우리로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나도 그게 좋은 겁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나도 좋고 하나님이 싫으면 나도 싫은 겁니다.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기쁨을 이루는 일과 계획과 준비 속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주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우리 가슴에 열정과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마음의 뜨거운 감격이 있고 그 감격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과연 주님을 사랑하느냐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때로는 독점적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제1이지 2와 3은 없습니다.
언제나 최우선권이 하나님께 있고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우리마음이 감동이 되고 감격스럽고,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피로의 회복이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일하는 것, 사랑하는 일은 그 일하는 것이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피로회복이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성가대에게 한 번 여쭤볼게요.
“성가대 연습하는 것 힘든 것이 아니라 피로가 회복되지요?”
제가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릴게요.
“이렇게 성가대 연습 오래 오래 하는 것, 아주 기분 좋고 그 시간 통해서 모든 피로가 다 풀어지지요?”
“아멘”
“예 감사합니다.”
우린 두 번 물어보면 힘이 납니다.
저도 이 설교하는 것, 이게 힘든 것이 아니라 설교하면 너무너무 힘이 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힘이 나야지 그것이 우리의 피곤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성도님들 오늘 예배에 이렇게 와서 한 시간 드리는데 예배드리고 나니까 “야, 힘이 난다. 내가 세상에서 지치고 지친 영혼이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내가 하나님께 봉헌하고 내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니까 오늘 내가 힘이 난다.” 이러고 가야죠?
밖에 나가서 차타고 “야, 빨리빨리 가자. 빨리 가서 쉬어야지. 너무 힘들어서.”이렇게 되면 참 어려움 일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모든 은혜를 제공해 주는 것이 되어야 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감동적인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섭섭한 일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없어야 됩니다.
사랑은 유구한 지속성을 가지잖아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이 생기고 소망을 가지고 나가는 게 은혜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목숨과 뜻과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가 믿음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겁니다.

두 번째는 ‘너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니까.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이가 좋으면 다 좋고 그 사람이 싫으면 다 싫은 겁니다. 그야말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이 되는 겁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행동이 싫으면 행동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싫은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의 집에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한 명이 있었는데 어릴 때 너무너무 정리를 잘해요. 제가 봐도 정말 놀랄 정도로 정리를 잘해요. 그 아이의 사물함이 있는데 그 사물함을 보는데, 어떻게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데 모든 그 아이의 소지품은 거기에 다 탁탁 정렬이 되어있어요. 제가 이 아이가 도대체 뭐가 될까 생각할 정도로 정리정돈을 너무 잘해요.

사람들이 오면 그 사물함을 딱 열어주면서 이거 어린애가 정돈한 건데 그러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얘가 사춘기가 되었는데 옷만 입으면 벗을 때 여기도 던지고 저기도 던지고 한군데에 던지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늘어놓는 것 같이 늘어놓더라고요. 그거 치우지도 않아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얘기를 했어요.
“얘, 너 어릴 때 그렇게 잘 치우더니 지금 왜 이러냐?” 그랬더니 뭐라고 얘기 하냐면
“저도 치우기로 마음먹으면 잘 치워요.” 이러더라고요.
제가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벗어던지면 제가 다 주워서 옷걸이에 걸어서 다 넣어줘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따님, 마음대로 던지십시오. 아빠가 다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게 싫지 않은 겁니다. 그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싫지가 않습니다.
여기저기 벗어던지면 “괜찮아, 스트레스 좀 풀어. 얼마든지 던져.” 그러면서 옷걸이에 걸어서 교복도 벗어서 던지면 제가 주워서 넣어주고 합니다.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휴, 얼마나 이렇게 할까? 크면 또 안 하겠지!’ 그런 마음이 들고 그리고 이런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커도 그러면 내가 기도하면 돼지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이런 얘기합니다. “따님은 좋으시겠어. 이렇게 거둬주는 아빠가 있으니까, 난 그런 아빠가 없어서 이렇게 늘어놓지도 못해.”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른 돼서도 그러면 할 수 없다. 저런 것 다 거둬주는 남편 얻도록 기도해야지.’
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면 다 예쁜 겁니다. 저는 걔가 아무리 어지럽혀도 하나도 안 미워요.
사랑의 수준, 이웃을 사랑하는 수준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웃이 우리들에게 분리될 수 없는 대상임을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잘되면 그들에게 뻐길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돌아볼 그러한 일입니다.
사랑의 지혜요, 우리는 사랑의 지혜를 발휘하여 지속적으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고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사랑을 지혜 없이 하면 부담이 되고, 그 사랑은 이루어 완성되지 못합니다.
사랑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고, 절제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이지 부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의무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큰 권리요 기쁨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 실천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쁨을 준 이웃에게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즐거운 일의 특징은 시간이 가면 오히려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주며, 그것을 통해 우리를 더 크게 만들고 승리하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랑의 즐거움이 부담이 되지 않게 돼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수밖에 없는 동기가 먼저 주어지고 깨달음과 감당할 짐의 부담을 서서히 늘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수준이 높아져야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정말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갑자기 금욕주의자가 되어 내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략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더 큰 어장에 나가서 더 많은 고기 잡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필요가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삶에는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있어야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에 의해서 열심히 노력한 것들을 실제적으로 내 손과 발을 통해서 나누어주는 이와 같은 실천적인 삶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론과 실천이 동시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만 파고들면 실천이 없는 사변가가 되고 맙니다. 실천만 파고들다보면 더 넓은 지경과 더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된, 제한된 실천밖에 이루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목회 인재양성 장학생들이 왔는데, 공부하고 다른 교회에서 2년 훈련받고 우리교회에 오도록 된, 한 4년 있어야 우리교회에 오는 학생들입니다. 저희가 장학금지급하고 또 이렇게 우리 부목사님들이 가셔서 한 달에 한번 씩 교육하고, 또 한 학기쯤에 한 번은 제가 만나서 얘기도 하는데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중요한 것은 말씀의 논리를 감상적인 언어로 전해야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보고, 분석하고, 깨닫고, 은혜를 받는데 우리가 그것을 전할 때 논리가 없으면 전달되어도 남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논리가 있어야 되는데 그 논리를 논리만으로 전하면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은 이성뿐아니라 감성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논리의 언어를 감성으로 전달하는 수단을 우리는 발굴해야 된다.
그래서 제가 열심히 공부하시고 여기에 오시기 전에 시집을 100권 꼭 읽고 오시라고 얘기합니다.
목사님들이니까 다른 책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그러니까 대신 시집을 100권 읽고 오십시오. 그래서 ‘숙제-시집 100권 읽는 것’ 이렇게 적어가시더라고요.

그래요. 우리에게 조화와 균형은 늘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좌뇌와 우뇌가 동시에 구동될 때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거거든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항상 실제적인 실천적인 삶과 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어떤 논리는 동시에 계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도울 것을 마련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만 가지고 안 되고 우리의 삶에 손과 발과 시간을 내서 내 손으로 직접 그 일을 실천하는 것을 실천적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겁니다.
실천적 삶만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비축하는 일을 안 하면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줄 것은 열심히 마련해 두었는데 실천적인 삶을 실행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정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한 나의 주기위한 노력과 그리고 실천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맛있게 먹고, 힘내서 돈 벌고, 땀 흘려 일해서 그것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달려가고 오는 것이 기쁨이기를 소원합니다.
맛있는 것 먹을 때마다 ‘이거 나 혼자 먹을 것이 아니야.’라고 생각해서 우월감과 묘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것 먹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나는 내 수준에서 좋은 것 먹고, 그 사람은 그 사람 수준에서 좋은 것 먹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느끼면 그 사람이 비록 어떤 위치에 있어도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나누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평등의 개념이요 은혜의 기쁨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가 진심으로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여기는 것이지 우리는 그와 같은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말은 해당이 안 된단 말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생활의 축복을 주신 것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감격이 있습니다.
삶의 겸손을 깨달은 은혜의 체험과 우리 삶의 가야할 분명한 목표를 찾았을 때 우리는 필연적인 사랑의 실천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생활을 보니 내 삶을 보니 하나님은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느껴야 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서 넘쳐서 ‘아,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오죽하면 저 사람을 통해서라도 흘러나올까?’라는 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니 하나님은 사랑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실천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구원을 이룰 생활 속의 기쁨을 찾는 축복의 작업입니다.
우리 삶은 어찌 보면 참 한심할 때가 있습니다.
뭘 먹고살지? 어떤 집에 살지? 뭘 입고 살지? 무슨 차타고 살지? 이런 생각하다보면 그저 우리 삶이 한없이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살다가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것조차 상황이 달라지면 아무의미가 없어집니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어떤 우환이 있다든지, 갑자기 어떤 일을 당해서 그 모든 것이 나와 관련 없는 것이 될 때, 이와 같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제한된 우리의 삶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축복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로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요새 점점 더 묵상하며 기도하며 깨닫는 것은 우리는 축복을 받아서 나누는 이들이 아닙니다.
이미 축복을 받았고, 받은 축복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축복하셔서 더 나누도록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꾸며 봤습니다. 만든 얘기입니다.

어떤 병실에 환자들이 있습니다. 한 여섯 명쯤 있다고 합시다. 다 환자예요. 그런데 밤에 그들을 돌볼 수 있는 보호자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다 아픈 사람인데 어떤 사람들이 다 아파하면서 그냥 몸을 잘 못 움직여요. “물 좀 먹었으면 좋겠다. 누가 물 좀 줄 수 없나?” 이렇게 얘기하는데 아무도 자기가 가서 물을 줄 수 있는 여력이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에 그래도 좀 덜 아픈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 여기 다 아픈 사람인데 나는 그래도 좀 덜 아파 내가 노력하면 그래도 몸을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 그래도 내가 이 중에서 상태가 좀 낫습니다. 제 몸도 아프지만 이 병실에 있는 동안 제가 더 아픈 사람을 돌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고만큼의 은혜만은 나에게 좀 주십시오. 그럼 내가 저렇게 목이 말라 물 달라고 하는 저 사람에게 내 몸을 움직여 가서 물이라도 한 컵 줄 수 있는 은혜를 내게 주십시오.’
저는 이것이 사랑이고, 은혜고,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다 환자입니다. 다 없는 사람입니다. 다 가엾은 사람이고요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내게 은혜를 주시면, 정말 내가 도울 수 있는 내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이 불쌍한 몸을 가지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십시오.’ 하는 것이 우리의 축복의 간구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나누고자 생각하면 우리의 지경은 너무 넓어요.

요즘 제 마음에 한 가지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제 이 교회가 본격적으로 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일을 위해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됩니다.
이제 3기사역의 중반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인물을 키워서 이 일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되고, 근시적으로는 계획을 세워서 가야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해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이 있으니 그 일만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일을 처리하고 또 처리하고 넘어가며 우리는 계획대로 가며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세워서 결국 그 일을 이루어가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한 선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일을 이룰 수 있는 큰 틀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기도하고 진행하며 우리 성도들은 그 일을 실천해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셔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에 대한 소망과 꿈이 있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은 앞으로 이 시대상에서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믿어요. 왜냐하면 이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실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누구냐면 성도거든요. 그러면 성도를 축복하셔서 그 일을 이룰 겁니다.

저는 요즘 목사의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도들의 이와 같은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려면 성도들이 축복을 받아야 되니까 결국 성도들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하고 기도하던 것이 구체적으로 가슴에 소원이 생기고 그것을 위해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계획과 기도가 생기니 하나님의 교회가 새로워져 그리고 또 하나님의 성도들이 새로워져 은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몸과 같이 사항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이 서기관이 이렇게 깨달아서 주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이 사람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어떤 번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낫군요 주님.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하늘나라가 너에게서 멀지 않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와 가깝다는 겁니다.
바른 깨달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해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평가받아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돼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파악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에게 바른 깨달음 없이 드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뜻인 하나님을 사랑함과 그 표현 방법인 이웃을 사랑함을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다보면 우리 주변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이런 말씀을 도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거룩과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스스로에 대한 도전을 해야 됩니다.
‘내가 무슨 거룩한 사람이 되겠어? 거룩이라는 말과 내가 상관이나 있겠어? 내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사람이야? 그저 하나님의 은혜 곁의 주변에 있다가 하늘나라 가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나는 거룩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을 생각하기에는 나는 거리가 너무 멀어.’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에 또박또박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에 도달해있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주님을 보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닙니다.
별것 아닌 작은 일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하는 것 세 가지 말씀드릴게요.
여러 가지 있을 텐데 저는 세 가지를 느꼈습니다.
첫 번째는 약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권태로움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항상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우리를 흔드는 것 같습니다.

약속했으면 하나님과의 약속이건, 사람과의 약속이건 그것은 지켜야 합니다. 사람과 한 약속도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지켜야 되고 그리고 이와 같은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됩니다. 그런데 상황 따라서 사람이 약속을 못 지킨다고 하고 거기서 물러나니까 늘 일의 끝을 못 맺는 겁니다.
중도의 포기,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래서 저래서, 내 마음이 이래서, 내가 어려워서, 상황이 이래서 중도에 포기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음 중요한 것은 권태로움입니다.
아무리 잘 돼도 안 돼도 하다보면 권태로운 거거든요. 지루하고, 힘들고, 슬럼프에 빠지고, 또 잘되기도 하지만 안 되기고 하고 이러면 권태로워지는 겁니다.

또 여기 벗어나서 좀 더 확실한 것 해볼까? 이런 마음 들고 가봐야 안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 권태로움을 극복 못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오늘 주보 칼럼에 제가<늘 느끼는 새로운 느낌>이라고 썼는데 보지 마세요.
원래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하는 학생이 얘기하면 또 책봅니다. 그러니까 보지마시고 나중에 읽어보세요.
<늘 느끼는 새로움> 아니, 늘 느끼는 건데 어떻게 새로움이라고 해요. 말의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렇죠?
말의 앞뒤가 안 맞죠. 늘 느끼는데 어떻게 그게 새로운 느낌입니까? 새로운 느낌이면 전혀 새로운 것이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느끼는 건데도 그것이 또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아요.

여러분, 목사가 설교하는 것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고 늘 새롭게 느껴요. 그렇죠? 훌륭한 성도죠?
하나님 말씀 받을 때 늘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고, 아침에 눈 뜰 때마다 하나님,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던 아침인데 이아침이 나에게 대단히 새롭게 와 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마다 전에 봤던 말씀인데 새로운 말씀으로 와 닿고, 내가 아침에 출근해서 볼 때 늘 새로움으로 의욕이 생겨나고, 또 뿐만 아니라 내가 봤던 사람인데 아 이사람 내가 봤던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 늘 저 사람에게 새로운 관심이 생기고 새로운 면모가 발견되고 나도 저 사람에게 어떻게 새로운 면모로 나타날까 하고 내가 또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늘 있었던 삶의 일상가운데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처럼 새로운 마음이 있는 겁니다.
‘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 또 새롭게 시작하자.’ 라는 마음이 들 수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새로움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권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요. 이래서 저래서. 사정이 이래서 저래서.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가야 합니다. 마침표 찍고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리고 약속을 무시하는 것 이러저러한 여건도 이유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과의 약속도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이룬 약속들에 대해서 변함없이 가게 될 때 결국 우리는 큰 손해를 봐도 나중에 그것보다 더 큰 열매를 보상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이루게 될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늘 흔들어요. ‘야, 약속이 뭐냐? 그건 네가 잘 모를 때 한 약속이야. 너 자신을 모르고 한 약속이야. 미안하면 돼. 야, 그것 하다가 그만 둘 수도 있지 인생이 어떻게 꼭 그것을 지키나? 그리고 하다보면 권태롭고 새롭게 시작하면 뭔가 새롭지 않을까?’ 늘 이런 것들로 우리 마음을 흔들어서 결국 가다보면 늘 하다만 것, 하다만 것이지요. 마지막에 이룬 작품은 아무것도 없어요.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인생에, 그리고 역사의 평가는 머릿속에서 계획한 것 가지고 절대 평가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제 작품의 완성을 가지고 평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머릿속에서 어떤 계획을 했다, 나에겐 중요하지만 역사나 다른 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계획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떤 계획이 실천되어서 어떻게 완성된 작품으로 나왔느냐가 중요하단 말입니다. 이것은 이룸이고 끝까지이고 결국 마지막까지 지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또 사랑하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랑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의 기쁨을 터득하고, 이론적인 맴돎이 아니라 실천적 기쁨을 체험하여 그것이 진정한 축복임을 깨닫고 느껴야 합니다.
어차피 한평생 사는 것인데 이렇게 밥 먹다 갈수는 없잖아요. 도대체 유익한 삶이 무엇이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분깃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돈 벌어서 요 수준에서 살 것인가, 날마다 요정도 수준에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살 것인가, 날마다 요 수준에서 헌신할 것인가, 도대체 나는 날마다 이 수준에서 그냥 이렇게 살다가 끝날 것인가, 생각하면 우리에게 또 한 차례 비약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결심하고 결단하고 내가 결단한 것을 생활에 실제로 올리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위해서 달려가야 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삶이란 어차피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의 바른 설정을 위해서, 또는 그릇된 길에서 수정하기 위해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단을 위해서 비장한 각오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필요합니다.
오래가는 일은, 온전한 작품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즐기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즐기는 것은 처음부터 그냥 좋아서 되는 것 없어요.

여러분, 운동배울 때 폼을 익히기 전까지는 재미가 없어요. 폼도 익혀지고 일정한 수준이 될 때 거기서부터 재미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복해서 참고 인내하다보면 어떤 경지에 이르니 별로 재미없던 것이 재미있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이끌림에 의하여 힘주시고 격려주시고 여건 인도해주시고 인내케 하셔서 결국 그 일을 이루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설교 준비하면서 사실 마음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음먹으면 할 일도 생기고, 보이는 것도 있고, 길도 앞에 열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교회 식구들, 우리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함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하나님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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