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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 믿는 자가 받아야 할 것 (행 8: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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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믿는 자가 받아야 할 것 (행 8:4~24)

반기독교 시민연대, 그리고 종교비판 자유실현 시민연대 등 안티 기독교 단체들은 무조건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야 할 종교라고 떠든다. 교회에 대해, 성경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우겨댄다. 오해와 무지에서 오는 자기 속임을 모르고 있다. 교회에 대해 알고 싶어 구도자로서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을 불신하고 있다. 구원은 믿음이 아니고 선행이나 공로로 받는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큰 오해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기존 신자들이 가지는 오해다.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성령에 대해서 아예 모르고 있다. “성령은 도대체 무엇이뇨?”라고 한다.

오늘 행8:4~24을 보면 그 오해의 대표자가 시몬이다. 우리는 어쩌면 다 시몬처럼 무지할지도 모른다.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함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어처구니 없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줄 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당연히 성령의 기름부음을 입은 줄 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오해이다. 교회에 나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 그것은 분명 나의 의지가 아니다. 성령의 감동이다.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교인들은 내가 주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믿는 순간에 성령을 받을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다. 성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무슨 근거로 예수 믿게 된 내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증언해 준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사도행전 8장이 확실히 보여준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8장을 읽어볼 때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몇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 전도자를 좇아다니는 것도 성령 세례 받은 것이 아니다. (행8:5)

행8:5을 보라. 빌립은 사마리아에까지 내려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많은 사람은 빌립의 말을 들었다. 행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하였다. 빌립의 전도 사역 속에서 일어나는 표적을 보았다. 파워있는 전도 사역 앞에서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갔다.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치료를 받아 건강을 얻었다. 빌립은 성령 충만한 전도인이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주는 전도를 하였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 빌립의 말을 듣고 전도자를 좇아다녔다. 그러나 이 보고 들으며 좇아다니는 것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파워의 현장에 서 있을 때 내가 성령을 받은 줄로 착각하면 안된다. 예배와 집회 중에 보여주신 이적들을 보고 거기 중심에 와 있었다고 해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다고 오해해서도 안된다. 물론 표적의 현장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마음이 새로워지고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다. 회개해야 된다는 갈급함이 생기게 되고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는 영적 욕구는 생겼지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적이 있었어도 보는 것은 구경꾼으로 있었던 것 뿐이다. 내가 받은 것이 아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녀서 모든 것을 보았다. 방언하는 것, 귀신이 쫓겨가는 것, 갖가지 표적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지내서 익숙해졌어도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둘째, 내가 머무는 장소에 큰 기쁨이 있어도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행8:8)

행8:7에서 축사와 사유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 표적의 결과는 감동이었다. 행8:8을 보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하였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의 기쁨 가운데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사마리아 성읍 사람들로부터 “큰 자!, 하나님의 능력이라 일컬어지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마술로 칭송받던 그 자신도 전도자 빌립을 통해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 분명히 어떤 일어나 사건을 보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성령 세계를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충격을 받아 놀라고 사람들이 회복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인생이 되었어도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감격한 마음으로 흥분되어 서 있다 해도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분과 느낌은 성령을 받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 받은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도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행8:12)

이미 앞부분에서 선포한 이야기이다. 행8:12을 보라.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행8;13을 보라.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하였다. 마술사 시몬까지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으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것 아닌가? 그것이 아니다. 왜 아닌가?

행8:14~16을 보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은 뿐이라.” 아멘!

의혹과 오해, 무지가 풀려진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지 저들 한 사람에게도 성령 임하신 성령 세례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도, 즉 죄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어도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기적의 현장을 보고 듣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더욱 아니다. 내가 기적의 현장을 보고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 심리적으로 감격하고 또 감격한다고 해도 성령 받은 것이 아님은 더욱 분명하다. 믿고 세례를 받았어도 한 명도 성령 세례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이럴 수 있을까?”라며 당황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동의해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과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다르다. 오히려 가슴을 치면서 인정하고 똑바로 알아야 한다. 교회에 나아와 내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죄에서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이는 모두 다 나를 위한 것이다. 신분이 바뀌고 소속이 바뀌는 인생이 된 것, 모두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내 영이 살아나서 구원을 받았다. 내가 패역한 세대에서 빠져나와 나 자신이 새 사람,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이 구원의 즐거움을 주신 분이 성령이다. 성령의 역사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일이지만 성령 세례는 아니다.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크리스챤이 된 내가, 구원을 아는 내가 힘 있게,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힘(Power)을 받는 것이다. 전도를 위한 Power를 받는 것이다. 즉, 기적의 현장을 기뻐 말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빌립을 좇아다니는 것에서 내가 전도자가 되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생길 수도 있지만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세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능력을 받는다. 능력은 너를 위해 쓰라고 주는 것이다. 구원은 나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능력은 일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도 전도를 못하는 사람이 있고 담대히 전도하는 사람이 있다. 그 다른 이유는 바로 성령 세례를 받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 얻은 그들에게 ①성령 받기를 기도하였다. 성령 내리신 일이 없기에 성령을 내리시도록 기도하였다. 우리는 이제 무지를 던지고 오해를 내던지고 성령 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나는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복음에 반대하지 않는다. 안티 기독교인처럼 빈정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믿으면서 힘없는 성도, 예배도 힘이 없고 기도도 힘이 없고 헌금도 굶어죽을까 두려워서 하지 못하고 섬김도, 봉사도 힘이 없는 생활을 계속하면 안된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이대로 안된다. 그렇게 깨달아지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하며 매달려야 한다.

기도가 성령 받는 통로다. ②성령 받는 것이 주님의 명령인 것을 알고 갈급해 하라. 목마른 갈급함으로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을 기대하는 것이 성령 받는 또 하나의 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리며 갈급했기에 불의 혀 같은 능력으로 바람 소리 같은 능력으로 임하였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의 언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임하였다. 성령을 사모하자.

③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저들에게 안수하였다.

히6:1~2을 보면, 안수는 회개와 믿음, 세례와 함께 도의 초보다. 그러나 안수는 위임이며 구별이며 계승이다. 안수는 세움이며 영적인 접촉이다.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 그들에게 흘러내리는 기름이 안수 받는 자에게 흘러내리는 것이다. 기름의 냄새가 안수받은 자들에게 묻혀지는 것이다. 바울은 안수함으로 디모데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으켰다. 바울의 손수건을 만짐으로 나음을 입었다. 기름 부어진 수건이기 때문이다. 안수가 업신여겨져서는 안된다. 안수가 통로다.

오늘 사마리아의 믿는 성도들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행19:6 에베소 교회 성도들도 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을 때 바울은 안수했다. 그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사람이 12명이 나타났다. 어느 곳에서든지 성령 세례가 임하면 역사가 나타난다. 기름은 바른 것처럼 부드러워진다. 이 성령 세례를 오해하지 말라. 이제부터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에게 사로잡히며 살아야겠다는 항복을 다짐하라. 시몬같은 크리스챤들은 오해한다.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산다고 오해한다 그리고 돈을 버는 목적에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오해한다.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도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인간적 수단이 아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하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인위적인 것들을 다 몰아내자. 어찌하든지 단순한 마음으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한 자들에게 모든 것이 달라진다. 힘 없는 교육, 힘 없는 헌금, 십일조를 드리기도 전에 계산부터 앞세운다. 힘 없는 양육 훈련, 힘 없는 속회 모임, 힘 없는 기도, 힘 없는 전도가 달라진다. 무기력한 크리스챤, 그것은 떠나간다. 머뭇거리는 크리스챤은 나와 상관 없다.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기를 축원한다. 11월 중에 있을 21일 특별 새벽 집회는 성령 받기를 위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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