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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행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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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행 5:42)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덴마크왕 크리스챤이 어느날 길 모퉁이에 서 있을 때 자동차 한대가 총알같이 질주해 오고 있는데 네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불쑥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차가 질주해 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구경꾼들은 새파랗게 질려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차 바퀴 밑에 깔리는 듯 싶었으나 그 왕이 신속히 달려 들어가 아이들을 두팔에 끌어 안고 무사히 나왔습니다.  그후 두 소녀는 죽음 직전에 왕에 의하여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수백번 즐겁게 되풀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강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고자 몸소 사망으로 돌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가말리엘의 변호로 공회에서 풀려난 사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어디를 가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며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 전도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능욕 받는 일은 공회에서 채찍질 당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채찍질은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이상근), 전통적으로 이 매는 40대가 넘지 않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사도들은 이러한 고난을 받고서도 오히려 기뻐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당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회당에서 채찍질 당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마 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들이 채찍을 맞으면서도 기뻐한 것은 (고후 12:10)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한 바울과 동일한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맥가비 McGarvey).

  비록 자신이 잘못을 범했더라도 그 잘못을 직접 지적당하고 책망을 받으면 감정이 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아무런 잘못을 행치 않으셨는데도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벧전 2:23). 그리고 직접 제자들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제자들의 전도의 자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 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모세 같은 경우를 보면 민족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애굽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을 보고서 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할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눅 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눅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런데 나중의 모세를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합니다.
제자들을 보면 그 이전과는 달리 너무도 온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같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변화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현하기를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합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합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따라서 성도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성도들의 손과 발을 통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읽도록해야 하므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고통스럽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온유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현실의 고통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고통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지자적인 혜안을 가지고 살펴 이 고통이 일찍이 예수께서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깨닫고 현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자신들도 내세에 축복받을 선지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깨닫고 기뻐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앙인은 환난이 닥쳐올 때 상황을 변화시킴으로 고통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신앙인은 환난의 내면적 가치를 깨달아서 고통을 이겨내고 나아가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 '죠지 윌리암즈'는 한 농가의 8형제 중 막내아들이었는데, 이 가정은 농업에 열심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죠지 윌리엄즈'는 13세에 학교를 마치었는데 형들은 이미 농사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내아들도 농사를 시켜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농사에는 적당치 않아 보여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가정 안에서 늘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날 마초에 건초를 싣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돌연히 마차와 이 소년이 함께 도랑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아무래도 이 자식은 농사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의논 끝에 어느 양복점에서 일하도록 취직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양복점에 찾아 드셨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상점 구석진 방으로 돌아 왔을 때 마음에 감동이 생겨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 들여 그의 마음을 동포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기를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동포들의 구령 운동자로 만드시려고 그를 런던으로 가게 하였고 거기서 전도자의 협력자로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일은 점차 확대되어 갔습니다. 드디어 세계 기독교의 자랑거리가 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성바울 대회당'에 장사되었습니다. 이 소년에 대하여 높은 생각과 뜻을 가지고 인도한 분은 그 가정의 부모도, 형제들도 아니었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그를 농사하는 아들로 삼으려 했으나 그것도 포기하고 기껏 양복점 점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죠지 윌리암즈'를 위해 최선의 생각과 계획을 갖고 그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전도.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는 '모든 날에 성전이나 집에서나'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성전 수비대나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마치면 각기 가정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성전 중심의 집회는 이후로 서서히 가정 중심의 집회로 전환되었습니다(이상근).

  제자들은 닥쳐온 환난에 감정적인 반응을 삼가했을 뿐 아니라 사명에 대해서도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 예레미야를 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전혀'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결실이 없었습니다. 그는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폭행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결실도 없는 일을 일생에 걸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리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음 전파 사역도 고난이 닥쳐온다고, 혹은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스럽고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라면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974년 로잔나(Lousanne)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대회(International  Congress  in World Evangelization)에 참석한 대표들이 놀란 사실은 아직까지 세계 인구의 25억 내지 30억이 복음의 소리를 교회로부터 직접 듣지 못하거나 또는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에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합니다. (Let The Eargh Hear His voice P.225-최한구,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서설, 풀빛목회 제48호. 1985년1월. P.51)

  이웃의 강팍한 사람을 위해 4년 동안을 기도하면서 전도 4년동안 시달린 이웃은 원수처럼 싫어합니다. 어느 날 찾아가서 한번만 교회갑시다. 도저히 귀찮아서 안되겠기에 한번만 가주면 되겠다 생각하고 : "딱 한번만 가면 되지요" "예" 언제" 이번 주에 그래서 모시고 갔는데 교회 들어서자마자 통회자복하며 결심하고 이렇게 좋은 예수를 왜 진작 안믿었던고하고 후회하더하 합니다.(끈질긴 기도와 전도)
     
  평소에 전도에 자신이 없던 사람이 큰 용기를 내어 아파트에 전도를 갔습니다. 벨을 누르고는 나와서 욕할 것을 상상하고 윗층으로 도망갔습니다. 한참 후에 그래도 해야지 하고 또 벨을 눌렸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서 또다시 도망갔습니다. 꼭해야지 각오하고 세 번째 눌렀습니다. 죽을 각오하고 문 열기를 기다렸다. "왜 그래요" "예수 믿습니까" "이사 왔는데요. 그렇찮아도 교회를 정하지 못하여서 생각 중인데 반갑습니다. 들어오셔요" 그리하여 쉽게 한 가정을 인도하였습니다.(담대히 전도하라)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

공회에 사로잡혀 매를 맞고 위협 당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난 후에도 그들의 메시지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무용담이 조금도 추가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미미한 듯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우리는 곧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은연중에 자기를 자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와 영광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기의 탁월함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죄의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정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증거자라면 우리 역시도 호리라도 예수보다 자신을 드러내 예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미국의 성경연구원 교수님들이 성경대로 학생에게 훈련을 시키는데, 아무것도 없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사흘 동안 전도를 내보냈습니다.  가진 것은 전도지와 칫솔뿐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서 잘 것인지, 무엇을 먹을 것인지, 어떤 차를 탈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짝과 함께 가고 있는데, 가는 방향으로 차가 오기에 세웠더니 차가 서더니 운전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는데로 갑니다." 라고 말하고는 그 차를 얻어 타고 가서 그곳에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한번은 전도지를 가지고 어느 집 문을 한번은 전도지를 가지고 어는 집 문을 두드리자 주인 남자가 한참만에 나오는데,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문을 열어 주며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묻자 " 지금 바로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고 난 이제 혼자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는 그런 말씀과 기도를 받고는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스펄젼 목사가 한 번은 보우트를 타게 되었는데,  그는  노를  젓는 사공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당신은 내세에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사공은 "예, 저는 술 마시지 않고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다시 물었다. "어떤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까?" "죄를 많이 지었지만 다 잊어버려 지금은 기억해 낼 수가 없군요 " 사공이 말했습니다. 스펄젼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의 소망으로 영접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사공은 너무나 정중한 스펄젼 전도에 이끌리어그 뒤로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여자 소경이 한번은 성경책을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미안하지만 여기 요한복음 3장 16 절에 붉은 줄을 좀 쳐주시겠습니까?"하고 부탁했습니니다. 선교사는 그 셩경 구절에 붉은 줄을 처 주었습니다. 이 여자 소경은 중학교 하교 시간만 되면 성경책을 가지고 학교 문 앞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재감거리면서 나옵니다. 그때 이 여자 소경은 "학생, 이리 좀 와 봐요, 여기 붉은 줄로 그은 성경 귀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 한번 읽어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학생은 그 성경 귀절을 자랑스럽게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여인이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물었습니다. 학생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이 여자 소경은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은 거야. 나는 비록 소경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단다. 그러니 너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해." 나중에 그 학교에 서 24 명의 휼륭할 영적 지도자가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되 전도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달입니다.
고난을 이겨 내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는 전도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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